-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1/23 23:46:40수정됨
Name   The xian
Subject   저. 순대 못 먹습니다. 다른 메뉴는 없나요?
저는 순대를 못 먹습니다.

순대국, 순대볶음, 순대전골 등등 당연히 못 먹습니다. 분식집 가면 제가 절대로 고르지 않는 것이 순대입니다. 아무리 맛있다고 하는 순대를 가져와도, 오징어순대 같은 순대 이름만 붙은 것을 가져와도 저는 절대로 안 먹거나, 못 먹는다고 하고 손도 안 댑니다.

그런 제 모습을 사람들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아마도 가장 먼저 저라는 사람의 생김새 때문이겠다 싶습니다. 제 모습만 봐서는 말술에 골초일 것 같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순대를 못 먹는다고 하면 잘 드시게 생겼는데 왜 못 드시냐는 의아함이 대부분입니다.

식생활 역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목입니다. 고기를 좋아하고 돼지국밥이나 선지국은 별 무리 없이 그럭저럭 먹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곱창 및 내장 요리류는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위기를 깨지 않을 정도로는 먹을 수 있지요. 오직 순대에 대해서만 까탈스러운 정도를 넘어서서 손사래를 칩니다. 돼지국밥도 선지국도 먹는 사람이 왜 순대를 못 먹냐는 이야기.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가 순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예 못 먹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아예 입에도 대지 못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제 고모님. 아니, 이제는 친가가 저와 제 가족을 배신했으니 '고모님이었던 사람'이 맞겠습니다.

제 아버지였던 사람이 가족을 배신하기 전, 그래서 아직 아버지였던 시절 제 아버지였던 사람에게는 형제가 꽤 많았고, 그 고모님들 중에는 좀 까탈스러운 고모님이 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열의있고 적극적인 분이셨고 사실대로 말하면 공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참으로 여러 가지로 사람을 달달 볶으시는 분이었지요.

그런데 그 고모님이 어느 날 집에 순대를 싸들고 찾아왔고 그 때 집에는 저만 있었습니다. 순대를 먹으라고 권유를 하십니다. 말이 권유이지 반 강제입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고 순대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고모님이 하도 무서우신 분이기도 하고 어른 말 잘 들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기도 했으니 고분고분하게 순대를 먹었는데. 먹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싸온 순대가 어느 때보다 역한 냄새가 났습니다. 신선도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생각해 보니 순대 외에 각종 부속물들이 평소보다 잔뜩 들어있었던 것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고모님이 제가 얼굴이 찌푸려지는 모습을 보더니 버릇없다는 식으로 화를 내시더니만 이것저것 잔뜩 덜어놓고는 이거 다 먹으라고 명령조로 말을 하신 것이죠. 뭐. 어르신 앞에서 얼굴 찌푸린 것이 잘못이라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순대만으로도 굉장히 괴로웠는데 다른 부속물까지 이것저것 먹으라니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습니다. 먹는 둥 마는 둥 뱉을 때마다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옆에서 괴롭혀대는데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뭐 저도 밥상머리에서 좋게 말하면 엄하게, 사실대로 말하면 꽤 폭력적인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심지어 밥 깨작깨작 먹는 게 기분 뭣 같다고 아버지였던 사람이 제 귀싸대기를 때리는 일도 있었지요. 그랬지만 제가 받은 최악의 밥상머리 교육, 아니, 고문은 그 고모님에게였습니다. 그 고모님은 최소한 그 순간만은 제 아버지였던 사람보다 두세 단계는 더 악마 같았습니다.

오죽하면, 저는 군대 다시 가는 꿈도 지금껏 한 번도 안 꾸는데 그 악귀 같은 고모님이 순대 놓고 했던 짓에 대한 악몽은 잊을 만 하면 꿉니다. 아직도 '너 간 먹었어? 간. 여기 허파는 먹었니?'하던 그 고모님 모습은 잊지 못할 것 같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때 처음으로 친척이 악귀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조금 후 외출했던 어머니께서 돌아오면서 저는 그 역겨운 순대 접시에서 벗어났고 저는 그 고모님이 가고 난 뒤 복통에 시달려 먹은 것을 다 토해버렸습니다. 오죽하면, 제 어머니도 제가 웃어른들 계신 식사 자리 앞에서 반찬투정이라도 하면 엄격하게 혼내시던 분이었는데. 제가 순대 때문에 그 지경이 된 이후에는 적어도 어떤 음식을 먹으라고 강요는 안 하시더군요.-_-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뻔뻔스러운 고모님은 자기 조카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 이제는 남남이 된 상황이라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이후 순대만 보면, 저는 그 때의 악몽 같은 기억이 다시 떠오르면서 먹었던 것이 속에서 역류하는 기분입니다. 그나마 세월을 거듭하며 좀 나아져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순대 전문점이라는 곳에 이끌려 가서도 꿋꿋하게 다른 메뉴를 찾습니다.

"저. 순대 못 먹습니다. 다른 메뉴는 없나요?"


- The xian -



14
  • 춫천
  • 좋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79 6
14646 게임[LOL] 5월 3일 금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5/02 108 0
14645 정치취소소송에서의 원고적격의 개념과 시사점 등 5 김비버 24/05/02 367 6
14644 정치경기북도로 인해 이슈가 되는 김포 13 Leeka 24/05/02 802 0
14643 오프모임5월7일에 가락몰에서 한우 같이 드실 파티원 모집합니다. 15 비오는압구정 24/05/02 529 5
14642 음악[팝송] 토리 켈리 새 앨범 "TORI." 김치찌개 24/05/02 89 0
14640 일상/생각합격보다 소통을 목표로 하는 면접을 위하여(2) - 불명확한 환경에서 자신을 알아내기 위해 안전지대를 벗어나고, 이를 꾸며서 표현하는 방법 kaestro 24/05/02 223 2
14639 게임[LOL] 5월 2일 목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5/01 132 0
14638 기타드라마 눈물의 여왕 김치찌개 24/05/01 289 0
14637 일상/생각합격보다 소통을 목표로 하는 면접을 위하여(1) - 20번의 면접을 통해 느낀 면접 탐구자의 소회 4 kaestro 24/05/01 414 4
14636 사회"내가 기억하는 중국은 이렇지 않았다" - 중국의 성장과 이민 2 열한시육분 24/04/30 816 0
14635 게임[LOL] 5월 1일 수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4/30 178 1
14634 의료/건강환자 곁을 지키는 의료진에게 아끼지 않는다는 합당한 보상 9 꼬앵 24/04/30 678 0
14633 일상/생각그래서 고속도로 1차로는 언제 쓰는게 맞는건데? 31 에디아빠 24/04/30 901 0
14632 일상/생각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비사금 24/04/29 793 0
14631 방송/연예범죄도시4로 보는, 4월 1일~28일까지의 극장 관객 수 3 Leeka 24/04/29 288 1
14630 방송/연예민희진 - 하이브 사건 관련의 시작이 된 계약서 이야기 6 Leeka 24/04/29 832 1
14629 일상/생각방문을 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9 kaestro 24/04/29 584 9
14628 꿀팁/강좌지역별 평균 아파트관리비 조회 사이트 무미니 24/04/28 337 2
14626 음악[팝송] 걸 인 레드 새 앨범 "I'M DOING IT AGAIN BABY!" 김치찌개 24/04/27 253 0
14625 의료/건강SOOD 양치법 + 큐라덴 리뷰 7 오레오 24/04/26 665 0
14624 일상/생각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6 kaestro 24/04/26 549 3
14623 방송/연예요즘 우리나라 조용한 날이 없네요 7 니코니꺼니 24/04/26 1188 0
14622 IT/컴퓨터5년후 2029년의 애플과 구글 1 아침커피 24/04/25 537 0
14621 기타[불판] 민희진 기자회견 63 치킨마요 24/04/25 1974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