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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2/10 02:34:00
Name   알료사
File #1   1549733632889.jpg (96.6 KB), Download : 8
Subject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그들에게도 찬란한 날들이 있었다. 서로의 잎사귀가 약속이나 희망 없이도 축복이던 때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갈색으로 변한다는 것 생기가 빠진다는 것 말라비틀어진다는 것 길에 나뒹군다는 것

알 수도 없었으며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가난에 대해서는 경험에서 나온 공통 감각이 있었다.

정민은 어려서부터 청빈함을 강요당하며 자랐고

희은은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몇 개월 동안 카드회사의 독촉이 지속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삶이 완전히 파괴될 만큼 절벽 끝으로 몰려 본 적은 없었다.

그들은 둘 다 젊었고 혼자였다.

가난을 향해 욕을 하는 대신 그것을 소박하고 편안한 셔츠처럼 각자의 몸에 걸치고 다녔다.

희은은 열정이 소진되는 것이 두려웠고 정민은 꿈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 것이 그들의 공포였다.

젊은 그들은 때때로 거울 속에서 노인의 얼굴 같은 슬픔을 발견하고 자신이 낙엽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으며

그 사실을 고백하는 상대방에 얼굴에 난 눈물 자국 때문에 서로를 사랑했다.







결혼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들 각자에게 너무 자명한 것이었기에 따로 대화를 나눠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두 개인의 원래의 모양과 형질을 보존시키면서 지속되는 결혼의 사례를 보지 못했다.

결혼은 그들과는 다른 계급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고

남미의 오지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처음 보는 거대한 파충류에게 물려 신체의 일부를 잃고 돌아오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민에게는 평생 가족의 사랑이라는 도그마로 그를 질식시켜 온 부모가 있었고 그는 그들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길을 떠나기 위해 오랫동안 단계를 밟아왔다.

조그만 원룸으로 독립을 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시험을 준비했다.

중학교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에 둥지를 튼 다음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진짜 꿈을 이룰 생각이었다.

교사는 다소 보수적이고 지루해 보이는 목표였으나 부모에 대한 복수라는 관점에서 나쁘지 않은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그 자신은 가질 일이 없을 아이들이 이 갑갑한 세상에서 제대로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한 것들 - 하사관이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이등병에게 베푸는 은혜나, 낫을 든 농부가 잘 자라지 못하는 농작물을 보며 중얼거리는 욕 속에 담긴 애정과는 종류가 다른 것들을 자신보다 조금 어린 이 세상의 동료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는 차근차근 교직과정을 이수했고 졸업 후 임용고시에 계속 떨어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경쟁 과잉인 사회의 잘못이지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는 혼자였고 자유로웠으므로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다.





희은은 자신의 어머니가 왜 주민등록등본에 '동거인'으로 표기되어 있는지 알게 된 뒤로 가족이라는 개념에 양가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희은이 중학생일 때 가족을 떠나 오랜 시민단체 활동 끝에 모 진보 진영 연구소의 이사장이 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제대로 양육비를 보내지도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약속을 깨뜨리고 책임을 방기하는데도 세상의 추앙을 받는 아버지와 누군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선 여성의 이름 밑에 딸려 있는 자신의 이름을 보며

그런 자신을 혼자 키워낸 어머니에게 주어진 '동거인'이라는 호칭의 싸늘함에 충격을 받았다.

희은에게 결혼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을 승인해줌으로써 복잡한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제도이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입어본 적 없는, 입어보았더라면 최소한 '모'라는 호칭은 선물해주었을 웨딩드레스이기도 했다.

희은은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제대로 된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제대로 된 부모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자라났고 희은의 무의식 속에 안전하게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은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직장을 몇 군데 거쳤고 번역 일을 시작하면서 프리랜서가 되었다.

사회의 위계관계를 경험할 일이 드물어졌고 문화예술 관계자들과 규류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생활을 삶의 최상의 가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혼,제도,가족,부모.

이 네 단어를 한 덩어리로 생각했고 자신이 그 단어들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느꼈으나

결혼과 제도에서 느껴지는 의문의 여지없는 실망과는 달리

가족과 부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양가감정이 남아 있었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부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모종의 환상으로 자라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민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멀어지고자 했던 부모와 다시 가까워져야 하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손을 벌려야 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타협의 양을 가늠해보았다.

부모됨이라는 고난의 본질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짐작은 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자신 앞에서 근심과 두려움으로 눈물흘리고 있는 희은의 동반자가 될 기회와

희은의 몸 속에서 심장박동을 보내고 있을 어린 생명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지 생각해보았다.

보수적인 정민의 부모는 어른들에게 싹싹하게 대할 줄 모르는 희은을 탐탁지 않아할 게 뻔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자원이 필요했다.

그들은 빈손이었고 제도에 속하지 않으면 그 자원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는 육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자신이 기대한 만큼의 지원을 해줄 방법이 부모에게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정민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개종에 가까운 변화가 이런 사실들을 크로스체크해야 한다는 기초상식을 그의 뇌에서 지워버렸다.

얼굴을 모르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젊은 자신, 자유로운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고 단 몇 시간 만에 그 일을 혼자 묵묵히 치러냈다.

그는 그 제의의 결과가 무엇으로 돌아올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 역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희은은 정민의 내면을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다.

희은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임을 알았고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눈물을 흘렸다.

결혼이 너무도 싫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은, 지난 몇 번의 연애에서 일어난 원치 않는 임신들과는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초음파를 본 뒤에 의사에게 다른 대답을 하고 싶었다.

너무나 비이성적이지만 그랬다.

정민이 책임을 질 수 있는 남자라는 믿음이 드는 순간 희은의 무의식에서 대기하고 있던 낯선 욕망이 풀려나며 온몸을 장악했다.

희은은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끝마다 멍청이, 바보, 모자란 녀석이라는 말을 던져대던 그보다는 자신이 나은 사람, 더 존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갈구하고 있었다.

습관적인 폭언으로 유년기에 무너진 자존감은 사회적으로 많은 성취를 했음에도 희은에게 그런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책임을 지는 부모'라는, 너무나 확실해 보이는 선택지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낳아라.

낳아서 네가 받지 못한 사랑을 듬뿍 주며 키워라.

너의 부모와는 다른 사람이 돼라.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았고 이루기도 지극히 어려우며 여성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몹시 위험한 목표였으나 누구도 희은에게 그 점을 일깨워주지 않았다.

희은 자신도 자기 안에 그런 명령이 들어 있는 줄 몰랐으니 당연했다.





결혼이 남미의 오지로 떠나는 위험한 여행이라면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일은 우주선에 탑승해 미지의 행성으로 떠나는 일과 같다.

앞서 간 여행자들의 데이터는 제대로 전송되어 오는 법이 없으며 우주선 안에서는 지구와는 다르게 시간이 흐른다.

지구에 남겨두고 가는 것은 살아서 다시 보기 힘들 수 있으니 필요한 견본들은 모두 꼼꼼히 챙겨야 한다.

우주선 자체도 정밀 검사를 거쳐야 하며 아주 간단한 소지품 하나, 그것의 무게 0.000001그램까지 정확히 측량해야 냉혹한 우주 공간에서 참사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희은과 정민은 스케치북에 연필로 서툴게 우주선 비슷한 모양을 그려넣고 거기에 올랐다.








초록은 어떤 아이였는가 하면

이 모든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정민과 희은 둘 다애개 축복이었다.

이혼하기 전에도 후에도 그들은 초록을 사랑했다.

처음처럼 사랑했고 영원토록 사랑할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든 초록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어떻게 해도 초록에게 전할 수 없을 것 같아 각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여러 번 오랫동안 울었다.

그들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없었으나 건강하고 그늘 없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행복했다.











2019년 이상문학상, 윤이형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에서 일부 요약발췌하였습니다. 결혼과 육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마치 얼마전 AMA에서 거론되었던 주제와 통하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어서... ㅋ

첫 번째 고양이를 키우고, 두 번째 고양이를 키우고, 첫 번째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두 번째 고양이를 떠나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열정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사랑을 했었고 아이를 가졌고 그 열정과 꿈과 사랑이 위태로워 지는 과정 안에 고양이와의 만남도 있고 이별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별을 받아들이는 희은의 방식, 정민의 방식, 아이 초록의 방식을 보여줘요.

전철 안에서 읽었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문앞에 얼굴을 처박다시피 하며 읽었네요. 의정부에서 서울 나갈때 한쪽 문이 안열리는 구간이 몇정거장 있거든요. 그 문 앞에 착 붙어서..  그동안 너무 책을 안읽기도 했는데..  그걸 감안해도 꽤 오랜만에 죽음과 상실에 대해 숨막히게 묘사하는 소설을 읽은거 같네요.


친구가 고양이를 키우자는 친구의 여친과 크게 싸웠었어요. 몇년 전에 기르던 강아지 <꼬맹이>를 잃고 다시는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겠다고 결심한 친구는 기어코 고양이를 들이겠다고 고집부리는 여친에게 참다못해 " 너 꼬맹이 죽은거 안슬퍼서 이러는거지!" 라고 해서는 안될 말을 했고 여친도 악에 받쳐 "슬퍼! 그래도 키울거야!그때랑 똑같이 슬픈 일이 생겨도 그래도 키울거야! 꼬맹이한테 해줬던 것처럼 똑같이 고양이한테도 해줄거야..." 라면서 울음을 터뜨렸고 결국 친구가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한 1년 됐어요. 지금은 뭐... 고양이 없으면 죽고 못삽니다 ㅋㅋㅋ



어떤 책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진도는 안나가고 하릴없이 날짜만 지나가는 그런 책이 있는 반면, 어떤 책은 피곤해 죽겠는데 내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손에서 안떨어지고 계속 한장한장 읽어나가게 되는, 마지막 장을 덮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그런 책이 있죠. 오늘 이 책이 저를 참 괴롭혔네요. 하 이제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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