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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2/17 14:59:43수정됨 |
Name | 메아리 |
Subject | 서평 『새의 선물』 – 은희경 |
『새의 선물』은 은희경 작가에게 ‘문학동네’ 작가상의 영예를 가져다 준 작품이다. 에필로그를 보고 든 생각은 ‘아, 이 정도는 해야 작가상을 받는구나’ 였다. 그녀의 문체는 정말 탐난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공지영의 글이 정열적이고 원초적이고 활기 넘친다면, 그녀의 글은 차분하고 정제되어 있으며 치밀하다. 그녀의 글에선 조밀하게 구워낸 따뜻하고 향긋한 카스테라를 두 손으로 쪼갤 때의 그 감촉이 느껴진다. 이 이야기는 6,70년대의 지방 소읍을 배경으로 하는 두 여성의 성장 소설이다. 한 명은 화자인 6학년생 진희이고 다른 하나는 진희의 이모인 영옥이다. 조숙한 아이로 나오는 주인공은 이미 어른처럼, 아니 어른보다도 더 자신에 대한 성찰과 통제를 잘 할 수 있는 아이다. 그에 반해 이모 영옥은 스무 살이지만 진희보다도 철딱서니 없는 여자이다.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 집에는 세 들어 사는 몇몇 가족들이 있다. 그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주요한 이야기 줄기이다. 그 사건들 속에서 두 여성은 성장해 간다. ‘…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13)’ 진희가 자신의 마지막 성장의 기록으로서 남긴 것이 바로 이 『새의 선물』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진희는 자신을 처다 보는 눈빛들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일찌감치 깨달아 버렸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녀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자신의 사고로 통제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 이모는 오직 감정과 상황에 의해 즉각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 버리는 미숙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진희가 이모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부러움이 담겨 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져버린 그 능력을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지만 한편으로는 저주한다. 그리고 이모의 순진하고 발랄한 의사결정 과정을 부러워한다. 아마도 자기도 이모처럼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 누구의 삶에서든 기쁨과 슬픔은 거의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 일이 있다는 것은 이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 행복한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을 악의로운 삶에게 들키면 안 된다(346). 무작정 행복해져서 안 되는 아이. 진희는 자신의 삶에 행복이 찾아오더라도 그 이면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진희의 이런 아픔은 소설 속 곳곳에 녹아 있다. 열두 살짜리에겐 너무 크고 버거운 생각들. 작가는 이것을 삶의 아이러니로 나타내고 있다. 커야 하는 아이는 이미 커버렸고 커버린 이모는 아직 철없다. 이 서로 길항하는 모습의 대비를 통해, 이 서로를 향한 부러움을 통해 작가는 삶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지 말한다. 무릇 갖고자 하는 이는 그것을 쉬 가지지 못하는 법이니.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무작정 바라던 얘가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판별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된 상태. 한계와 가능성을 구별하고 각각에 딱지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희는 열두 살 이후 자신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선언했지만, 우린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는 걸까? 아니,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성장이 끝나는 날은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그 날이리라. 제목 ‘새의 선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에 던져진 자신이다. 내가 어쩌지 못한 내 탄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저주가 아닌 선물이다. 자신의 의지가 관여된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것이 선물일 수 있는 것은 많은 경우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만’ 자신이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냉소를 통해 삶의 부정성을 말하는데 반해, 은희경은 그녀의 냉소를 통해 삶의 긍정을 말한다. 그 긍정은 삶을 너무 무겁게 취급하지 말라는 긍정이다. 너무 무겁게 바라보면 그 때문에 받는 상처도 깊어 질테니. -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405). 나는 은희경 작가를 잘 모른다. 이 책 이전에 그녀의 글을 한 번도 읽은 적 없고 기사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무렵 나는 문학, 특히 소설을 혐오했나 보다. 알아 들어먹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소설이라 써내는 본격 문학의 작가들을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서로 잘난 척하는 쟁이들이라 폄하했었나 보다. 참 어리고 순박한 생각이었다. 이제야 소설을 읽기 좋은 나이가 된 건지 읽는 소설들마다 가슴에 박혀 감동을 준다. 물론 좋은 글이라 추천받은 것들이라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필요한 것 중에 하나를 이 나이에야 얻은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아직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여러 작품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 책들을 써 준 작가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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