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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4/10 15:40:05수정됨
Name   化神
Subject   유폐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의 생각이 어떤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살면서 눈빛을 숨기는 사람은 거의 만나본 적 없다. 자신의 눈빛을 통제한다는건 어려운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면을 가장 잘 드러낸다. 3초만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에게 빠져들게 된다는 건 아마도 그래서 가능한 것 같다.

할머니는 말을 많이하는 편이 아니셨고 항상 조용히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살면서 할머니가 역정을 내는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항상 온화하고 조용한 분이었다. 나한테 가타부타 말씀도 없이 그냥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놓은 지폐 뭉치들을 한 번씩 들이밀거나, 말린 감 따위를 깎아다 먹으라고 하는 것이 할머니가 보여주는 마음이었다. 소리내어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예전같지 않다는것을 느낀건 2년 전 여름이었다. 이따금씩 가만히 앉아서 바깥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할머니에게 일상적인 일었지만 그 날은 무엇인가 이상했다. 아무것도 깔지 않은채 마당에 앉아서 바라보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게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할머니를 일으켜세우려고 했는데 할머니는 따라주지 않았다. 나를 보면서 웃기만 했는데 그게 이상하지만서도 표정과 눈빛은 평소에 나를 바라보던 그 모습이라, 나 혼자서 그냥 할머니가 생각하신게 있겠지. 하고 넘어갔다.

그 해 가을 사촌 누나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할머니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느꼈던 그런 이상함을 사촌 누나도 느꼈다. 기력이 떨어진것 같다고. 그렇지만 할머니의 연세도 어느새 아흔을 넘긴지 4년이 지났고, 누구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한 번쯤은 생각하고 있을 그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둘은 할머니를 걱정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18년 3월 9일. 오후에 갑자기 전화를 받았다. 평소에 전화를 잘 안하는 부자지간이다보니 전화번호가 찍히면 무슨 일이 났는가보다 지레 겁먹게 된다. 그런 걱정은 대부분 맞더라.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이었다. 점심 시간이 지난지 한참이었지만 오후 반차를 내고 바로 버스를 잡아탔다.

인구 3만 명 될까말까한 강원도의 소도시 의료원에 할머니는 누워있었다. 이런 시골에 고령 환자는 보통 결말이 정해져있다고, 그래서 의사도 크게 노력하지 않는것 같다고 어른들이 불평했다. 나는 의사를 직접 만나본 적 없어서 무어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어른들이 불평하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걱정만 하게 될테니까. 콧줄을 끼우면 회복이 느린데 의사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콧줄을 끼웠다고, 간병인 하시는 큰고모가 안달복달했다. 6남매 중 첫째인 큰 아버지는 의료진들에게 무어라무어라 계속 말씀하시는데, 이게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노인의 다그침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중환자실의 침대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었고, 심전도가 약하게나마 목숨이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낼 뿐이었다. 일가 친척들이 번갈아가며 할머니를 만나고 손을 잡아주었지만 할머니는 미동조차 없었고 대부분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할머니가 치매 증상을 보인지 근 1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병원 진료가 늦었다고 했다. 검진을 받아보니 이미 많이 진행되어서 뇌 기능의 1/3 정도가 손실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로 생활하시다가 갑자기 퓨즈가 끊어진 전구마냥 할머니는 빛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평소에는 불효자인 아버지는 항상 감이 좋다. 뭔가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일이 생긴다. 할머니가 쓰러지시기 전 날, 청주에서 일을 마친 아버지는 방향을 틀어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돼지고기 조금에 술을 사들고.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 일어났는데 할머니가 계속 주무시길래, 피곤하신가보다 하고 인사도 안 하고 그대로 나왔다고 했다.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할머니가 의식을 못 차리셔서 지금 이송중이라고. 아버지는 그 전화를 받고 나에게 전화를 하셨던 것이다.

얼마 버티시지 못 할거라던 예상과는 달리 한 달 정도 지나게 되니 할머니가 기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예전의 할머니르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의사 말로는 뇌기능이 1/10 정도만이 남아있다고 했다. 신체 기능도 대부분이 마비가 되어 건강을 회복하시긴 어려울 것이라 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계시는걸 바라보는게 병문안이었다. 할머니의 상태는 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다. 눈은 있는데 눈빛은 죽어있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거기에 할머니는 없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눈빛이 돌아올 때가 있었는데 그 때는 할머니가 눈을 돌려가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기색이 달라지면 사람들이 앞다퉈 자기를 알아보시겠냐고 물었는데 그 때면 할머니는 웃으면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아직은 남아있는 손아귀 힘으로 사람들을 붙잡아보고 싶어하셨다.

하지만 계속해서 병원에 모셔둘 수는 없었다. 몇몇 분들은 요양병원에 모시자고 했는데 큰아버지는 본인께서 모시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 뜻을 꺾을수는 없었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서 직접 수발을 드셨다. 두 분은 이미 70 노인이라, 어디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도 남을 나이셨고 두분의 육신또한 힘겨운 상황이지만 할머니를 모셨다. 하지만 방에 누워 대소변도 잘 못 가리는 할머니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고모들, 아버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께서 감당하시겠다는 큰 아버지 사이에서 무엇이 효도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설왕설래했으나 할머니는 방에 누워계셨다.

매주 찾아뵐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시간내 찾아뵈면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 했다. 그 때마다 할머니의 눈은 내가 아닌 다른 어떤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병문안은 그런 할머니의 상태를 관찰하고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대화를 조금 나누고 하는 것이었다.

방문을 닫으면 순간 할머니를 잊게 된다. 그렇게 잊은채로 거실에 앉아서 저녁을 먹고 난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방문을 열었다. 꺼진 불을 켜고 할머니의 상태를 관찰하는데 그 때 할머니는 그 자리에 있었다. 할머니의 눈빛은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온 할머니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보시겠냐고 묻는 그 순간에 나는 불꺼진 방에 유폐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할머니의 처지가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할머니의 의식은 목적지를 잃고 헤메헤메다가 어느 순간 본래의 자리를 찾았는데 그러자 알게 되는건 이내 움직이지 않는 육신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될 할머니의 감정이 너무 서글펐다. 정신 차려보니 불 꺼진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독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그 처지가 무서웠다. 할머니 앞에서는 웃었지만 돌아 나오면서 죄송스러웠다.

할머니는 그렇게 오래 버티실 것 같았다. 식사도 잘 하시고 기운도 아직 남아있어서 모두 오랜 싸움이 될 것 같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해 6월을 넘기지 못 하고 할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진 못 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묘를 쓰고 봉분제까지 치르고 나니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다른 사람이 다 울 때도 울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울고나니 그제서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보내드렸다.

할머니는 이제 작은 산소에 갇혔지만 그 어느때보다 자유로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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