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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7/21 11:43:00
Name   하마소
Subject  
담에 걸렸다. 너무 아파서 고개를 움직이기가 힘이 든다.

아침에 일어날 땐 괜찮았는데 갑자기 어쩐 일일까. 당장 샤워를 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등 전체에 문지르던 샤워볼을 닿게 만드는 것도 꽤 고난이었으니까. 잊을 만할 때 즈음 등장하는 통증이지만 이번엔 꽤 심각했기에, 오늘의 일정을 꼽아보며 쉴 생각을 해보다 이내 접었다. 꽤 바쁜 요즘이다. 이미 개인사로 인해 많은 연차를 사용한 터라,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섣불리 쉰다는 선택지를 택하기 어렵다.

카풀을 하지만, 합류지점까진 지하철을 타야한다. 오늘따라 지하철의 진동이 척추를 타고 목을 자극하는 느낌이 심상치 않다. 평소라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법한 하찮은 자극이 이렇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걸 몰랐던 나의 무심함에 놀라게 된다. 사실 그 무심함을 놀라할 필요는 통상 없겠지만. 어쨌든 출근을 하고 오늘의 일을 한다. 거북목을 방지하려 위로 띄워둔 모니터를 올려다보는 게 오늘따라 거슬린다. 고개가 이렇게나 무겁다는 걸 깨닫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시선을 위로 두는 것마저 어려운 일인 건 실로 생경한 일이다. 정신을 차리려 커피잔을 들었는데, 이걸 마시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새 터져나오는 신음을 누르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 나는 오늘 얼마만큼의 일을 한 걸까.

처가에 있던 사모님을 만나 함께 퇴근을 했다. 보통은 운전을 했을텐데 마침 동선이 엉켜 마을버스를 택해야 했다. 정시배차에 손익을 걸어야 한다던가. 언젠가의 투덜대던 마을버스 기사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래서일까, 타고 내리는 순간을 기다려줄 기색을 그다지 보여주지 않는다. 평소라면 사모님을 신경썼겠지만, 그러기엔 시선을 돌리고 손을 뻗는 모든 게 어려운 오늘. 바퀴의 진동부터 내리는 순간의 급정거까지의 모든 게 나를 신음하게 만드는 요인이란 우려는 당연하게도 현실이었다. 겨우 하루를 마무리하며, 평소로부터 어긋나버린 불편한 상황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지를 사모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내 생각이 많이 났겠네."
"응, 정말로."


사모님은 현재 12주차 임산부이다. 문헌과 주변의 경험담을 쌓아서 비교하다보면 느끼는 건, 사모님은 현재 그 중에서도 꽤 심한 입덧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 그나마 내가 마련해둔 몇몇 음식이 말을 듣는 듯 하지만, 그 외에는 그리 효과적인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구토를 줄이는 방법을 아마 나도 수 십 번은 찾아봤지만, 나의 몇십 배는 더 검색해 보았으리라. 그런다 한 들, 그 자신이 검색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언제 도래할 지 모를 - 실은 매일 밤이 되면에 가깝지만 - 구토감의 습격은 온전히 스스로 감당하게 될 몫이니까. 무엇보다도 아무렇지 않게 행해왔던 당연한 것들이 두려운 것으로 변해가는 경험은 사모님께 있어 지난 몇 주간 쌓여온 가장 큰 공포였다.

한식의 든든함과 포만감을 좋아했지만, 이제 고춧가루와 마늘내음은 맡는 순간 구토감을 바로 자극하는 촉진제일 뿐. 그나마도 이따금의 참기 힘든 공복감은 소중한 한 끼를 기다릴 틈도 주지 않는 마치 날선 손님의 견디기 어려운 재촉과도 같아 무작정 아무거나 입으로 집어넣을 수 밖에 없으니, 언제나 기다렸던 식사시간은 이제 뭘 떠올려도 설레지 않는 무미건조한 시간일 뿐이다. 사실 가장 괴로운 건 따로 있었다. 앞으로 몇 년은 살기 위해 얼마 전 이사한 집이 사모님께 있어 가장 편치 않은 공간이 되었다는 게. 노포 따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낡은 아파트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벽이나 하수구 따위로 짙게 밴 냄새들. 계약하고 이사올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그 냄새가 지금은 구토 유발자 그 자체가 되었다. 함께 가는 길에서 조차도, 집으로 가는 이 걸음이 너무 두렵다는 말을 듣는 건 억눌러야 할 괴로운 일이다. 하물며, 말을 건네는 이의 심정은 비록 순간이겠지만 얼마나 참담할까.

오늘은 용케 구토를 두번 밖에 하지 않고 자리에 누운 사모님. 그런 와중에 내 결리는 목을 걱정하는 모습에 감사한 마음으로 괜찮다고 말했어야 할텐데, 눈치마저 억누르는 아픈 몸 때문에 이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하는 내가 옆에 누워있다. 평소에서 벗어난 불편한 상황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지 이야기하니 사모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생각이 많이 났겠네."
그리고는 앞선 공포의 대상이던, 생경함이 되어버린 익숙하던 것들을 괴롭게 이야기하는 사모님을 향해 나는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어떻게든 끄덕여가며 위로를 건넨다. 다만 길게 이야기할 여유같은 건 없다. 어떻게든 빨리 잠을 청해야만 입덧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현재는, 우리에게 잠들기 전의 담소마저도 앗아가버린 지 제법 되었으니까.
"응. 정말로."


당연한 일들이 일시에 어그러진 하루 속에서, 나는 우선 사모님을 떠올렸다. 평범하던, 그래서 평온하던 일상이 나 자신 이외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색함과 서투름, 그래서 때로는 위협으로 뒤덮일 수 있다는 걸 체험시키기엔 이만큼 가깝고도 치명적인 조우도 없으니까. 모니터를 올려다보기 어려웠던 나의 업무시간에서 내내 구역질을 억누르던 사모님의 지난 몇 주간의 회사생활을 읽어내고. 고개를 젖혀 양칫물을 헹구기 어려웠던 내 세면시간은 집과 마주하며 오늘은 괜찮기를 기원하던 사모님의 귀가길을 떠올리게 한다. 고작 담일 뿐이지만, 담은 마치 일상을 사이에 두고 놓여진 담, 담벼락과도 같았다. 물론 내 경험은 하찮디 하찮다. 늦어도 이번 주말이 되면 난 언제 그랬냐는 듯 비슷하던 평소와 조우할테고, 그러한 일상이 돌아올 시점을 예측하기에 사모님의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를 기약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하니까, 괴로움 속에서도 감사를 잊지 않을 수 있다.

기약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평소라는 건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비가역에 가까운 변화를 경험한 이들이 돌아오기 어려울 평소를 기억에서 떨쳐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 되겠지. 혹은 여러 방도를 통해 묘사되는 다수의 평소와 유리된 경험을 오랫동안 해온 이들에게도, 그러한 묘사를 통해 주입된 평소는 떨쳐내기 어려운 각인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에게도 일상을 누릴 권리는 언제나 중요하단 곧은 심지의 언어는 많은 지점에서 유효하지만, 그게 의미를 잃고 부유하는 순간 역시나 많은 지점에서 유효한 것 역시 현실이니까.

일상을 잃어버린다는 건 당연히 큰 공포가 된다. 당장 저조한 컨디션에 도달하지 못한 업무 상의 목표치가 나를 압박하고, 미리 계산해온 평소의 움직임이 뒤틀리는 순간 잃어버릴 지 모를 많은 것들을 떠올리면 아찔해질 뿐이니까. 짧게는 이번 주의 스케줄부터 앞으로의 삶의 목표 전반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소의 나와 우리를 바탕으로 상정된 계획일테니. 어쩌면 우리는 꽤 안간힘을 써가며 평소라는 녀석을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안간힘의 끝에서, 많은 것들이 떨어져나가는 거겠지. 그리고 보통 떨어져 나가는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거나, 우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무언가들.

바쁜 출근길의 중간에, 멀리서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고 느리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노인 분을 본 적이 있다. 바쁘지만, 온 몸으로 전달된 그분의 조급함은 내게 열림버튼을 오래도록 누르고 있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불과 하루 전의 나는 윗 층에 오랜 시간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숱한 욕을 마음 속으로 퍼부었던, 여유따위는 어딘가에 꼭꼭 숨겨둔 괴팍한 아저씨에 불과했는데. 짧은 시간 만에도 사람은 이토록 이중적이다. 인식되지 않는 존재에겐 이토록 가혹해진다. 그리고 때로는, 눈에 보여도 인식되지 않는 존재와의 상호를 경험하고, 이에 대한 가혹함과 마주하곤 한다. 이를 떠올리는 순간, 조금 나은 것 같다 느꼈던 목과 등의 통증이 다시금 아릿해진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07-3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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