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2/16 20:40:59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매운맛지옥
예전에 일본 대학으로 연수를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쪽 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제가 "전 한국인이지만 매운거 하나도 못먹어요." 라고 하자 상대방이 엄청 놀라는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면 그렇지 한국에도 매운거 못먹는 사람 절대로 있을거라고 생각했다."고 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은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또 한국인 스스로가 그런 이미지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도 있습니다. 단순한 이미지 포장이라고 할 수만도 없는 것이, 아무튼 한국에는 매운 음식이 많고, 누가누가 더 매운 음식을 잘 먹는가를 놓고 경쟁적인 분위기마저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국인의 매운맛 사랑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매운 음식을 못먹는 저로서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너무나도 신경이 쓰이고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운 것이 맞다면, 매운맛은 기본적으로 통각(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서 점막이 얼얼해지는 고통을 즐기는 거라는 건데요, 바꿔서 말하면 그 고통에 민감하거나 예민한 사람에게는 매운 음식을 먹는 일이 고문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매운 음식, 특히 요즘 외식업계에서 잘 쓰는 매운맛 파우더가 들어간 음식(예를 들어 염지제 들어간 치킨)을 먹으면 꼭 배탈이 납니다. 어제도 처갓집 양념통닭을 시켜 먹었다가 지금까지도 계속 배가 아플 정도로 말입니다.

사실 스스로가 매운음식을 못먹는 편은 아닙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매운맛을 찾는 편이었고, 친구들과 매운음식 먹기 시합같은걸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나이가 들고 체질이 변하면서 매운걸 먹는 것 자체는 잘 하지만, 먹고 나면 꼭 배탈이 나게 되었고, 점점 매운음식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면서 새삼 느끼게 된 것이, 우리나라에는 맵지 않은 음식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 반대로 대부분의 음식이 다 일정 수준 이상은 맵고, 안매운 음식을 찾는 편이 훨씬 어렵습니다. 특히 한식의 경우 거의 다 맵다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거기다가 원래는 맵지 않아야 할 음식에마저 매운 향신료를 사용하다보니, 안심하고 먹은 뒤에 나중에 배탈이 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가령 완전히 양식 메뉴여서 안심하고 시켰는데, 한입 먹어보니 알싸한 맛이 나서 "아 당했구나.." 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죠. 제가 겪어본 가장 충격적인 케이스는 중국집에 볶음밥을 시켰는데 무려 고추기름을 써서 매운 볶음밥을 만들어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매운음식 먹는 문화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멕시코 요리나 중국 사천요리처럼 한국의 매운 음식도 그 나름의 고유의 식문화로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 즐기지 못하는 사람, 혹은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선택의 여지마저 없다는 것은 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4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397 기타머리에 꽃 꽂은 그녀 3 nickyo 16/12/16 4884 5
    9659 음악머리를 깎는 날 4 바나나코우 19/09/13 4364 1
    10729 일상/생각머리 아픈 질문. 자유주의자에게 학문이란? 19 sisyphus 20/06/29 6078 0
    14102 일상/생각머레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한테 친절해요? 19 골든햄스 23/08/13 6622 9
    739 영화머니볼 : 스포츠 드라마의 종언(스포일러) 35 구밀복검 15/08/06 8576 0
    8739 방송/연예맹유나 -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1 리니시아 19/01/08 6050 4
    13110 일상/생각맹신과 후원, 폭주하는 유튜버 6 moqq 22/08/26 4931 4
    1004 기타맨체스터에 흐르는 로마제국의 향기?... 7 Neandertal 15/09/16 6584 1
    8390 영화맨 프럼 어스2 : 최악의 영화. 최악의 후속편. 5 임아란 18/10/18 5843 1
    9961 일상/생각맥주 펍이야기 - 논문 안써져서 끄적이기 19 무더니 19/11/08 5204 2
    12023 요리/음식맥주 조금만 더 천천히 마시기 - 2 30 알탈 21/08/28 5595 7
    12022 요리/음식맥주 조금만 더 천천히 마시기 - 1 21 알탈 21/08/28 6272 11
    12024 요리/음식맥주 조금만 더 비싼 거 마셔보기 12 알탈 21/08/28 5851 3
    9229 게임맥으로 게임라이프를 즐기면서 쓰는 잡담 2 Leeka 19/05/24 7242 1
    906 일상/생각맥심코리아 9월 표지사진에 대하여 64 뤼야 15/09/04 8529 0
    4026 IT/컴퓨터맥북 프로 신형이 공개되었습니다. 9 Leeka 16/10/28 4162 0
    2438 IT/컴퓨터맥 사용한지 약 1년이 지난 후기 26 Leeka 16/03/21 8042 1
    1931 음악매춘과 관련된 노래 몇 개... 12 새의선물 16/01/03 6620 0
    11984 기타매직오일의 효용에 관하여 7 태양연어 21/08/15 6850 2
    14012 일상/생각매직 아이를 기억하시나요? 8 큐리스 23/07/02 5759 5
    1308 기타매주 제목 짓기 힘든 장기 묘수풀이 (댓글에 해답있음) 25 위솝 15/10/21 10998 1
    9343 일상/생각매일매일 타인의 공포 - 안면인식장애 25 리오니크 19/06/25 5671 20
    10298 일상/생각매운맛지옥 8 이그나티우스 20/02/16 6524 4
    619 댓글잠금 정치매우 작은 샘플 경험, 김어준 23 눈부심 15/07/20 8761 0
    15723 정치매우 이상한, 어떤 법관 회의들에 대하여 21 매뉴물있뉴 25/09/16 2141 1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