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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9/22 13:46:02 |
Name | Raute |
Subject | 차범근의 동료들 - 프랑크푸르트 |
박지성은 맨유라는 명문클럽에서 뛰었고, 특히나 그 맨유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꼽히는 시기에 뛰었기 때문에 주전-로테이션 할 거 없이 동료선수들도 꽤 인지도가 있고, 여러 별명과 캐릭터가 자리잡았었죠. 우리나라에서 개콜스 소리 듣던 스콜스가 현지 별명인 생강왕자로 소개되는 거 보고 웃던 기억도 나네요. 요새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건데 역시 한국인이 끼어야 카를-하인츠 쾨벨 별명인 찰리 쾨벨이라고도 부릅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만 뛴 원 클럽 맨인데 602경기나 뛰어서 분데스리가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입니다. 클럽 전체 경기 합치면 730경기쯤 나오고요. 다만 리그 정상급 선수는 아니고 꾸~준~히 뛴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키커와 인터뷰를 하면서 차범근-페차이가 팔려나갈 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죠.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11 투표에서 수비수 1위, 전체 3위였습니다. 브루노 페차이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시절을 회고하는 칼럼에 자주 언급되는 선수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전기철조망'이라고 수식하는데 실제로 이런 별명을 썼는지는 모르겠고, 현지에서는 '보덴湖의 베켄바우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습니다. 1978년 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가 47년만의 공식경기에서 독일을 꺾은 '코르도바의 기적'의 일원으로 독일에서 대단한 명성이 있었죠.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4년 연속으로 발롱도르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분데스리가 최고의 리베로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83년에 스페인-이탈리아의 제의를 뿌리치고 '스포츠적인 이유'로 브레멘 행을 결심했는데 거기서 2년 연속 콩을 깠고, 말년에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니까 브레멘이 우승해버려서 빅리그 우승 없이 은퇴했습니다. 은퇴 이후 오스트리아 청소년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했는데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를 즐기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결국 사망했습니다. 선수 시절에도 한 번 쓰러진 적이 있는데 그때 의사가 운동하는 데는 지장 없었다고 했다는 얘기가...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11 선정되었을 때도 본인이 아니라 부인이 대신 참석했어요. 위르겐 그라보스키 프랑크푸르트 역대 최고의 레전드이자 분데스리가 역사에서 손꼽히는 라이트윙 중 한 명입니다. 66-70-74 3번의 월드컵과 유로72에 참가했습니다. 66년에는 벤치, 70년에는 후반 교체멤버였지만 4강전 '세기의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출장했고, 이후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72년 잉글랜드 원정에서 승리한 '웸블리 엘프' 중 한명이고, 74년 월드컵에서는 주전으로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죠. 클럽에서도 프랑크푸르트의 컵 2연패를 이끄는 등 팀의 레전드다운 업적을 세웠고요. 다만 차범근보다 9살이나 많은 44년생이기 때문에 1979년에는 이미 노장이었고, 미드필더로 전업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부상 때문에 은퇴해버립니다.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11 투표에서 4표 차이로 횔첸바인을 제치고 전체 1위였습니다. 베른트 횔첸바인 그라보스키와 쌍벽을 이루는 프랑크푸르트의 간판 스타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1974월드컵 결승전에서의 PK인데 이게 다이빙이냐 아니면 정당한 반칙이냐를 두고 '독일에서' 싸웠습니다. 타블로이드 빌트랑 횔첸바인이랑 이 문제로 대판 싸웠다죠. 아무튼 선수 시절에 대단하기는 했어요. 양 측면과 미드필더, 그리고 공격수까지 모두 소화 가능한 선수였고 프랑크푸르트 최다 득점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승부차기로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그 승부차기로 이어지는 90분 동점골을 유로1976 결승전에서 넣기도 했고요. 다만 그라보스키처럼 46년생의 노장이라 차범근과는 2시즌만 뛰었고, 이후 미국으로 가버립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1980/81 포칼 결승전에서 차범근의 투톱 파트너로 뛰었습니다. 베르너 로란트 어디서 들어본 이름에 얼굴인데? 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K리그를 사랑하는 축구팬입니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초대 감독이던 그 베르너 로란트입니다. 실제로 인천 감독으로 부임하려고 국내에 들어왔을 때 차범근의 옛 동료라는 사실로 주목받기도 했었죠. 분데스리가에서 오래 뛴 선수 보고 딱히 대단치 않았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선수로서는 크게 돋보이지 않는 편인데 지도자로서는 에피소드가 좀 있죠. 1860뮌헨을 이끌고 2년 연속 승격에 성공한 적이 있고, 1970년대에 선수로 뛰면서 아마추어 팀을 지도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선수 한 명을 눈여겨보고 구단에 영입을 추천합니다. 이 선수가 나중에 유로 1980 결승전에서 2골을 넣은 호어스트 흐루베쉬고, 그해 발롱도르 6위에 오릅니다. 흐루베쉬가 프로팀에 데뷔할 나이가 24세인데 그 나이가 되도록 아마추어팀에서 핸드볼 병행하던 흐루베쉬가 대단한 건지, 그런 선수를 발굴해낸 로란트가 대단한 건지, 재능도 못 알아보고 썩히던 다른 사람들이 대단한 건지... 노어베르트 나흐트바이 동독에서 건너와 서독에서 뛴 선수입니다. 리베로부터 공격수까지 다 소화가능한 멀티플레이어였으며, 1982년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서 여러 트로피를 들어올렸습니다. 어찌 보면 시대의 피해자인 게 동독 시절 청소년 대표팀에 뛰었는데 이거 때문에 규정에 걸린다고 서독 대표팀으로 뛰지 못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뛸 때는 진짜 여기저기 마구 꽂아넣은 걸로 보이는데, 차범근과 투톱 파트너로 나온 적도 있습니다. UEFA컵 결승 2차전에서 둘이 투톱이었죠. 로날트 보르허스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은 거의 항상 톱으로 나왔고 실제로 윙으로 뛴 선수는 따로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보르허스입니다. 크게 유명한 선수는 아니고 대표팀도 몇년 잠깐 뽑히다가 만 선수이긴 한데... 우리가 차범근의 하이라이트에서 봤던 측면 돌파를 꾸준히 수행하는 선수는 사실 보르허스였습니다. 베른트 니켈 그라보스키, 횔첸바인, 쾨벨 등과 함께 70년대 프랑크푸르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 중 한 명입니다. 차범근이 뛰던 시기의 프랑크푸르트는 트로피는 2개 들어올린 대신 리그에서는 그저 그랬는데(9-5-8-10), 70년대의 프랑크푸르트는 3위도 해보고 꾸준히 상위권에 들던 팀이었죠. 그라보스키, 횔첸바인, 니켈 등 팀 레전드들의 황혼에 페차이-차범근의 가세로 불꽃을 태운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그라보스키-횔첸바인과는 달리 국가대표팀에서 뛴 것도 아니고, 리그 최상급 퍼포먼스를 보여준 적도 없어서 저 둘에 비하면 좀 처지는 편입니다. 베스트11 투표에서도 결국 후배인 알렉산더 슈어에게 밀려서 미드필더 5위에 그쳤고요. 토마스 베어톨트 위닝 클래식 팀에 나오던가요? 1990 월드컵 우승 멤버인 수비수로 원래 프랑크푸르트 출신입니다. 그래서 차범근의 마지막 시즌인 82/83시즌에 데뷔해서 딱 1시즌 같이 뛰었습니다. 몇 년 뒤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하여 이탈리아로 진출했고, 거기서 월드컵 우승도 경험하고 나중에 다시 독일로 복귀하죠. 독일에 쟁쟁한 수비수가 하도 많아서 지금은 딱히 존재감은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유명 스타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습니다. 랄프 팔켄마이어 사진은 흑인 혼혈처럼 나왔는데 하얀 피부의 사진도 있고 흑인이라는 언급은 없으니 아닌 걸로...(주독미군과 독일인 사이에서 태어난 독일 선수들이 몇명 있는데 그런 경우 따로 언급이 있더군요) 원래는 플레이메이커의 자질이 있다고 평가받았지만 측면수비수와 수비형미드필더로 성장했고,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는 못한 케이스라고 합니다. 요새로 치면 존 오비 미켈 같은 그런 느낌? 다만 이쪽은 당초 기대치만큼은 아니더라도 수비형미드필더로도 웬만큼 성공한 편이라...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다가 나중에 레버쿠젠으로 이적해서 거기서도 차범근이랑 같이 뛰는데, 레버쿠젠에서는 망했고 프랑크푸르트 컴백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리그 정상급 수미로 자리잡습니다. 요아힘 뢰프 드디어 나왔습니다. 현재 독일 국가대표 감독. 차범근이 해설하다가 '뢰브가 제 백업이었습니다.'라고 말했었죠 아마? 시즌 초반에는 차범근의 투톱 파트너로 나오다가 벤치로 밀려났고, 나중에는 보르허스나 나흐트바이, 니켈 등 공격자원들 여러명과 교체 투입됩니다. 차범근하고 교체되는 일은 없던 걸로 아는데, 그게 차범근이 후반전에 교체당하는 걸 싫어해서 부상 아니면 풀타임 보장해줬었다고 합니다. 81/82 딱 1시즌 뛰고 친정팀인 2부리그 프라이부르크로 이적해 2부리거로 뛰다가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한 마디로 선수로는 그저 그런 셈. 90년대 중반 슈투트가르트를 이끌고 에우베르-발라코프-보비치의 매직 트리오를 결성해서 슈투트가르트를 컵 우승, 위너스컵 준우승으로 이끌었지만, 회장과의 문제로 팀에서 쫓겨난 뒤 몇 번의 침체기를 겪다가 독일의 수석코치가 되었죠. 그 뒤는 다들 아시다시피... 레버쿠젠 동료들은 다음 글에서 따로 설명하는 걸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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