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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2/25 21:00:55수정됨
Name   fafa
File #1   KakaoTalk_20260225_205909819.jpg (306.4 KB), Download : 13
Subject   회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의식이 번져 선명해지면서, O는 마지못해 눈을 떴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아직 7시 20분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했으나, 의식은 이제 뚜렷해지고 끝내 의식이 희미해질 수 없음을 직감하고 엉거주춤 일어나 앉았다. 새벽부터 비와 눈이 온다고 했는데 그 까닭인지, 겨울아침이라 아직 해가 안 뜬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웬지 이 어둠이 평생 이어진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 끝에 O는 오늘의 스케줄을 점검해 보았다. 무릎에 대한 경과를 보기 위해 병원에 들려야 하고, 서울 서쪽 끝에 입원한 R의 병문안을 갔다온 후에, 다시 서울 동쪽 끝에서 모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9시 15분까지 병원에 가야 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함을 인지하고 몸을 일으켜 불을 켰다. 병문안을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에 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되겠으나 도의적으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아니었기에 일어나 외출준비를 시작하였다. 몸을 씻고, 죽을 데워먹고, 선크림을 바르고 얼마 전에 산 향수까지 어설프게 집어 손목에 흘리고 나니 벌써 9시가 다가오고 있어,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럼 약이라도 챙겨드릴까요?" 진료에서 1개월간 무릎이 불편했는지 물어본 의사가 더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에 O가 진료가 끝난 것인지 물어보니 의사가 한 말이었다. O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병원을 나섰다. 이제 서울 서쪽 끝으로 가야 한다. 이틀 전에 수술한 R이 정상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상태는 아닌 것 같긴 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병문안을 가야한다고 O는 생각했다. 가장 의외의 순간에 호의를 받을 때 사람은 기분이 좋아진다고 여기기도 했고, 오늘 가는 것이 가장 시간누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 간다는 선택지도 고려는 했으나, 그의 체질상 정말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그것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하철로 내려가는 깊은 계단을 내려가니 한걸음 한걸음에 왼쪽 무릎이 욱씬거렸다. 챙겨주신다는 건 받는 게 나았으려나.



“오지 믈르는데 왜 오졌오.” O는 그냥 왔다고 답하며 1층이라 말하였고, R의 “그기서 기다르요.”라는 말을 듣고 내려놓았던 가방을 메고 잠시 병원을 구경하였다. 병원치고는 차가운 느낌이 안 드는 까닭은 로비여서 그런 것인지, 병동에 들어서면 병원 특유의 알 수 없는 음울함이 고개를 들이밀게 될지 의문이 생길 즈음, 시야 한 구석에 어떤 형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인지한 O는 초점을 그 형체에 맞추었다. 수액대를 끌고 온 그의 왼쪽 볼은 부풀어 있었다. 턱이 크게 부러진 그는 이틀 전에 턱을 맞추는 대수술을 받았고, 그런 처지이고 보면 그 정도 부풀어 있는 게 약과로 보이고, 오히려 뭉게진 발음이나마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신기한 노릇이라 할 수 있었다. 수액대에는 단백질 음료와 플레인 요거트가 얹혀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구르트에 중독된 사람도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도 있었다. 서울 요구르트가 아닌, 플레인 요거트라고 강조하고 다니는. 튀르키예 사람이었을까.



병원의 외진 곳에 위치한 좌석에 앉아 O와 R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R은 체육관에서 코치에게 부상을 당했는데 그 코치가 체육관 보험을 안 들어놓았기 때문에 변호사를 수임할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너무 큰 돈이 빠져나가게 되었고, 입원일이 길어질수록 돈이 빠져간다는 것에 스트레스가 크다는 이야기를, 카톡으로 네 번째 하고 지금 한 번 더 하였다. 그리고 O 역시 네 번째 듣고 한번 더 들은 후에, 잘 될거라는 공허하지만 실팍하기 그지없는 위안을 다섯 번째 되풀이하였다. 서울 동쪽 끝으로는 왜 가느냐는 질문에 모임을 가져야 하고, 그래서 12시에는 가야한다고 말하자 R은 O에게 어떻게 살고 있냐는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O는 정말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얘기했다. 직장에서는 이렇고, 요새 만나는 사람들은 어떻고, 이럭저럭 살고 있는 건 신기한 일이라고 말이다. 어리석은 답변이었는지 R은 “으지 믈라고 했는디 애 오셨쏘.”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면, O의 얘기에 집중할 상황도 아니었을 텐데 굳이 자신의 얘기를 왜 길게 꺼냈을까 머쓱해하던 O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게 얘기를 나눌 상황도 아니었고, 모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행 지하철을 타고 서울 동쪽 끝을 가는데, 시간은 뭉게지고 짓이겨져 맞은편에 앉은 승객도 지금 듣고 있는 법문도 기억이 나지 않는 가운데 O는 무력감을 느꼈다. 어쩌자고 이 서쪽 끝까지 왔는가, 하고 싶지도 않은데 해야 될 일로도 진정으로 느끼지는 않았던 병문안에. R의 냉대에 대한 본인의 낙담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O는 상념에 휘감겼다. 삶의 동기가 부족해서 의무를 끌고 오고, 의무에 기대어 타인의 반응을 통해 일희일비하는가. 이렇게 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번 열차는 당역에서 정차하니 모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상념을 관통한 안내방송을 통해 O는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인지하였다. 회귀(回歸)역, 서울의 동쪽 끝에 자리한 역이었다. 그는 오늘 모임이 어떤 모임이었는지 상기해보려 했으나, 기억나지 않았다. 이 역에서 내려야한다는 의무감과 이 역에서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위기감 속에서 O는 혼란스러웠다. 살아있고 싶다면 내리지 말아야 한다. 안 내린다면 강제로 내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례한 인간은 될 수 없다. 어차피 강제로 내려지게 된다면, 지금 내리는 것은 어떨까. 그 무슨 민폐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이 어쩐지 함정일 것이라 느꼈다. 운전실에서 나온 직원에게 한소리를 들으며 O는 내렸고, 그것이 참 다행이라고 느꼈다. 모임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시 38분, 약속 시간까지는 22분이 남아 있었다. 모임톡에서는 ‘먼저 와잇씁니디.’라는 작성자의 됨됨이가 칠칠맞아 보이게 만드는 문장과 함께 빵 한덩어리와 커피 한 잔이 놓여있었다. O는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욱신거리는 왼쪽 무릎에 기이한 상쾌함을 느끼며 O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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