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24 22:07:05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98
Subject   초가집과 모찌떡과 랩실
중학생 시절 국어 시간에 잘못된 언어 습관의 예로 초가집, 역전 앞 등의 표현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초가(草家)의 가(家)가 집 가 자이니 초가집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 논리는 이해는 갔지만 무언가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무의식중에 풀리지 않은 찝찝함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 후로 가끔씩 같은 말이 여러 번 반복된 단어들을 발견하면 생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손수건의 수(手)는 손 수 자이니 그러면 손수건과 수건이 같은 건가? 그런데 건(巾)이 수건 건 자이니 그러면 수건과 건도 같고, 결국 손수건은 건인가? 영지(靈芝)버섯의 지(芝)는 버섯 지인데 그러면 영지버섯은 영버섯버섯인가? 국어학자들은 초가집이 잘못된 표현이라고 하는 것 처럼 손수건도 잘못된 표현이라고 하려나? 하고 말입니다.

초가집이 틀린 표현이라고 했던 국어학자들은 단어의 의미만 보고 가(家)와 집을 똑같다고 했습니다. 가(家)는 중국어에서 온 것이고 집은 순우리말이라는 차이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뜻이 같더라도 새마을과 신촌과 뉴타운은 쓰임새가 다른 것인데 국어학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역사학자나 사회학자 혹은 심리학자였다면 초가집과 초가가 같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가 뒤에 쓸데없이 중복되이 맹장처럼 붙어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집이라는 글자는 한국인들이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더라도 고유 문화를 어떻게 해서든 남겨놓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 년 넘게 중국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한국인들은 초가에는 집을 붙이고 역전에는 앞을 붙이고 수건에는 손을 붙이면서 끈덕지게 자기 문화를 남겨 왔습니다. 일제시대에는 모찌를 꿋꿋이 모찌떡이라고 불렀고 영어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에도 갱(gang)을 깡(gang)패, 캔(can)을 깡(can)통이라고 부르면서 순우리말을 어떻게 해서든 남겨 왔습니다.

2010년대 들어서 한국인 대학원생들이 랩을 랩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에는 없던 말입니다. 랩은 연구실이니 랩실이라고 하면 연구실실이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여기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한국 문화의 숨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한국인의 습관을 봅니다. 여기서 실(室)은 한자이긴 하지만 중국어가 아니라 한자 한국어로 쓰인 것입니다. 세계 학문의 사실상 표준 언어가 영어가 되어 버려서 논문도 영어로 쓰고 다른 나라 연구자들과 교류도 영어로 해야 하는 시대이지만 한국의 대학원생들은 꿋꿋이 랩 뒤에 굳이 실을 붙여서 랩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초가집과 모찌떡과 랩실이 있는 한 한국인과 한국 문화는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끈질기게 살아 남을 것입니다.



15
  • 좋은글 감사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86 6
14576 문화/예술내가 바로 마법소녀의 목소리 - 성우로 보는 마법소녀 서포트벡터 24/04/03 385 6
14566 문화/예술1분기 애니메이션 후기 - 아쉽지만 분발했다 12 kaestro 24/03/30 591 2
14504 문화/예술이거 마법소녀 아니었어? 마법소녀가 "아닌" 작품들 10 서포트벡터 24/03/05 859 8
14401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7. 마술사의 옷장에는 10 서포트벡터 24/01/17 821 6
14360 문화/예술커버 댄스 촬영 단계와 제가 커버 댄스를 찍는 이유. 6 메존일각 23/12/25 1091 15
14353 문화/예술굿즈가 기습발매된 29년 지난 만화책 6 서포트벡터 23/12/21 1007 2
14319 문화/예술위플래시 인 콘서트 - 설명서를 잘 읽어야 합니다 3 당근매니아 23/12/08 888 0
14317 문화/예술평소 잘 안 하던 연기가 대표작 취급을 받는 성우들 6 서포트벡터 23/12/08 1358 9
14313 문화/예술15년전에 쓴 '뮤지컬을 좋아하는 세가지 방법' 22 낭만주의 23/12/06 1139 3
14301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번외 "괴도 세인트 테일 걸즈" 리뷰 2 서포트벡터 23/12/01 965 5
14109 문화/예술마법을 쓰면 다 마법소녀? 국내 방영 마법소녀물 하편 15 서포트벡터 23/08/16 1790 10
14095 문화/예술마법을 쓰면 다 마법소녀? 국내 방영 마법소녀물 상편 19 서포트벡터 23/08/07 1960 12
14060 문화/예술우울증이란 무엇인가 - 를 가장 완벽히 보여준 영상 4 코튼캔디 23/07/23 1768 6
14051 문화/예술이 목소리가 여자 성우라고? - "소년 본좌" 성우들 6 서포트벡터 23/07/18 2420 7
13984 문화/예술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반복 대사들 22 서포트벡터 23/06/14 1887 6
13965 문화/예술생각보다 고난이도인 애니메이션 노래들 9 서포트벡터 23/06/08 1528 1
13932 문화/예술[홍보] 6월 2~3일(금/토) 노원맥주축제 즐기러 오세요!!! 25 비어-도슨트 23/05/31 1636 11
13921 문화/예술'이철수를 석방하라' 1 열한시육분 23/05/29 1745 11
13876 문화/예술한국과 일본에서 인지도가 다른 애니메이션들 25 서포트벡터 23/05/18 2098 12
13766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6. "약함"과 "예고장" 4 서포트벡터 23/04/18 2459 7
13753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5. 검열의 시대, KBS의 고뇌 8 서포트벡터 23/04/14 2335 7
13740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4. 동화에서 다시 현실로, 외전2편 6 서포트벡터 23/04/11 1769 6
13735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3.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로맨스 6 서포트벡터 23/04/10 2059 7
13720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2. 샐리의 짝사랑 12 서포트벡터 23/04/05 2014 1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