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5/09/25 14:16:36 |
Name | Raute |
Subject | 울리 슈틸리케 이야기 |
원래는 차범근 선수 시절을 써볼까 했는데 맨날 비슷한 주제만 쓰면 질리잖아요(...) 그래서 누가 적당할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슈틸리케가 레알 레전드라는 것만 알려져 있고 실제로 어떠한 선수였는가는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슈틸리케를 써볼까 합니다. 사실 타이밍으로 봤을 때는 처음 대표팀 감독 선임되고 기자들이 '선수시절 쩝니당 후덜덜' 이런 식으로 마구 기사 써낼 때 썼어야 하겠지만 그때는 홍차넷이 없었으니까요(없었던 거 맞죠?) 제가 리브레위키에 써놨던 걸 토대로 약간의 살을 덧대 씁니다. 슈틸리케는 1954년, 그러니까 차범근보다 1살 적습니다. 다시 말해 나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차범근은 상대해본 적이 없는데 워낙 일찍 데뷔한데다 금방 스페인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죠. 1부리그에서 뛰기 시작한 게 18세의 일인데 원래는 동네의 아마추어 클럽에서 뛰다가 청소년 대표팀에 뽑혀 유명세를 탑니다. 그래서 여러 구단들의 러브콜을 받다가 고른 것이 보루시아 묀헨글랏드바흐로 흔히 MG라고 부르는 팀이죠. 이 무렵에는 우승 경쟁에서 밀려나있긴 했습니다만 70년대 독일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고, 유럽에서도 날아다니던 강팀이죠. 슈틸리케는 1973년 초에 팀에 합류해서 몇 경기 1군의 맛을 보게 됩니다. 덕분에 데뷔하자마자 독일의 FA컵인 포칼을 우승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죠(이 1973년의 결승은 귄터 네처 때문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엄청 유명한 대회이기도 합니다). 1973/74시즌부터 1군 주전급으로 뛰기 시작하는데 당시 19세 생일이 지나기 전이었습니다. 1973년에 MG는 포칼 우승뿐만 아니라 UEFA컵 준우승을 하기도 했는데 그 정도의 강팀에서 10대부터 주전 자리를 꿰찼으니 대단히 빠른 편이죠(당시의 UEFA컵은 지금의 UEFA컵과는 달리 리그 준우승팀들까지 참가해 수준이 높았습니다). 처음에는 플레이메이커가 될 거라는 전망이 있었으나 측면수비수로 데뷔했고, 중앙수비수와 미드필더를 돌아가면서 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정착합니다. 그렇게 성공가도를 밟아나가 1975년에는 A매치에 데뷔하여 '베켄바우어의 후계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분데스리가 3연패, UEFA컵 우승, 유러피언컵(지금의 챔스) 준우승이라는 훌륭한 성과를 일굽니다. 그러다가 이제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건너갑니다. 리그-UEFA컵 더블을 달성한 1975년의 글랏드바흐. 베르티 포크츠, 유프 하인케스, 알란 시몬센, 헤닝 옌센, 라이너 본호프, 헤어베르트 비머, 울리 슈틸리케 등이 포진한 엄청난 강팀이었습니다.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휘한 시즌이기도 하죠. 가운데 오른쪽에서 2번째의 눈매가 매서운 남자가 스물을 갓 넘긴 젊은 슈틸리케입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스페인에는 외국인 금지 조항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스페인 리그는 극심한 침체기를 겪습니다. 결국 당초 기한보다 빠른 1972년에 폐지가 확정되었고, 1973년부터 외국인들을 다시 사올 수 있게 되었죠. 그 대표주자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레알로 이적한 독일의 귄터 네처였습니다(사실 레알은 스페인 선수들을 긁어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용병 금지에 찬성했던 게 함정). 스페인의 강팀들은 경쟁적으로 외국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스카우팅했는데 1977년의 레알은 글랏드바흐의 헤어베르트 비머를 노립니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로1972 우승의 주역이었고, 오랫동안 MG의 허리를 지탱해온 A급 미드필더였죠. 그래서 레알의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비머를 영입하려고 독일행 비행기를 탔는데, 막상 경기하는 걸 지켜보니까 슈틸리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잽싸게 슈틸리케와 계약을 합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는데, 비머는 44년생으로 당시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이할 시점이었습니다. 실제로 MG에서 1년 더 뛴 다음 고향에서 뛰고 싶다고 2부리그로 갔다가 부상으로 바로 은퇴해버립니다. 그에 반해 슈틸리케는 레알에서 9시즌 동안 뛰었고요. 이 영입은 베르나베우 회장의 마지막 성공작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슈틸리케는 성공적으로 스페인에 정착하는데 데뷔 시즌부터 3년 연속 리그에서 우승하여 6년 연속 리그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웁니다. 리그 우승은 더 이상 추가하지 못하지만 2개의 스페인 컵(코파 델 레이)와 1개의 UEFA컵, 1개의 리그컵(코파 데 라 리가)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유러피언컵과 컵위너스컵 준우승도 1회씩 기록했습니다. 또한 1979년에 돈 발론이 수여하는 최우수 외국인 선수로 뽑혔는데, 82년까지 4연패에 성공합니다. 외국인 선수로는 슈틸리케만 달성한 업적이고 누적 수상으로도 역대 1위입니다(스페인 선수까지 포함하면 라울이 4연패 포함 5회 수상). 2010년을 끝으로 잡지의 폐간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아마 계속 최고기록으로 남을 겁니다. 사실 80년대 초반에 타 국가의 언론들에게는 슈틸리케보다는 바르셀로나에서 뛰던 베른트 슈스터가 좀 더 평가가 좋은 편이었는데 이쪽은 발롱도르 2위까지도 올라가봤죠. 재밌는 건 돈 발론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본사가 있었습니다. 19년만에 유럽대회 타이틀을 차지한 1985년의 레알 마드리드. 산티야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마놀로 산치스, 호세 카마초, 첸도, 미첼, 리카르도 가예고, 호르헤 발다노, 그리고 슈틸리케가 있던 꽤 화려한 팀이었습니다. 이 시즌이 끝나고 우고 산체스, 라파엘 고르디요, 안토니오 마세다를 영입하더니 리그 5연패라는 대업을 달성합니다. 국가대표 커리어는 좀 아쉬움이 있는 편인데 유로1976은 스물을 갓 넘겨서 최종명단에서 떨어졌고, 1978월드컵은 스페인에서 뛴다는 이유로 배제되었습니다. 슈틸리케의 팀메이트였던 라이너 본호프 역시 1977년에 스페인으로 가려 했으나 대표팀에서 탈락할까봐 1년 뒤에 발렌시아로 이적했죠. 당시 독일은 해외파는 국가대표 선수로 뽑지 않았는데 대외적으로는 감독이 해외의 선수들을 평가하기 여의치 않다는 이유였지만, 내부적으로 회장의 입김 때문이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흔히 알려져있기로는 대표팀의 헬무트 쇤 감독 때문이라고 하는데 60년대부터 이탈리아에서 뛰던 독일 선수들 뽑아다 월드컵 주전으로 굴린 사람이라 개인적으로는 감독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당시 독일은 유럽 최고의 리그였고, 스페인은 5위권 왔다갔다 하는 리그였으니 수준 논란도 있었을테고요. 아무튼 1978월드컵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유프 데어발 감독이 부임하면서 해외파 선수들을 뽑기로 합니다. 아 여기서 말하는 참담한 실패라는 건 8강에서 떨어진 걸 의미합니다(...) 그런데 슈틸리케가 복귀한 자리는 클럽에서 날아다니던 미드필더가 아니라 리베로였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베켄바우어가 대표팀에서 물러난 이후 그 자리를 도저히 메꾸지 못했거든요. 비록 슈틸리케가 미드필더로 뛰고는 있었지만 베켄바우어의 후계자로 꼽힐만큼 어느 정도 자질이 있었으니 써먹어보자는 거였죠. 완벽한 해답은 되지 못했지만 슈틸리케는 그렇게 독일의 주전 리베로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게 슈틸리케는 클럽에서는 미드필더로 많이 뛰고 레알 후반기에나 리베로로 뛰었지만 미드필더보다는 리베로로 뛰는 걸 선호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유로1980부터 1984까지 3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주전 리베로로 뛰었고 성적표는 유로 1회 우승, 월드컵 1회 준우승. 근데 이게 또 까보면 슈틸리케에게 흡족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유로1980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루메니게는 그렇다쳐도 갓 스물 넘은 풋내기 슈스터가 스포트라이트를 쓸어담았고, 1982월드컵은 독일 역사상 유일하게 승부차기에 실축한 선수(...)로 회자되고 있고, 유로1984는 다른 선수들로 계속 리베로 실험하다가 본선 되니까 갑자기 슈틸리케가 리베로로 뛰고 대회도 폭망했거든요. 베켄바우어 이후 유로1984까지 실험해본 리베로가 15명이라나요. 1982월드컵 4강전에서 실축하고 좌절하는 슈틸리케. 아마 슈틸리케 사진 중 제일 유명할 겁니다(...) 서독의 골키퍼 슈마허는 슈틸리케를 거칠게 일으켜세워 밀어내더니 쿨하게 프랑스 키커 식스의 킥을 막아냅니다. 카메라는 리트바르스키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슈틸리케를 찍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막았는지 영상도 없습니다(...) 이후 슈틸리케는 혼자 쭈그려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었는데, 결국 슈마허가 하나 더 막아내면서 5:4로 서독이 결승 진출. 그렇습니다. 우리 대표팀 영감님이 이렇게 쁘띠합니다(...) 1985년 UEFA컵 우승을 끝으로 레알을 떠나 스위스의 뇌샤텔 크사막스라는 팀으로 갑니다. 여기서 3년간 뛰고 은퇴한 뒤 스위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합니다. 처음으로 부임한 건 스위스 국가대표팀. 여기서 스테판 사퓌자를 발탁하기는 했습니다만 유로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후임자 로이 호지슨이 1994월드컵 진출에 성공하면서 비교당합니다. 안습... 이후 뇌샤텔 크사막스를 비롯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감독을 하지만 다 실패했고, 1998년에 독일 수석코치로 부임합니다. 이게 원래 슈틸리케는 감독일 거라 기대했는데 수석코치라서 실망했다는 썰도 있는데 저도 정확한 사실관계는 모르겠습니다. 팀 선배인 베르티 포크츠가 물러나면서 꽂아준 거라는 얘기도 있는데 정작 국내 인터뷰에서는 1998년이 아니라 청소년 대표팀 감독 얘기를 해버려서 좀 애매합니다. 단 수석코치로는 유로2000 직전에 낙마하는데 이게 노장 마테우스 좀 뽑지 말라고 싸우다가 그랬다나 뭐라나요. 이후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일하는데 역시나 딱히 성과는 못 냈고요, 이 시기가 독일축구 암흑기인지라 유망주들도 대체로 시원찮아서 슈틸리케가 딱히 만져본 유망주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외질이니 괴체니 했는데 다 슈틸리케와는 시기가 안 맞죠. 1998년에 독일 신임 감독 에리히 리벡과 신임 수석코치 울리 슈틸리케의 만남. 리벡은 차범근이 레버쿠젠에서 UEFA컵 우승할 때의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기회를 잡은 게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입니다. 승률이 70%를 넘으며 순항했는데, 대륙대회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앞두고 투병중인 아들 때문에 사표 내버립니다. 결국 아들은 1달 뒤에 고인이 되고, 이후 커리어도 다시 꼬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경질, 경질, 경질, 그것도 중동에서 말이죠. 딱 한 번 카타르 리그에서는 우승해봤다고 하는데 여기 수준이 좀... 그러다가 우리나라로 오는데 말이 좋아 왕년의 레전드지 그때까지 커리어만 쭉 보면 선수시절 명성은 쩌는데 감독으로는 보여준 거 없는 범장1이었거든요. 실제로 와서 딱히 특별한 거 없고 그냥 요새 잘하는 선수 뽑아다가 그냥 무난하게 전술 짜서 자기 능력대로 하라고 세팅해주고 내보내는데, 역시 교과서 예습 복습 꾸준히 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 서울대를 가는 법... 아니 아무튼 뭐 이런 느낌인 거죠. 덕분에 국가대표팀 맡으면서 처음으로 우승도 해보고, 말년을 아주 화려하게 불태우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최고의 기대주로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명문클럽에서 레전드로 꼽히는데 정작 모국에서는 탈영병을 자처하는 신세고, 알게 모르게 좌절과 굴곡도 꽤 많죠. 엄청나게 성실하고 투쟁심이 강한 편이었다고 하는데 정작 제일 유명한 사진은 우는 사진이고 노령이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이미지로 자리잡아있고...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감독 선임될 때 이제는 이름값으로 아무렇게나 막 뽑나 싶었는데 지금은 그냥 오래오래 건강하게 감독 잘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5
이 게시판에 등록된 Raute님의 최근 게시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