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14 14:46:19
Name   goldfish
Subject   강운구 '마을 삼부작' 중

*
어제 눈도 오고 생각나서 강운구의 사진집 '마을 삼부작'을 다시 읽었는데 좋네요. 그 중  특히 좋아하는 '수분리' 부분을 발췌해서 올립니다.  문장이 사진만큼 좋은 작가죠.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의 들목에는 수분재가 있다. 그리로는 장수에서 남원으로이어지는 19번 국도가 넘어간다. 수분재의 마루에 물매가 가파른 건새집이 한 채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집 지붕의 북쪽 면에 떨어진 빗방울은 흘러 흘러 금강으로 합류되었다가 서쪽 바다로 가고, 남쪽 면에 떨어진 빗방울은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서 구비구비 돌다가 남쪽 바다로 간다'고. 그래서 물을 가른다는 수분재이고 수분리였다.
 
그곳은 지형적인 특성으로 비나 눈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수분리 마을의 집들은 거개가 지푸라기 대신 새,곧 억새풀의 줄기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인,   그이들은 "쌧집" 이라고 부르는 건새집들이었다. 그런 건새집들은  지붕이 두터웠으며 물매가 가팔랐다. 그것은 그래서 비나 눈을 빨리 흘러내리도록 했다.    볏집으로 이엉을 해서 덮는 초가는 해마다 새로 지붕을 이어야
했지만, 건새로 이은 지붕은 한 삼사십 년쯤은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건새 초가지붕에는 기와지붕이 그렇듯이 시퍼렇고 두껍게 이끼가 덮여 있기도 했었다.

..........

그 유례가 없던 건새집 마을은 이 사진을 찍던 때로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서 모두 '새마을' 유니폼으로 바뀌어, 그야말로 일본 사람들의 집 지붕들처럼 납작납작하게되었다. 이 마을은 국도에서 바라다보이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나는 "발견"을 할 수 있었고,그들은 부수었다.

......
 
그때 그날 설핏하게 기울던 해가 낮게 깔린 구름 속으로 잠겼을 때, 느닷없이 장난처럼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궁핍하던 시대의 궁핍하던 사람들이 짓던 이 넉넉한 표정과 분위기는 도무지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윽고 흰 눈에 잿빛이 묻어 내리자 마을은 어둠에 잠겼다. 춥고 기나길던 겨울이었다.
......
 
많은 것을 보았다. 나는 온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다 가서 보고싶었다. 찍는다는 것, 꼭 파인더를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땅의 고유한 삶과 풍경과 정서를 맨눈으로 보고 느끼며 알려고 했다. 구도와 초점과 노출 그리고 내면의 의미나 외면의 아름다움 또는 표상 같은 것이 전제되는 사진이라는 성가신 방편 없이, 맨눈으로 바라다보고 마음속에 새겨 두려고 했다. 그래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거나 할 때도 졸지 않고 밖을 줄곧 내다보려고 했다. 날 저물어 캄캄하게 압축된 차창으로 마을들의 흐릿한 불빛이 지나가는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보지 않고, 외부를 통하지 않고, 대뜸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모른ㅐ다.

 사진은 언제나 현재를 찍는다지만,어떤 것이나 저장하려고 필름에 영상을 비추는 순간에 과거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슬픈 사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백이십오 분의 일초나 이백오십 분의 일 초 전은, 물리적으로는 확실히 과거지만 현실에서는 현재의 과거는 결코 아니다.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말, 그리고 노래, 그림, 글 ... 들도 말하고 노래하고,그리고 쓰면서 그것들의 앞은 과거로 함몰된다.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사진은 슬프지 않다.  다만 사진에 화석 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따름이다.
 
 





























1973. 강운구






4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705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1. 원작 만화처럼 로맨스 즐기기 16 서포트벡터 23/04/03 1952 9
    13678 문화/예술개인적으로 국가 부도의 날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벙찐 장면 4 OneV 23/03/27 1685 1
    13668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 샐리 아버지의 타로점은 맞았을까? 4 서포트벡터 23/03/25 1960 7
    13245 문화/예술만화 원피스가 타 소년만화와 차별화 되는 부분(?) 7 OneV 22/10/19 1861 0
    13216 문화/예술오무아무아 2 EisKaffee 22/10/10 1733 15
    13210 문화/예술애니를 안보셔도 한번 봐주셨으면 하는거 모았음 1탄 9 활활태워라 22/10/06 2255 3
    13094 문화/예술아이돌도 결국은 노래가 좋아야한다. 36 OneV 22/08/17 3068 4
    13092 문화/예술폴 포츠, 10월 8일 데뷔 15주년 기념 내한 콘서트 개최 둔둔헌뱃살 22/08/17 1846 0
    13038 문화/예술<소설가의 영화> _ 창작자로서의 홍상수와 유희열 리니시아 22/08/01 2408 8
    12583 문화/예술한문빌런 트리거 모음집 23 기아트윈스 22/03/06 3156 49
    12560 문화/예술방과후설렘 8 헬리제의우울 22/02/28 3015 14
    12285 문화/예술회사 식당에서 만난 박수근 9 순수한글닉 21/11/19 3639 34
    12102 문화/예술과연 문준용 씨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36 Cascade 21/09/20 5235 25
    12088 문화/예술왕릉 옆에 무허가 아파트…3,000채. 35 cummings 21/09/17 4595 0
    12048 문화/예술그림의 노래 2 ikuk 21/09/05 2696 2
    12017 문화/예술뜨개질을 시작해보자! 8 고기찐빵 21/08/26 4296 6
    11982 문화/예술서울공예박물관 후기 1 Cascade 21/08/14 4248 5
    11960 문화/예술평택시·GS25 '남혐 손모양' 이미지, 같은 업체서 제작 21 cummings 21/08/04 3864 0
    11704 문화/예술(망상) 평화를 위한 북벌 2 알료사 21/05/21 3280 1
    11481 문화/예술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2010년대 추천 애니메이션 28편+1편 (추가) 17 이그나티우스 21/03/11 6684 11
    11395 문화/예술시로바코 극장판 리뷰 4 이그나티우스 21/02/04 3659 5
    11374 문화/예술푸틴 궁전 (추정?) 항공샷 3 Curic 21/01/24 4256 3
    11225 문화/예술강운구 '마을 삼부작' 중 goldfish 20/12/14 3221 4
    11137 문화/예술리갈하이 3화 (스포) 4 알료사 20/11/15 4062 5
    11028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4) – Ricoh GR-D2 2 *alchemist* 20/10/05 4433 8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