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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3/09 01:41:47
Name   Picard
Subject   대선 전날 쓰는 회사 정치 이야기
안녕하세요. 중년회사원 아재입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역사가 오래 되었습니다. 창업이 박통때였어요..
업계 탑은 당연히 아니지만, 역사로는 탑급입니다.
박통때 창업했는데, 박통 딸이 대통령 할때 망해서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오래된 고리타분한 회사라 그런지..
한번 팀장이 되면 왠만하면 강등이 안됩니다. 최근에는 좀 사례가 있지만, 5-6년전만 해도 팀장이 팀원 되면 사표 썼죠.
왠만하면 조직을 만들어서라도 팀장이나 임원 자리를 유지시켜줬거든요. 그래서 제가 팀원으로 강등되었을때 좀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부서는 기획과 일부 감사 기능을 하는 부서였는데,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여러 부서가 하나로 합쳐진 부서라서 여러 잡다한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CEO 직속 부서였습니다. 조직개편에 따라 소속이 바뀌기는 했지만 보통 CEO 직속, 또는 COO 직속이었습니다. 본사 경영진이 공장이나 연구소를 살펴봐야 겠다 싶으면 저희 부서에게 지시를 하곤 했습니다. 주로 대형 클레임을 쳐맞는다거나, 품질 사고가 크게 나면 공장이나 기술쪽 보고와 다른 루트로 살펴보고 보고하는 역활이었고 이럴때 공장가면 이미 다 끝난일 들쑤신다고 고참부장한테 욕먹고 공장장한테 레이저 맞고 그랬습니다. 공장과 기술을 잘 알면서 사내 인맥도 넓은 사람이 팀장을 해야 하는 자리인데 고지식한 엔지니어 출신인 제가 얼떨결에 팀장을 하고 있었으니... (원래 여러 팀이 합쳐진 조직이었고 부서장이 이사였는데 부사장 둘이 사장 힘빼기 위해 칼질하면서 이사도 그만두고 인원도 줄었는데 기능은 그대로인채로 제가 팀장이 된 상황)

저희 회사는 사장은 바지사장이고 부사장 둘이 경쟁을 치열하게 하고 있었는데, 바지사장이 그나마 힘을 쓸 수 있는 부서가 감사팀하고 저희부서였습니다. 감사는 돈과 비리를 캐고, 저희는 공장과 품질을 캐고 다니라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바지사장이 밀려나고 A부사장이 회장의 눈에 들어 사장이 되었습니다. 사장이 되고 몇달후 조직개편을 하면서 자기 라이벌이었던 B 부사장의 오른팔, 왼팔을 싹 좌천시키거나 다른 조직으로 빼버리고 던져준게 저희 부서였습니다.
조직개편하기 2주전에 사장한테 보고하러 가니 밥을 사주면서 '어디 줄 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맡은일 열심히 해라' 라고 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미 저희를 보낼 생각을 하면서 '너네 그쪽에 줄서지 마라' 라고 힌트를 준것이었나 보다 싶었죠.

당연히 B부사장은 다시 공을 세워서 사장을 치고 싶은데, 알짜부서는 다 뺏겼으니 자기 밑 임원이나 팀장(이라고 해봐야 직속팀장은 저밖에)을 갈구면서 뭐 없냐고 하는데.. 임원들이야 임원짬으로 버티거나 넘기는데, 저는 죽겠더군요.


사장과 부사장이 사이가 안 좋다보니 둘다 부사장일때부터 사무실 층이 다르고 서로 반대편에 방이 있어서 엘리베이터에서도 잘 마주치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사장이 두번째 조직개편을 하면서, 부사장 밑에 조직을 더 빼버립니다. 본사에 부사장 밑 조직이 하나도 없는거죠. '어? 이러면 부사장이 공장 내려오시나? 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저희 회사에서 공장장, 부공장장 빼면 본사에 자기 방이 없는 임원이 없었거든요. 특히 부사장급이면 공장에도 방이 있고, 본사에도 방이 있었습니다.

'부사장이 내려올까?'
'본사에 자기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거기 있어서 뭐하냐?'
'그 사람 자존심에 자기가 지방 좌천이라는걸 못 버틸걸?'

부사장이 내려와야 하는데, 이 양반이 안내려오고 본사에서 버팁니다.
공장에서는 방을 만들 생각을 안합니다.
부사장이 조직개편 2주만에 내려왔는데, 자기방이 없는걸 보고 열이 제대로 받았죠.
그때 회의실 불려가서 1시간반동안 욕받이 하고 멘탈 나갔던게 기억나네요.
원래 임원급이 이동하게 되면 본사 총무팀이랑 공장 총무팀이랑 알아서 착착 일처리를 해야 하는데, 힘빠지고 있는 부사장한테 힘쏟기 싫었나 보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부사장이 공장의 VIP 회의실을 자기 방으로 만들라고 했고, 사장이 '내방도 이거보다 작다' 라면서 반려를 합니다.
본사와 공장 총무팀이 일을 안한게 아니라 사장이 뒤로 일하지 말라고 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사장 자존심 긁을려고... (그리고 유탄은 제가 맞고..)

그래서 예전 저희 부서 이사님이 쓰던 작은 방을 임시 부사장실로 쓰면서 본사에서 안내려오고 반년을 버팁니다. 한달에 두번정도 내려오더군요.
대체 이 양반은 자기 부하도 없는 본사에서 뭘하나 했는데.. 뭐 나름 뭔가 하긴 했더라고요. 자기 옛날 오른팔한테 이것저것 시키면서..  정작 그 조직은 다른 전무 소속인데, 부사장이 이러니 전무가 뭐라 못한 모양입니다. 사실 월권이고, 해서는 안되는 짓인데.

그래서 올해초에 또 조직개편을 합니다. 부사장의 오른팔조직을 사장 직속으로 올려버리고 오른팔이었던 부서장을 내보냅니다. 결국 본사에 있어봐야 일 시킬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공장 내려오시더군요. 그러면서 제가 좌천됩니다. 아마 제 능력과 성향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이해가 안가는 것은, 부사장이 이정도까지 밀리면서도 그만두지 않는거 보면 아직 회장에게 신임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모양인데, 사장이 이러는걸 회장이 용인한다는 겁니다. 회장은 경평과 별도로 2주에 한번씩 사장 및 부사장, 전무들이랑 보고자료 없이 프리하게 현안보고를 한두시간 받고 점심을 먹는다는데, 그 자리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요.


저는 지금 실무자로 돌아와 그냥 제 할일 하고, 팀장이 만들라는 회장/사장 보고자료 전담하고 있는데..
이제 감사니 뭐니 하면서 남이 실수한거 들쑤시지 않아서 좋고, 사장이니 부사장 눈치 보면서 사내 정치적 역학관계 신경 쓰는거에서 벗어나니.. 업무량은 늘어서 야근도 늘었지만 스트레스는 줄어든 것 같습니다.

다시 팀장 승진할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냥 실무자로 다니다가 후배가 팀장달때가 되면 나가란 소리 듣겠구나 싶습니다.
엊그제 퇴사한 이사님이 소문 들으셨는지 전화하셨더라고요.
너한테는 차라리 그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정치에 시달리느라 고생했지..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밥한번 먹자..
(아니 근데, 애초에 공장 엔지니어였던 저를 끌어온게 이사님이었고 알고보니 학교 선배님이어서 '이사가 너 자기 사람 만들려고 끌고 갔구나' 하는 소리 들었는데, 본인이 먼저 나가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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