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0/16 01:38:26
Name   삼공파일
Subject   글을 쓴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바쁜 건 아니지만, 일정이 한가해져서 친한 후배랑 맥주 한 잔하고 써봅니다. 의대생 치고는 책 좋아하는 후배라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가 제가 쓴 글을 보여줬습니다. 여기에도 올린 적 있는 실습 감상문이었습니다. 인쇄까지 해서 읽으라고 보여줬으니 진상을 부린터라 지금도 부끄러운데 써놓고 읽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참 외로운 일입니다.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소설이나 글을 쓴다는 것 자체에 대한 글이 유행입니다. 김연수가 쓴 것도 있고 젊은 작가들이나 늙은 작가들이나 자기가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읽는지 주저리 주저리 써놓은 이야기들이죠. 조지 오웰이 수필집 제목도 나는 왜 쓰는가였을 겁니다. 하나 같은 공통점이라면 쓴다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글 자체가 무언가를 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세상을 바꾼 글이 있을까요?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비극들이 세상을 바꿨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칸트의 비평들이 세상을 바꾸고 다윈의 종의 기원 이래로는 과학자들이 쓴 글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 글도 있지만, 그런 글도 외로움입니다. 김연수 같은 한국의 유망한 작가도 아니고 조지 오웰 같은 대문호도 아니고 세계를 바꿀 위대한 글을 쓸 사람도 아닙니다. 방구석에서 그냥 어쩔 줄도 모르고 배운 적도 없는 활자를 써보는데 그 글도 외로움이고 고독입니다.

친구들이랑 놀러 나가고 같이 운동하는 것보다 혼자 생각하는 게 좋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썼는데 아마 글을 쓰다 보니 혼자 있는 게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쩌다 보니 혼자 있어서 혼자 있는 걸 좋아했던 걸 수도 있습니다. 박경리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언제나 글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슈퍼스타K 같다고. 슈퍼스타K에서 우승을 하려면 노래도 잘해야 하고 소재도 맞아야 하고 스타성도 있어야 합니다. 노력보다도 타고난 재능이 훨씬 더 중요하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에게도 타고난 재능이 있을 겁니다.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써야겠다라는 욕구와 번뇌가 중첩될 때 담배를 물고 머리에 니코틴을 때려부으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만사 제껴 놓고 뭔가 씁니다. 이런 뭔가 귀찮은 게 그게 없는 사람들이 편한대로 갖다 붙인 재능이란 것이겠죠. 노래방에서 친구들이랑 노래 부르면 노래 잘 부르는 친구가 있듯이 그렇게 글 잘 쓰는 친구일 겁니다, 저는.

운좋게 슈퍼스타K에서 우승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행복할까요? 음치라서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글은 외로움인 걸요. 난 내 안의 이것과 평생을 마주하면서 도전할 용기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슈퍼스타K 우승자가 된다고 해도 난 이승철이나 이승환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스티비 원더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면 비웃음이나 사겠죠.

쓴다는 것은 쓴다는 것 자체의 무의미와 쓴다는 것을 불러 일으키는 내 안의 공허함이 무슨 박자인지 모르겠는데 맞춰서 춤을 추는 미친 짓입니다. 미친 짓이라고 해도 읽히고 박수 받을 수도 있고 그것이 영구히 인간 세상을 바꿔 놓을 수도 있습니다. 무의미와 공허함은 그렇게 글쓰기가 존재로서 너무나도 충만함을 알기에 유지되는 존재 앞의 무이고, 모두 앞의 외로움입니다.

"글 쓰는 의사가 될까...?" 박경철 같은 사람을 보면 안동에도 병원 개원할 데가 없구나, 깨달음이 옵니다. 아하, 흐느적 흐느적 질질 끌면서 여기까지 왔네요. 그래도 세상을 기만하느니 쓰지 않을 거라는 양심과 용기는 있습니다. 계속 흘러가겠지요.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내 안의 외로움과의 만남인 것 같습니다. 걔는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까 생각날 때마다 또 만나야죠, 별 수 없죠.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027 1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307 3
    15877 스포츠[MLB] 코디 폰세 토론토와 3년 30M 계약 김치찌개 25/12/04 224 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8 트린 25/12/03 462 7
    15875 기타유럽 영화/시리즈를 시청하는 한국 관객에 관한 연구(CRESCINE 프로젝트) 19 기아트윈스 25/12/03 571 2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965 5
    15873 오프모임12월 3일 수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대충 <점봐드립니다> 15 T.Robin 25/12/01 561 4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520 14
    15871 스포츠런린이 첫 하프 대회 후기 8 kaestro 25/11/30 449 12
    15870 도서/문학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15 joel 25/11/27 1048 2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703 5
    15868 정치 트럼프를 조종하기 위한 계획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지만 성공했다 - 트럼프 행정부 위트코프 스캔들 6 코리몬테아스 25/11/26 906 8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695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632 0
    15865 경제주거 입지 선택의 함수 4 오르카 25/11/25 655 3
    15864 철학/종교진화와 창조, 근데 이게 왜 떡밥임? 97 매뉴물있뉴 25/11/25 1875 4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063 17
    15862 기타★결과★ 메가커피 카페라떼 당첨자 ★발표★ 11 Groot 25/11/23 621 4
    15861 기타[나눔] 메가커피 아이스 카페라떼 깊콘 1 EA (모집마감) 31 Groot 25/11/21 678 3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719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649 7
    15858 오프모임[취소] 11월 29일 토요일 수도권 거주 회원 등산 모임 13 트린 25/11/19 777 3
    15857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2 2 육회한분석가 25/11/19 483 3
    15855 의료/건강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넋두리 46 Merrlen 25/11/17 2017 2
    15854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 육회한분석가 25/11/17 569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