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3/30 11:44:46
Name   nothing
Subject   영화와 소설 "뜨거운 피" 감상평 (노스포)

원래 느와르 영화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정우 배우님이 좋아하는 편이라 영화 예고편보고 후다닥 예매해서 보고 왔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게 봐서 원작 소설도 사서 완독했는데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네요.

일단 영화는 뭐랄까, 알파메일 타입의 캐릭터들의 대활극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부산이라는 공간도 그러한 스토리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구요.
각각의 독특한 캐릭터들이 인상적이었고, 그 캐릭터들끼리 마치 사자가 영역싸움을 하듯 서로의 덩치를 부풀리며 으르렁 거리는 모습들이 멋지게 다뤄집니다.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소 찌질하고 또 암울하기까지 한 건달들의 이야기에 상영 시간 내내 마음을 빼았겼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 희수를 비추면서 나레이션이 나오는데요.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잘 마무리하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뜨거운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허깨비처럼 쓸쓸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헛것을 뒤집어쓰고 살아갈 것이다. 치욕과 슬픔에 발을 담그고."]

소설은 영화와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생략되거나 변경된 이야기들이 꽤 있었고, 영화에서는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적인 설명들도 곁들여져 오히려 영화만 봤을 때는 이해가 잘 안됐던 부분들도 소설로 채워지는 부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중 캐릭터들이 영화보다 더 찌찔하고 야비하고 볼품없게 나옵니다.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구암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

구암의 건달들은 온 몸에 문신을 휘두르고, 그 위에 반딱거리는 정장을 걸치고 보무도 당당하게 활개치는 모습을 하지 않습니다.
유니폼은 츄리링이고, 박력있는 모습 보다는 겁많고 찌질하고 다소 무식한 모습들입니다.

주인공인 희수도 영화에서는 구암의 에이스인 장면들 위주로 비춰지지만, 소설에서는 나이 마흔에 가진 빚뿐인, 호텔 달방을 전전하는 자조적인 모습들로 설명됩니다.
심지어 영화보다 빚도 몇 배 많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인 스토리는 영화나 소설이나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근데 마지막 작가의 말은 영화와 결이 조금 다릅니다.

" ... 사람들은 더 쿨해지고 더 예의발라지고 더 유머러스해진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관대하게 대한다. 모두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예민하게 살핀다. 쾌적하고 젠틀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 예의바르고 유머러스한 관계 속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더 힘들고 공허해진다. 이 도시가 이렇게 예의바르고 관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이제 뜨겁지 않다. 뜨거운 것들은 모두 미숙하고 촌스럽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죄목으로 촌충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구암의 그 지리멸렬한 삶이 그리워진다. 구암의 시절엔 짜증나고, 애증하고, 발끈해서 술판을 뒤집었지만 적어도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다.]
이 밤에 혼자 소주병을 따며 나는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낼 방법을 떠올려본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든다. 그런 삶은 없다. 모든 좋은 것은 나쁜 것과 버무려져 있다. 문을 닫으면 악취가 들어오지 않지만 꽃향기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에서의 "뜨거운 것"은 건달의 그것이었으나, 소설에서의 "뜨거운 것"은 친구, 이웃, 동료, 사람들의 그것이었습니다.
누구누구의 장례식장에서 작은 말다툼으로 시작해 끝내는 상을 뒤엎고 주먹질이 오가지만 결국 다음 날 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치고 사과를 주고 받는 뜨거움. 재미도 없는 농을 매일같이 남발하는 바람에 혈압이 오르게 하지만 끝내는 "그래도 심성은 착한 놈"이라고 회상하는 뜨거움.

저도 요즘 그러한 뜨거움이 없어진 세상이 실망스럽던 차에 재밌게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228 1
    15926 일상/생각나를 위한 앱을 만들다가 자기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큐리스 25/12/25 345 5
    15925 일상/생각환율, 부채, 물가가 만든 통화정책의 딜레마 9 다마고 25/12/24 518 11
    15924 창작또 다른 2025년 (14) 2 트린 25/12/24 128 1
    15923 사회연차유급휴가의 행사와 사용자의 시기변경권에 관한 판례 소개 3 dolmusa 25/12/24 462 9
    15922 일상/생각한립토이스의 '완업(完業)'을 보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1 퍼그 25/12/24 541 15
    15921 일상/생각아들한테 칭찬? 받았네요 ㅋㅋㅋ 3 큐리스 25/12/23 494 5
    15920 스포츠[MLB] 송성문 계약 4년 15M 김치찌개 25/12/23 203 1
    15919 스포츠[MLB] 무라카미 무네타카 2년 34M 화이트삭스행 김치찌개 25/12/23 125 0
    15918 창작또 다른 2025년 (13) 1 트린 25/12/22 175 2
    15917 일상/생각친없찐 4 흑마법사 25/12/22 588 1
    15916 게임리뷰] 101시간 박아서 끝낸 ‘어크 섀도우즈’ (Switch 2) 2 mathematicgirl 25/12/21 308 2
    15915 일상/생각(삼국지 전략판을 통하여 배운)리더의 자세 5 에메트셀크 25/12/21 419 8
    15914 창작또 다른 2025년 (12) 트린 25/12/20 219 4
    15913 정치2026년 트럼프 행정부 정치 일정과 미중갈등 전개 양상(3) 2 K-이안 브레머 25/12/20 335 6
    15912 게임스타1) 말하라 그대가 본 것이 무엇인가를 10 알료사 25/12/20 566 12
    15911 일상/생각만족하며 살자 또 다짐해본다. 4 whenyouinRome... 25/12/19 568 26
    15910 일상/생각8년 만난 사람과 이별하고 왔습니다. 17 런린이 25/12/19 904 21
    15909 정치 2026년 트럼프 행정부 정치 일정과 미중갈등 전개 양상(2)-하 4 K-이안 브레머 25/12/19 454 6
    15908 창작또 다른 2025년 (11) 2 트린 25/12/18 249 1
    15907 일상/생각페미니즘은 강한 이론이 될 수 있는가 6 알료사 25/12/18 643 7
    15906 기타요즘 보고 있는 예능(19) 김치찌개 25/12/18 369 0
    15905 일상/생각무좀연고에 관한 신기한 사실 5 홍마덕선생 25/12/18 589 3
    15904 일상/생각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더 반짝일 한아이의 1학년 생존기 10 쉬군 25/12/18 498 32
    15903 IT/컴퓨터잠자고 있는 구형 폰을 네트워크 플레이어로 활용하기 9 Beemo 25/12/17 717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