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1/21 14:03:35
Name   풀잎
Subject   황동규님의 시를 읽고..
신형철 교수님의 "인생의 역사책" 내용중에서
여러 시들을 읽다가 책 말미에 실린 황동규님의
"겨울밤 0시5분" 이라는 시를 읽는데 아하..라는 감탄과 함께 감동이 옵니다.


겨울밤 0시 5분 - 황동규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마을버스 종점, 미니 광장 삼각형 한 변에
얼마 전까지 창밖에 가위와 칼들을
바로크 음악처럼 주렁주렁 달아놓던 철물점 헐리고
농산물센터 '밭으로 가자'가 들어섰다
건물의 불 꺼지고 외등이 간판을 읽어준다
건너편 변에서는 '신라명과'가 막 문을 닫고 있다

나머지 한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 전광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여자가 들릴까 말까 그러나 단호하게
'이제 그만 죽어버릴꺼야', 한다
가로등이 슬쩍 비춰주는 파리한 얼굴,
살기 묻어있지 않아 적이 마음 놓인다
나도 속으로 '오기만 와바라!'를 반복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는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으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텐데'
누가 헛기침을 참았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

처음 접하는 ㅠㅠ 시인의 시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는 너무나 강렬하게
끌렸어요.

늘 가볍게 참견하길 즐겨하는 저의 안일함에 경종을 울리는듯, 좀 더 과묵해져라 라고 새해에 저를 일깨워주는듯 했었거든요.

간절히 기다리는 개개인의 간절함의 깊이를 제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좀 더 나 자신 더 험블해져야겠구나 이런 멋진 시가 있다니 감동받아서 시 전문을 찾아보고 다른 시도 둘러보았는데요.


황동규 시인의 시에 제가 늘 찾던 고향의 풍경 냄새, 사람사는 모습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음에 반가운 고향방문에 삽살개가 반겨주는듯 설레는 마음이 들게됩니다.

어릴적 시골 외갓집에서 긴여름을 보내면서 감나무 옆 담벼락 너머로 마을 풍경을 바라 보고는 했었는데요. 도시와 다르게 할머니집, 옆집 동네 마을 구수한 밥 짓는 냄새와 멀리 보이는 굴뚝 연기에 가마솥에서 익어가는 저녁 군불떼는 훈훈함을 느꼈는데요.

어느듯 저녁임을 알려주는 풍경에 담벼락 너머 혼자 훔쳐보는 시골풍경에 시간가는줄 몰랐던 기억이 황동규님 시에서 고향산천이 문득 가깝게 느껴집니다.

대표시를 찾아보니, "울진 소광리길"이라는 시가 보였어요.

어린날 친구들이랑 한여름 불볕더위를 이겨내러 여름 물놀이 캠핑을 울진 "어느계곡"으로 갔었었는데요. 그 날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기억의 창고에서 나와서 엊그제적 이야기로 그려집니다.

울진 소광리(召光里)길

황동규


오늘 우연히 지도 뒤지다가 기억 속에 되살아난
소광리(召光里)길
봉화에서 불영계곡 가다가
삼근(三斤) 십리 전 외편으로 꺾어 올라가는 길
잡목 속에 적송들이 숨어 숨쉬는 곳
차 버리고 걸으면
냇물과 길이 서로 말 삼가며 만드는
손바닥 반만 한 절터 하나도 용납 않는 엄격한 풍경
자꾸 걸으면 길은 끝나지 않고
골짜기와 냇물만 남는다.


고목(枯木)덩이 같은 쏙독새 한 마리
한걸음 앞서 불현듯
새가 되어 날아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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