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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5/23 20:46:38
Name   골든햄스
Subject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문장의 의미
【너 자신이 되어라?】 23.05.23
공부 스트레스로 미쳐서 씀



“너 자신이 되어라.”

  이 해묵은 문장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유튜브며 방탄소년단의 UN 연설이며, 심지어는 서점의 베스트셀러 란과 젊은 정신과 의사들의 미디어 활동에까지, 모든 음식에 빠지지 않는 조미료마냥 들어가 있는 이 녀석은 대체 뭐냐는 말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이라면 분명 의미가 있을 텐데, 도무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내게는 이 문장이 어느 순간부터 풀지 못한 숙제처럼 되어버렸다. BTS의 앨범 커버만 보아도 스트레스가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생각하란 뜻인가?’ 상품, 서비스 광고에 자주 노출되는 문구이며 자주 같이 나오는 단어가 ‘자신 있는’(confident)이기 때문에 나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뚱뚱한 여성처럼, 맥 빠지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옷, 태도, 인기 등의 단어 군과 자주 연관되어 나오는 명제 같았다. 그렇다면 인스타그램도 하지 않고 흔한 OOTD(오늘의 옷차림) 따위 한 장도 찍어보지 않은 나는 나를 사랑하는 문화권에 들어가 있지 않은 외톨이인 셈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거울을 본다고 해서 특별히 기쁘지도 않고 ‘오늘은 샛노란 옷을 입어야지’ 같은 즐거운 생각 따위로 하루를 시작하지도 않는 성격이란 점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그날, 그날의 목표량을 정하여 스케줄러에 적어놓고 실행하고 있는 나 자신은 항상 ‘더 나은 버전의 나’를 목표로 스스로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오늘 하자담보책임을 다 정리 못하고 잠이 드느니 차라리 콱 죽어버리자.” 나는 지난 인생 내내 나의 경영자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면 그건 ‘나’를 관리하는 ‘나’가 된 것인데, 전자의 나와 후자의 나 중에서 추구해야 하는 ‘나 자신’은 누구란 말인가? 혹시 후자의 내가 전자의 나의 자아실현을 막았나? 아. 혹시 그래서 이토록 삶이 고단한 것인가? 하지만 아이스크림 한 통을 끌어안고 넷플릭스를 보며 8시간을 보내면 그 즉시 이런 느낌이 뇌를 통과한다. ‘너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어. 심지어 이건 재미도 없어. 넷플릭스 주가는 내려갈 거 같아. 그렇지 않니?’ 결국 내가 선택해버리고 마는 나 자기 모습은, 다음 순간 넷플릭스 주가 차트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리조(Lizzo)의 노래와는 풍이 완전 다른데….’

자존감을 올려주는 노래로 유명한 풍만한 가수를 떠올려보지만, 그녀의 색색의 화려한 옷들과 어딘가의 휴양지를 배경으로 올라오는 사진들과 다르게, 나는 흰 종이와 검은 글씨 사이에서 나 자신도 하나의 서류가 되어가는 느낌으로 그날그날의 일정이 인쇄되며 앞으로 밀려 나가고만 있다. 오늘 구청에서 온 지방세 미납 문자며, 청소 도우미가 부탁해서 주문한 밀대며, 2주마다 꾸준히 방문하는 병원 그 어디에서도 나는 ‘다음 할인’만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

‘무언가 다른 것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 인디밴드 공연에 가보기도 하고 힙하다는 젊은 책방에 가보기도 하지만, 환호하며 맨 앞에 앉아있는 오랜 팬의 모습이나 책방 주인과 바쁘게 소통하며 SNS로 비정기적 이벤트를 구독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곳도 왠지 내 장소는 아닌 거 같은데’ 하는 느낌과 함께 가방을 들고나오게 될 따름이다. (물론 나올 때 날 아쉽게 바라보면서 다음 장면을 위한 여운을 남겨주는 의문의 남주인공이나, 찾아주는 가게 주인 같은 건 없다.)

  ‘스스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정리해 보세요!’ 같은 지침에 따라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분류해보아도 이 막막한 느낌은 가시지를 않는다. 좋아하는 것, 샤리와 네타의 비율이 적절한 초밥. 싫어하는 것, 광어초밥인 척하는 똥물에 양식한 틸라피아로 만든 초밥. 여기서 그 누구도 나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한 번쯤 겪는 진력나는 시기와 유사한 신앙 해체의 과도기를 겪는다. “다들 나에게 날 사랑하라고 말을 퍼부었어! 그걸 믿으라고 했고 나는 같이 기도했지! 그러면 다들 웃어주니까 그렇게 했어! 근데 전혀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아! 신은 없어! 나는 지금까지 헛수고한 거라고! 허공에다 대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의 말과 행동을 했을 뿐이야.”

  그러면서 현대인 비판, MZ세대 비판, 전후세대와의 비교 등을 읽다 보면 8시간은 금방이다. 젠장. 차라리 넷플릭스를 볼걸. 그러면 남들과 잡담할 주제라도 생기는데. 알 수 없는 공허감은 더 심해지기만 한다. 이제는 (여자)아이들이 ‘우리 모두는 퀸카’라는 취지로 컴백을 한단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나는 별로 퀸카가 되고 싶지도 않은데….’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 어디엔가, 이토록 같은 시대의 많은 이들이 입 모아 합창하듯 이야기하는 구절에는 일말의 진실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 혹시 나만 빼고 다들 그놈의 ‘자기 사랑’이란 걸 이미 실천하고 있나.

  해답은 늘 그렇듯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찾아온다.

  답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동안 흠을 보여주지 않는 매끄러운 공산품 자동차처럼 존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도무지 뒷담을 하려 해도 흠 잡힐 것이 없는, 혹여라도 소시오패스가 무리의 희생양을 찾더라도 털끝 하나 만만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요즘 세대의 흔한 자기방어적 몽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 현명하면서도 윤리적 허영도 조금 실천하고 있는 소비자가 되고 싶었다. 90%만큼은 날 위해서, 10%는 남을 위해서. 스스로 생각한 원칙대로 움직이며 술집에서는 바로 자리를 떴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금의 손해를 감수했고 병원에서는 그간의 병력과 치료 내역을 적어가서 읊고 부작용에 대해 호소해 합의점을 찾아가며 합리적인 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는 물론, 그곳에서도 바로 자리를 떴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가 만든 자본주의적 백색 감옥 속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 누구도 시킨 바 없지만, 꼭 누가 시킨 것처럼. 엘리베이터 앞에서 예의를 지키고, 지하철 역사 안 에스컬레이터 한 줄은 급한 사람들을 위해 비워놔야 하는 것처럼, 다른 모든 일도 그런 줄만 알았다.

  나는 술집에서는 술을 마시고 책집에서는 책을 읽고 병원에서는 병을 치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다른 사람에게 소개받은 조금 독특한 신경과를 찾아가게 됐다. 고즈넉한 사직동 거리에 자리 잡은 이 병원은, 아무리 봐도 다른 병원과는 달랐다. 괜히 비싼 제품이며 미술 도록들을 배치해놓은 것부터, 가끔 어색해하며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데스크를 담당하는 직원, 사투리를 고치지 않은 의사 선생님의 태도에까지 ‘빠르게 3초 만에 진료 보고 나가줘야 칭찬받을 것 같은’ 다른 병원의 비장한 압박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오늘 병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바뀌었는데 혹시 거슬린다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선생님은 ‘오. 괜찮아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안간 선생님은 ‘요즘 감기가 독하더라고요’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경과였지만 진지하게 나보고 뜨거운 물을, 커피보다는 녹차를 권하며 한참 동안 바이러스가 목에서 나가지 않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했다. “일단 감기부터 나아야겠네요.” 본론이라고 할 만한 내가 앓고 있는 신경계 질환 이야기는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과 나는 잠시 환담을 하였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치료는 잘 진행되어갔다.

  최근에 친구에게 실수했다. 사과했다. 친구가 사과받아주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아직 둘 다 미숙하니 같이 나아가보자.” 나는 나의 쓰레기 같은 모습을 잘 알 수 있었다. 틸라피아 초밥을 욕한 것을 후회했다. 정말 똥물 같은 것은 내 욕구였고, 내 심장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헤엄치는 그 물고기는 피라냐보다 못됐고 그놈은 심지어 횟감만큼도 못 되는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구나. 나는 이기적이구나. 나는 바보구나.’

  자주 가는 식당에서 직원이 가방을 놓는 상자를 가져다준다기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 놓고 또 어느 모임에서는 내 귀찮은 의무를 외면했다. 더 이상 무리하게 내 윤리적 준칙을 지키지 않기로 했다. 성가시면 성가신 대로, 내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티를 내며 투덜거렸다. 갑자기 친절해졌다가, 갑자기 불친절해졌다. 그런 내 모자라고 들쑥날쑥한 모습에, 사람들이 오히려 좋아했다. 캐릭터를 잡아주고 깔깔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간 아무 소음도 없는 하얀 감옥 속에서 사는 기분이었는데 별안간 색깔들과 소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가 하고 싶어.’
  ‘나는 a가 싫어! B가 좋아!’
  ‘나는 네가 싫어.’
  ‘이제는 좋아.’

  마치 게임에서 그동안 모르던 보이스 채팅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우당탕 내 달팽이관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사람들이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오만하게 행동했다가, 사과하고, 다시 정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광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분리해두려 했던’ 나의 모습들이, 곧 남의 모습들이었다. 그간 그토록 내가 외면하던 세상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모습 중 제일 보기 좋았어.”

내가 지쳐서 엉망으로 다리를 풀어 헤치고 머리는 산발해서 뒤로 엎어져 잔 모습을 두고 애인이 말했다.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정떨어졌겠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치 초짜 예술 작가의 첫 작품이 의외의 기립 박수를 30분간 받는다는 스토리의 진부한 장면처럼, 찬사가 날아들어 왔다. 예쁘다. 일 잘한다. 돈 잘 번다. 그런 건 아니었다.

“뱃살까지 쪄서, 아주 ‘무럭무럭 자라고 있구나’ 싶더라니까? 그 날것의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고 널 정말 사랑한단 걸 알았지.”

내가 들은 칭찬은 바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의 경계심 풀린 모습과 늘어가고 있는 체중과 BMI에 대한 의외의 의견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칭찬이 몹시 행복해, 내 안의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이 악에게 강펀치를 날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언제든 다른 사람들로 인해 힘들어질 때 꺼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이 생긴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무럭무럭 자라기. 그 자체로 칭찬받기. 앞으로 힘들 때 꺼내 볼 수 있을 나에 대한 소중한 추억. 새끼 돼지 인형 같은 모습으로 일어나 나는 웃었다. 이제야 조금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인간은 자기 얼굴을 스스로 보도록 설계된 동물이 아니란 것을.

  그래서 내가 감히 그 시대의 명제를 다시 쓸 권리가 조금이라도 있거든 간에, 이렇게 고쳐 써서 나와 같이 이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좌절할 미래의 젊은이들에게 약간의 힌트를 더해주고 싶다.

  “(남들 앞에서) 너 자신이 되어라.”

  혼자서 방 안에서 모자란 자신을 안고 끙끙 앓지 말고, 나가서 자기 모자란 모습을 보여줘라. 부딪혀라.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이 모든 게 의외로 별것 아니고, 우리는 오케스트라의 각 하나의 음표에 불과하다는 감각’이, 나는 그나마 ‘자기 사랑’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한다.

  술집에서 책을 읽고 책집에서 기타를 꺼내고 병원에서 자기 자랑을 해라.

  문장을 쓸 때, 마침표를 상대에게 넘겨주어라. 그 사람이 느낌표를 찍든, 물음표를 찍든, 쉼표를 찍든, 설사 삭선으로 앞의 문장을 남김없이 수정하고 새로운 문장을 쓰든 간에 맡겨 두어라.

  그래서 틸라피아든 피라냐든, 마음속에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를 하나 알았으면 되었다. 이제 그놈과 잘 살아가면 된다. 똥물이든, 꽃물이든, 그 속에서. 다른 해파리들과 물고기들과 상어들과 함께.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원고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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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완전한 모습도 수용하고 남 앞에서 떳떳해지려는 태도가 멋있습니다
  • 나 돼지가 되겠다.
  • 역시 연애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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