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1/01 09:49:12
Name   선비
Subject   [조각글 2주차] 호시조라(星空)
나는 별이 밝은 밤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성적이기엔 메마른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조금 개인적인 사연이 있다.


내가 나호코를 처음 만난 건 10여 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서 자매결연중이던 일본 후쿠오카시의 야나가와 고등학교에서 학생 10여 명이 초청 형식으로 서울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선택 과목으로 고른 학생들을 일본 학생들과 짝지어 주었다. 내 짝은 나호코란 이름의 여학생이었다. 작은 키에 도담한 어깨와 예쁜 눈을 가진 나호코는 한글로 쓴 명찰을 양장 교복 자켓 위에 단정히 붙이고 있었다.


우리의 짧은 만남은 소통부터 쉽지 않았다. 나호코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중국어보다 쉬울 것 같단 이유만으로 선택 과목으로 선택한 내 일본어 밑천은, 선물로 준비한 책갈피를 건네 주며 환영의 인사 몇 마디를 하고 나자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떠듬떠듬 영어 문장을 짚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호코는 게이오 대학의 영문학과를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영문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우리는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우리는 대화의 곤란함을 만회라도 하듯 서울 시내를 부단히 돌아다녔다. 서울에 살면서도 한 번도 못 가본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어 다니기도 하고 코엑스 지하상가에서 둘이 같이 일본인 관광객 행세를 하면서 물건을 흥정하기도 하였다. 토요일, 나호코가 일본에 돌아가기 전날 우리는 저녁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나호코는 고맙다는 이야기를 담은, 한국어와 영어와 일본어가 섞인 제법 기묘한 편지와 함께 로즈마리 화분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호코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났다. 나는 어쩌다 나호코 생각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바라던 게이오 대학에 들어갔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나는 대입에 몇 차례 실패를 겪은 탓에 아직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에라스뮈스 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와 지내는 중이었다. 어느 날인가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국제학생 모임에 나갔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도 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호코였다. 놀랍게도 나호코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호코는 고등학교 때 얼굴이 그대로이면서도 좀 더 세련되고 예뻐져 있었다. 그녀는 내 인사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금방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네덜란드에서 영문학 석사 과정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모임을 빠져나와 장소를 나호코가 사는 시내의 작은 플랫으로 옮겼다. 같이 술을 마시면서 나호코는 반갑게도 결국 게이오 대학에 입학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는 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한 이야기, 그리고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로 이어졌다. 나는 그녀의 유창해진 영어에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할 이야기가 떨어지고 나호코는 음악을 듣자고 했다. 자고 있을 나호코의 플랫 메이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하나 있는 이어폰으로 같이 음악을 들었다. 내가 왼쪽에 앉아 있을 터인데 그녀는 굳이 자기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나에게 왼쪽 부분을 주었다. 나는 나호코와 얼굴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어폰에서는 그녀가 튼 Ed Sheeran의 Thinking Out Loud가 흘러나왔다.


I'm thinking 'bout how people fall in love in mysterious ways
사람들은 어떻게 이상한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는지
Maybe it's all part of a plan
그것은 어쩌면 모두 정해진 계획일 지도 모르지
Well, I'll just keep on making the same mistakes
나는 계속 같은 실수를 저지르려 할 거야
Hoping that you'll understand
네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

That, baby, now
그러니 내 사랑, 지금
Take me into your loving arms
너의 사랑스러운 품속으로 나를 데려가
Kiss me under the light of a thousand stars
천 개의 별빛 아래서 내게 키스해줘
Place your head on my beating heart
뛰고 있는 내 심장에 머리를 대어봐
Thinking out loud
내 마음을 그대로 들려주잖아
Maybe we found love right where we are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지금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거야


고등학교 때 그녀와 하던 일본어 생각이 나 나호코에게 Kiss me under the light of a thousand stars를 일본어로는 뭐라고 하냐고 물어보았다. “호시조라노시타데키스오시테(星空の下でキスをして).” 나호코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발음이 참 예쁜 말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우리는 나호코의 침대에서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 나호코의 플랫 메이트를 만나게 되어 우리는 민망함 속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 갑자기 나호코가 로즈마리의 꽃말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나호코가 이어서 말했다. “나를 잊지 마세요.” 그때에도 나는 나호코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 달 우리는 노르웨이로 함께 여행을 갔다. 오다(Odda)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은 날이었다. 비수기라 그런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공기는 차고 하늘은 맑았다. 모닥불을 피워두고 나호코와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르웨이의 하늘은 천개의 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호시라노시타데키스오시테.”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어?”하고 나호코가 물었다. 나는 그만 나호코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별 하늘 밑에서 나는 나호코에게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 다음 날에야 망설이던 나호코는 나에게 일본에 약혼자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10년 전 고등학교 때처럼 대답할 언어를 애타게 고르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꽤 유창해진 영어가 별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마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온 날 나호코는 나에게 또 보자는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십년 전과는 달리 포옹 대신 가벼운 악수를 건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연락이 왔지만 나는 나호코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따금 밤하늘을 볼 때면 추억이 별빛처럼 먼 거리를 날아와 가슴에 박히곤 한다. 순전히 운이 좋은 탓에 나는 나호코를 두 번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는 아니 만나도 좋을 것이다.




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415 7
    14948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8 + 나루 24/09/28 199 7
    14947 게임[LOL] 9월 28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7 97 0
    14946 게임[LOL] 9월 27일 금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7 139 0
    14945 일상/생각와이프한테 혼났습니다. 3 큐리스 24/09/26 675 0
    14944 게임[LOL] 9월 26일 목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5 148 0
    14943 게임[LOL] 9월 25일 수요일 오늘의 일정 1 발그레 아이네꼬 24/09/25 106 0
    14942 일상/생각마무리를 통해 남기는 내 삶의 흔적 kaestro 24/09/25 531 2
    14941 기타2002년에도 홍명보는 지금과 같았다? 4 Groot 24/09/24 647 1
    14940 일상/생각 귤을 익혀 묵는 세가지 방법 11 발그레 아이네꼬 24/09/24 534 6
    14939 일상/생각문득 리더십에 대해 드는 생각 13 JJA 24/09/24 606 1
    14938 일상/생각딸내미가 그려준 가족툰(?) 입니다~~ 22 큐리스 24/09/24 572 14
    14937 오프모임아지트 멤버 모집등의 건 26 김비버 24/09/23 1210 21
    14936 문화/예술눈마새의 '다섯번째 선민종족'은 작중에 이미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6 당근매니아 24/09/22 566 0
    14935 육아/가정패밀리카에 대한 생각의 흐름(1)-국산차 중심 28 방사능홍차 24/09/21 897 0
    14934 도서/문학이영훈 『한국경제사 1,2』 서평 - 식근론과 뉴라이트 핵심 이영훈의 의의와 한계 6 카르스 24/09/19 819 15
    14932 일상/생각와이프한테 충격적인 멘트를 들었네요 ㅎㅎ 9 큐리스 24/09/19 1396 5
    14931 일상/생각추석 연휴를 마치며 쓰는 회고록 4 비사금 24/09/18 581 9
    14930 방송/연예(불판)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감상 나누기 68 호빵맨 24/09/18 1284 0
    14929 음악[팝송] 혼네 새 앨범 "OUCH" 김치찌개 24/09/18 180 1
    14928 일상/생각급발진 무서워요 1 후니112 24/09/17 552 0
    14927 일상/생각오늘은 다이어트를 1 후니112 24/09/16 348 0
    14926 게임세키로의 메트로배니아적 해석 - 나인 솔즈 kaestro 24/09/15 301 2
    14925 일상/생각힘이 되어 주는 에세이 후니112 24/09/15 336 0
    14924 일상/생각케바케이긴한데 2 후니112 24/09/14 467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