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4/03/06 13:31:27
Name   똘빼
Subject   첫 담배에 관한 추억



대학교 2학년 때였나요. 교양수업에서 자주 눈이 가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갈색 단발머리에 아담한 키. 눈웃음이 귀여웠던 뽀얀 피부의 그녀.


핸드백 속의 담배를 꺼낼 때도 그녀는 누가 볼세라 손을 오므려서 담뱃갑을 덮고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조심스레 앞자락에 숨기고 나가곤 했는데, 스물한 살 어린 소년의 눈엔 그 어설픈 모습도 그저 귀엽기만 했네요.



마침내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한 D-day, 저는 한껏 신경쓴 차림으로 빈 담배를 물고 발코니에 기대서서, 수십번 연습한 대사 - '저기요. 미안한데, 불
..' - 따위를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항상 혼자 담배를 피우는 방화문 밖 좁은 발코니에서 그녀에게 불을 빌려달라고 말을 거는 게 제 계획이었어요. 우리는 몇 번 더 담배를 피우며 친해지고, 어느 날 같이 불을 붙이다가 눈이 마주치고, 키스하고, 결혼하고...


등 뒤에서 방화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앞 건물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저를 보고는 놀란 듯 정지했고, 몇 초 후, 되감기 하듯 뒷걸음질 치며 바로 방화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쾅 소리 뒤로 흐르는 바람은 고요했고, 불이 붙지 않은 채 조금씩 젖어가는 담배는 차가웠습니다.
"아ㅆㅂ" 라는 감... 탄사는. 낯선 사람이 본인만의 장소에 있는 걸 보고 그저 당황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죠.





결국 제 첫 담배에 불이 붙는 일은 없었고, 그녀 덕에 저는 십몇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건강한 폐와 혈관을 유지하고 있네요.


고마워요.



10
  • 건강이 최고오오오오오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148 정치윤석열이 극우 유튜버에 빠졌다? 8 토비 24/12/23 2680 10
15144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2 셀레네 24/12/19 1937 10
15113 일상/생각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난 다시 만난 세계,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노래 4 소요 24/12/08 2309 10
15049 꿀팁/강좌한달 1만원으로 시작하는 전화영어, 다영이 영어회화&커뮤니티 19 김비버 24/11/18 3176 10
15034 일상/생각긴장을 어떻게 푸나 3 골든햄스 24/11/09 2247 10
15003 영화왜 MCU는 망했나 17 매뉴물있뉴 24/10/27 3000 10
14922 일상/생각수습 기간 3개월을 마무리하며 4 kaestro 24/09/13 2355 10
14856 일상/생각잠을 자야 하는데 뻘생각이 들어 써보는 무근본 글. 16 메존일각 24/08/21 2841 10
14629 일상/생각방문을 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9 kaestro 24/04/29 2723 10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3 과학상자 24/04/23 3013 10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5 kogang2001 24/04/19 2634 10
14560 일상/생각2년차 사원입니다 9 공대왜간공대 24/03/25 3402 10
14532 일상/생각groot 님 저격 4 nm막장 24/03/14 3093 10
14511 의료/건강첫 담배에 관한 추억 3 똘빼 24/03/06 2825 10
14468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3524 10
14416 의료/건강나의 헬스 루틴 - 운동 편 25 치즈케이크 24/01/26 3975 10
14264 오프모임[런벙]모여라 런생아들! 11/16(목)저녁 양재천런+느린마을뒤풀이 59 23/11/08 3897 10
14199 역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알기 위한 용어 정리. 2편 5 코리몬테아스 23/10/14 3601 10
14109 문화/예술마법을 쓰면 다 마법소녀? 국내 방영 마법소녀물 하편 15 서포트벡터 23/08/16 5684 10
14094 일상/생각질 나쁜 익명 커뮤니티를 줄이니깐 삶의 질이 달라지네요. 32 데자뷰 23/08/06 5744 10
14035 오프모임[7/21 금요일 서울 신림] * 비어-게인: 무지성맥주전 * 파티원 모집 45 비어-도슨트 23/07/12 4617 10
14008 정치전제주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진단해본 윤석열 (+문재인-이재명과 비교) 5 카르스 23/06/28 3861 10
14001 일상/생각저는 사이시옷 '법칙'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14 별길 23/06/25 3879 10
13761 일상/생각부상중에 겪어본 이모저모 6 우연한봄 23/04/17 2803 10
13720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2. 샐리의 짝사랑 12 서포트벡터 23/04/05 4716 1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