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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4/20 08:57:40수정됨
Name   kaestro
Link #1   https://kaestro.github.io/etc/2024/04/20/%EA%B1%B8%EC%A6%88-%EB%B0%B4%EB%93%9C-%ED%81%AC%EB%9D%BC%EC%9D%B4.html
Subject   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저는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이런 가사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에 설레기 때문입니다.


---


아무리 기다린들 변하는 게 없다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손에 닿지 않아
애초에 누군가의 탓이라고 말한들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을 뿐인
그런 매일에 안녕을 고하고 싶다고 염원해

신 따위는 조금도 믿지 않는 주제에

시끄러워

날 내버려 둬

혼자가 아니라며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목이 쉬도록 노래하고 있어

그런 말에 구원받는 생명도 있겠지

모르겠어

그렇구나

그랬나?

잊어버렸어

귀찮아

부수고 싶어

용기도 없이

살아가는 이유란 녀석을 누군가 내게 알려줘
대체품 따위는 얼마든지 굴러다니니까

자신답게 굴란 말은 그리 쉽게 할 수 없잖아
할 수만 있다면 되찾아

꿈으로 넘쳐 흐르고 있다 해도 진실이니까

거기 누구없나요?
---

록은 반항의 음악이고 애니메이션 '걸즈 밴드 크라이'는 오랜 기간 억압받아온 소녀들이 모여 스스로에게 하던 거짓말을 그만두고, 거대한 세상 앞에 자신들의 조그맣고 너덜너덜해진 반항의 기치를 들어올리는 밴드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이지매당한 사실을 덮어두고 학교를 다니기를 종용하는 가정에서 도망쳐나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입시학원을 병행하는 소녀. 위대한 가업을 이어받을 인재라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는 순간부터 할 일을 강요받고 이를 순순히 따르는 자신을 평생 연기 해온 소녀. 자신은 틀리지 않았는데 마치 자신이 잘못했던 것처럼 몰아가는 세상에 지고 싶지 않은 소녀.


이렇게 많은 방식으로 억압받아온 소녀들이 모여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안식처로 만들어낸 밴드의 세상을 향해 외치는 쌓여있는 이야기, 그것이 애니메이션 걸즈 밴드 크라이의 밴드 토게나시 토게아리의 음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자신들처럼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응원입니다. '지지 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살아.'


하지만 현실은 너무 무자비하고 무신경하게 그녀들을 보이지 않게 때로는 들리지 않게 짓눌러옵니다. 나도 모르게 음악에 빠져서 수십시간을 열정적으로 보냈지만 그것에 즐거워하기보다 교과서 한쪽을 더 읽을 시간을 낭비했다며 자책하거나, 어둠 속에서 혼자서는 전등도 달지 못하는 무력함에 평생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괴로워합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조용히,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나잇값 못하게 왜 그래?'


손가락 하나를 가볍게 찍어내리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짓뭉게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자인 세상과 그걸 등에 업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약자인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 뿐입니다. 아니, 양손을 번쩍 들어올려 두 새끼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힘껏 연주해서 그 시끄러운 속삭임을 꿰뚫고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도달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 뿐입니다. 나약한 주제에 거짓말을 하지 못해 삐딱해지고 배배꼬여가면서도 자신을 굽히는 것은 절대 싫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반항의 정신이, 록 스피릿이 붕괴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성가신 음악은 사실 더이상 필요하지 않고 록은 이제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끝이라 말하기 전에는 정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완전 제멋대로에 엄청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 함께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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