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8/28 22:58:07
Name   SCV
Subject   따뜻한 것이 있다면
퇴근길이 늦어졌다. 아니, 일부러 늦췄다고 해야 맞다.
회의가 길어졌던 것도 아니고, 회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무실 불을 가장 나중까지 켜놓고 있다가, 마지막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집에 가는 사람이 된 거였다.

늦은 밤, 마지막 버스를 타지 않고 도보로 20분 남짓 되는 집까지 걸어가는 중이었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은 없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없었다.
그래도 집에 가까워질수록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이상한 일이다.

오늘 하루도, 별일은 없었다. 그게 더 슬펐다.

횡단보도 앞 신호가 아직 파란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뛰듯 건넜다. 뛰는 척만 하고, 제대로 뛰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적당히 속도 내는 척, 적당히 열심인 척.

건널목을 넘어 작은 공원 앞을 지날 무렵, 낯선 시선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을 멈췄을 때, 가로등 아래 길고 날렵한 그림자 하나가 내 앞에서 멈췄다.

고양이였다.

정확히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뼈가 얇아보이는 고양이’였다.
검은 무늬가 중간에 끊어져 있는 회색 고양이.
목 뒤쪽 털은 부분적으로 지워진 듯 흐릿했고, 눈은 탁한 호박색이었지만 어딘가 사람 눈을 닮아 있었다.
그 고양이는 내 발 앞쪽을 응시하고 있었고, 나도 이유 없이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너, 춥지 않냐.”

말을 걸어놓고서 내가 더 민망해졌다.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혹, 알아듣는다 해도,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을 해버리면, 뭔가 잃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가방 속에 뭐가 있었지 하고 손을 더듬다가,
아침에 편의점에서 샀다가 잊어버리고 미쳐 다 못 먹은 남은 호떡 하나를 꺼냈다.
따뜻하지도 않고, 눅눅했지만. 그것밖에 없었다.

종이 포장을 조금 벗겨 고양이 앞에 조심스레 놓았다.
고양이는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내가 두 걸음 물러서자 그제야 머리를 숙였다.
그 자세로 씹지도 않고 뜯지도 않고 오래도록 냄새만 맡았다. 그리고는 몸을 틀어 도로 뒤쪽, 어두운 수풀 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한동안 그 호떡 앞에 서 있었다.
먹지도, 버리지도 못한 음식 앞에서.

이상하게도, 그 고양이가 ‘배가 고프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외로워 보였다.

그것 말고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호떡은 놔두고 돌아섰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로.
혹은, 그것조차 필요 없다는 체념으로.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집 앞 편의점 불빛이 보였다.
불도 꺼져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따뜻한 걸 하나쯤 손에 쥐고 싶어졌다.

따뜻한 것이 있다면,
지금은 이유 없이라도
뭔가 하나 갖고 싶었다.



9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244 1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8 트린 25/12/03 429 6
    15695 창작따뜻한 것이 있다면 1 SCV 25/08/28 966 9
    15560 창작평행 세계에서의 인터넷 역사 5 nothing 25/06/29 1364 0
    15542 창작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5 Cascade 25/06/22 2173 10
    15415 창작탐라를 지키는 100명의 회원들 MV 14 수퍼스플랫 25/05/01 1663 13
    15291 창작윤석열의 천하 구밀복검 25/03/01 2294 2
    15279 창작안녕히 계세요! 10 골든햄스 25/02/21 2196 5
    15270 창작[클로드와의 공동 창작] 암자에서 1 호미밭의파스꾼 25/02/16 1716 2
    15263 창작하늘로 날아오르는 포사다스의 우주선을 먼발치에서 홀로 지켜보며 (창작 소설) 6 와짱 25/02/11 1886 8
    14662 창작와우에서 고마운 분 그리기 7 흑마법사 24/05/09 2739 2
    14513 창작소수 사막은 얼마나 넓을까? 2 Jargon 24/03/06 3149 4
    14403 창작김과장 이야기 8편 큐리스 24/01/17 2731 0
    14400 창작김과장 이야기 7편 큐리스 24/01/16 2431 0
    14398 창작김과장 이야기 6편 큐리스 24/01/15 2462 1
    14391 창작김과장 이야기 5편 큐리스 24/01/09 2883 3
    14390 창작김과장 이야기 4편 큐리스 24/01/08 2529 0
    14389 창작김과장 이야기 3편 큐리스 24/01/08 2679 0
    14385 창작김과장 이야기 2편 2 큐리스 24/01/06 2912 0
    14381 창작김과장 이야기 1편 1 큐리스 24/01/05 3798 1
    14339 창작ai) 여고생이 자본론 읽는 만화 12 Jargon 23/12/17 5082 16
    14250 창작우리가 몰랐던 유비의 참 모습 12 아침커피 23/11/04 7064 2
    14065 창작어쩌다 보니 그림을 그리게 된 건에 대하여 60 퐁퐁파타퐁 23/07/25 5316 13
    13934 창작서울에 아직도 이런데가 있네? 7 아파 23/06/01 3862 21
    13913 창작인터넷을 강타한 이상한 피자집에 대한 상상 7 심해냉장고 23/05/26 4985 1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