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5/12/16 03:07:29 |
Name | 팟저 |
Subject | <암흑의 핵심>이 식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은 이유 |
[“최근 경제사 연구들은 무역과 자본 투자, 그리고 제국운영에 소요된 비용 등을 조사한 결과 제국이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제국이 가져다 주는 상상 속의 이득과 실제로 실현된 이익 간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박지향 집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열강의 제국 운영의 경제적 실효성이 상상과 현실 간 차가 상당하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운영은, 원료 생산지로서든, 잉여 상품/자본의 수출/시장으로서든 열강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석탄이나 금속과 같은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원료의 경우 유럽은 1950년대까지 대부분 유럽 간 무역에 의존했으며, 또한 열강들의 해외 무역 대상은 대개 다른 열강들이거나 아니면 독립 국가이기 마련이었다구요. [“191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수출품의 10%만이 식민지로 향하였다. 식민지들은 인구가 너무 희박했고 시장 기능을 하기에는 너무 가난했던 것이다…… 독일 제품의 가장 큰 해외 구매자는 영국이었고 영국에게도 독일은 가장 큰 시장의 하나였으며, 프랑스도 영국과 독일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던 것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제국의 경제적 가치가 당연시되었다. 제국주의에 적대적이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조차 제국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흥미롭죠. 식민주의가 정작 열강에게 별다른 이익을 담보하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경제적 가치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니요.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본시 인문돌이다보니 <제국주의...>를 읽는 와중 조셉 콘래드가 쓴 <암흑의 핵심>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말론 블랜도가 나오는 <지옥의 묵시록> 원작이요(영화는 중반 이후로 참 심란해지죠.). 대강 줄거리를 읊어본다면... 배경은 19세기 말 런던이며, 소설은 서술자로 가장한 작가가 말로에게 들었던 과거사를 다시 독자에게 전해주는 액자 구성을 취합니다(그리고 액자 구조는 의식적 '재구성'을 강렬히 환기하며 문학이론의 개념인 '내포 저자'를 끌어들일 빌미를 제공하죠.). 화자 말로는 식민회사에 고용되었던 시기의 일을 들려주지요. 이야기는 그가 상아 운반배의 선장으로 일하기 위해 처음 아프리카에 발을 디디던 때부터 내륙의 상아 수집상 커츠와 조우한 후, 그 죽음을 목도한 이후 유럽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다룹니다. 암흑의 핵심-아프리카 한복판을 향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말로는 식민주의의 이상과 그 현실 사이의 이물감을 느끼는데요. 이는 그 심연부에 이르러 커츠란 개인으로 집약됩니다. 식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는 자로서 자신에게 도취된 커츠는,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답시고 야만인들로 하여금 식민회사의 배를 공격하게 만들 정도로 미쳐있었죠. 터무니없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밀림에서 죽습니다. 커츠에게 강렬한 동질감을 느낀 말로는 그의 임종을 지키고, 유럽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사후의 뒤처리를 맡습니다. 문학사, 문화사에 있어 ‘오리엔탈리즘’과 ‘식민주의’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전입니다.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 역시 식민주의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며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상당히 중요한 맥락에서 언급하구요. 뭐, 극복하지 못한 게 한계가 되려면 최소한 깜냥이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이하에 펼쳐질 이야기는 그만한 깜냥이 있었음에도 당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콘래드를 위한 변입니다. 먼저 하나하나 인용하여 뜯어보기로 하죠. 민음사본에서 발췌했습니다. [“그들은 30대5의 비율로 백인보다는 수적으로 우세했으니 우리 백인들에게 덤벼들어 한바탕 잔치를 벌였을 법도 한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야…… 게다가 그 검둥이 녀석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망설여야 할 이유란 하나도 없었어…… 나는 검둥이들이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과 마주 서서…… 눈부시게 바라보고 있었네.”](P.93-95) [“아마도 자네들은…… 한 야만인에 대해서 내가 왜 그토록 섭섭해 하는지 지독히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겠지…… (그와 나 사이에)일종의 유대 관계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가 창에 찔린 후 내게 던졌던 그 친밀하고 심오한 눈초리는 마치 어떤 지고한 순간에 확인된 먼 친척 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오늘날까지 내게 생생히 남아 있어.”](P.115) [“나는 기적을 울리는 손잡이를 당겼어. 갑판 위에서 백인들이 한바탕 즐거운 장난을 해야겠다는 태도로 소총을 끄집어내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었지…… <기적을 울리지 말아요. 그걸 울리면 저자들이 놀라서 도망간다구요.> 누군가가 갑판 위에서 불만스럽다는 듯이 소리치더군. 나는 여러 차례 계속해서 기적을 울렸지.”](P.153) P.93-95의 인용에서 말로는 야만인들에게 위화감을 느끼며, P.115에서 조타수의 죽음을 통해 그 야만인의 존재 및 자신과의 관계를 (재)인식하고, P.153에서 백인들이 재미삼아 그들을 죽이려는 것을 막습니다. 이전까지 손에 익은 도구마냥 의식조차 없이 대하던 것들이 자신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죠.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P.153에서처럼 기적을 울리는 행동으로 드러나며, 이야기 속 말로에서 이야기 밖 말로에게 이르는 도상의 성찰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작가 콘래드는 피식민지 야만인을 하나의 타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폭력을 정당케 하는 제국주의의 실체를 작가가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고요. 헌데도 그 종말의 당위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를 해당 작품의 한계라고 규정하며 콘래드를 비판합니다. 그럼 아래에서부터 오만 관심법을 동원해 콘래드가 제국주의의 종말을 당위로 내세우지 않은 이유를 찾아나가 볼까요. [“<원주민들은 커츠가 떠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P.122) 먼저 피식민지 야만인이 도리어 제국주의 지배자인 커츠의 억압을 갈구한다는 러시아인의 말이 눈에 띱니다. 해당 표현이 야만인의 입이 아닌, 커츠의 추종자를 경유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감안해볼 때, (헤겔이 말하는)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릴 법 합니다. 썩 들어맞는 구석이 많아요. 사실 근대라는 시대의식에 이념형을 제시한 헤겔이며, 근대적 이념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제국주의를 주제로 하는 소설 <암흑의 핵심>인 만큼 연관성을 상정할 수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우선 (콘래드에 의해 소설 속에서)커츠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말로를 곱씹어보죠. [“꼬마 시절에 나는 열성적으로 지도를 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거든. 여러 시간 동안 남아메리카니, 아프리카니 또는 호주니 하는 지역을 살펴보면서 그곳을 탐험한 모든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에 몰두했었어. 당시만 해도 지구상에는 많은 빈 공간이 있었다구.”](P.17) [“왜, 있잖은가. 빛을 전달하는 밀사라고 할까…… 그녀는 <수백만에 달하는 무지한 원주민들을 그네들의 그 무시무시한 풍습으로부터 떼어내야 한다.>고 떠들었는데, 결국은 그런 말을 듣다가 보니 정말이지 내 마음이 그만 불편해지고 말더군. 그래서 나는 회사라는 곳은 무엇보다 이윤을 위해서 운영되고 있다는 암시를 해보이기도 했지.”](P.29) P.17의 인용문과 P.29의 인용문을 나란히 할 때 계몽적 탐험가를 꿈꾸던/자기의식으로 가지고 있던 말로가, 그 사이 별다른 지양 과정이 없었음에도 숙모 앞에서 (자신이 꿈꾸던 계몽적 탐험가를 부정하는 투로)회사의 이윤을 추구하는 사원으로서 또다른 자기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하의 인용들에서 말로가(또한 작가 콘래드가) 사로잡혀 있던 이러한 이율배반이 암흑의 핵심 속 커츠에게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나타나죠. [“<그분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인물이지요.>……<그 고장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그분은 다른 모든 교역소에서 수집한 상아를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상아를 보내오고 있지요>……<머지 않아서 그분은 회사의 행정처에서 상당한 인물이 되실 겁니다. 회사의 윗분들이, 왜 있지 않습니까, 유럽에 있는 회사의 이사회에서 그분을 요직에 앉히려고 하지요.>”](P.42-43)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나에게 커츠 씨야말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가장 귀한 직원이며 비범한 사람이므로 회사를 위해서는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장담하더군.”](P.51) 위 두 진술은 유럽 식민회사의 상아 수집상으로서 커츠를 말해주며, [“그러나 그의 정신 상태가 잘못된 결과 그로 하여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의식으로 끝나는 모종의 심야 무도회를 주관하게 하던 시절 이전에 그 보고서가 작성되었음에 틀림 없어.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내가 여러 경우에 듣게 된 바를 근거로 해서 추측하건대, 그 의식은 원주민들이 그에게 바치는 것이었어, 알겠는가? 커츠 씨 자신에게 바친 의식이었다구.”](P.112-113) [“원주민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어. 커츠 씨가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원주민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원주민들에 대한 커츠의 지배적 우위는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대.”](P.132) 여기선 야만인을 억압하는 지배자로서 식인 의식도 또한 치르는 커츠를 말합니다. 주노의 변증법에 따라 갈 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설명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요. 바라보는 이마다 서로 다른 상으로 비치는 분열적인 커츠를 (마치 단일한 작가가 쓴 단일한 소설 속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같이)단일한 자아 내부에서의 자기의식들 사이의 인정투쟁으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은 다음 인용문에서도 발견되는데요.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겁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했던 겁니다. 그분은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비쳤던 거지요…… 그분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이곳 생활을 싫어했다구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떠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는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있던 거예요.>”](P.128-129) [“러시아인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더군. <동료 선원으로서...... 커츠 씨의 명성을 저해할 사실이 있음을....... 감추기 어렵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더듬더듬 중얼거리고 있었어…… <그분은 기선을 공격하면 당신네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여기며 포기하리라 생각했죠.>”](P.143) 서로 다른 자기의식 사이의 대립과 그 교착은 커츠를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으로 이끕니다. 극단적인 대립은 둘 중 하나를 소멸시켜야하는 방향으로 추동되며, 식민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 자신을 끝없이 환기케 하는 식민회사의 수송선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드러나죠. 커츠는 식민회사의 상아수집상으로서의 자기의식을 찍어 누르기 위해 유럽 세계의 뻗친 손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은 일방향에 그치지 않으며, [“예외가 있었다면 그건 마지막 페이지의 밑부분에 써둔 일종의 노트였는데, 훗날 떨리는 손으로 갈겨썼음이 분명한 이 노트는 하나의 방안을 밝힌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지. 그 내용은 단순했어. 온갖 종류의 이타적 감정을 향해 감동적으로 호소하던 글이 끝나는 대목에서 그 노트는 마치 맑은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처럼 나를 향해 그 휘황하고 무서운 빛을 발하면서 <모든 야만인들을 말살하라!>고 부르짖고 있었어.”](P.113) 그 반대로도 작용했음을, 즉 야만인의 지배자로서 자신 역시 부정하려 했음을 P.113 속 커츠의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백인들은 그간 이루어놓은 발전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네들 야만인들에게는 마땅히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하느님 같은 힘을 과시하면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등등의 내용이 바로 그거야.”](P.113) [“바로 그 순간에 커튼 뒤에서는 커츠의 깊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 <나를 구원하겠다구? 상아를 구해 내자는 뜻이겠지. 말 말라구! 나를 구원하겠다니…… 나는 아직도 내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니까. 그러므로 돌아올거요.>”](P.140) P.113의 인용에서 양자 사이의 전도 과정이 보이는데요. 여기서 커츠는 식민회사의 이득 확보란 (주인된)목적을 위한 (노예적)수단으로서 야만인 통치를 말하는 게 아니죠. 야만인의 통치자라는 (노예된)자기의식이 실제 암흑의 핵심에서 야만인이란 사물을 대하면서(노동을 통하여) 자립성을 깨우치고, 식민회사의 고용인이라는 (주인이었던)자기의식을 지양해낸 것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 근거는 P.140의 커츠의 진술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커츠 자신이 정말 관심을 갖는 건 상아를 확보하여 식민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위대한 이념을 말하며, [“<하지만…… 커츠 씨는 회사에 이익을 준 것보다 더 많은 손해를 입혔다구요.>”](P.141) 그 위대한 이념이란 식민회사의 이익과 무관하게 야만인들을 지배하는 것이고 그들을 계몽케 하는 것이란 사실을, 식민회사 지배인의 발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좋아한다구. 그건 자아 발견을 할 수 있는 기회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아는 것인데, 이 실체야말로 다른 사람들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해. 다른 사람들로서는 외양만을 볼 수 있을 뿐 그 외양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법이야.”](P. 66) 콘래드는 P.66에서 말로의 이야기를 통해 상술한 바를 보다 직접적으로 들려줍니다. 노동을 통한 변증법적 자아 발견. 노동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랍니다. 마찬가지로 커츠의 노동 역시 식민회사의 이익이라는 외양이 아니라고 말하죠. 이쯤에서 커츠를 어찌 규정해야할지 망설여집니다. 앞서 언급한 부분을 좀 더 발전시켜본다면, (자본주의의 극단이란 의미의)제국주의적 식민통치의 수단으로서 식민주의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커츠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 서양보다도 약했기 때문에 동양 위를 억누른,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교의이고, 그것은 동양이 갖는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라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에서 우선 벗어납니다. 즉, 커츠가 상아수집상으로서 자신을 부정한 이상,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한 오리엔탈리즘과는 분명 구별되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한편으로, 식민주의란 (사이드가 강조하는 근대적인 맥락에서)오리엔탈리즘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기에 커츠가 오리엔탈리즘에 회의를 품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지요. 무엇보다 야만인들에 대한 지배를 자신의 위대한 이념이라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벗어나긴 어렵습니다. 이 지점에서 위에서 말했던 식민회사를 위하지 않는 커츠의 노동을 떠올려볼까요. 아주 재미난 결론이 나타납니다. 커츠의 이념이란, 그 자체로 합목적적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식민주의라는 것이다. 목적없는 합목적성이 무엇이냐. 아름다움(美)입니다. 우리의 커츠에게 식민주의란 그 자체로 너무도 아름다운 거란 말이죠. 돈을 벌기 위한 식민주의가 아니라 돈을 꼴아밖아도 모자랄 식민주의입니다(P.141의 식민회사 지배인의 말을 떠올려봅시다). 자, 그리고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을 상기해봅시다. 비단 커츠에게만 한정되지 않지요. [“최근 경제사 연구들은 무역과 자본 투자, 제국운영에 소요된 비용 등을 조사한 결과 제국이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제국이 가져다 주는 상상 속의 이득과 실제로 실현된 이익 간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로선 이러한 사실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제국의 경제적 가치가 당연시되었다. 제국주의에 적대적이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조차 제국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대 여러 서구 열강들이 식민주의를 고수했던 추동이 있었다는 진술이 될 뿐, 커츠와 당대의 식민주의를 어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식민주의가 득실을 고려하기 이전에 당대 서구인들에게 이미 각인되어 있었으며 그 자체로 합목적적인 것이었다는 무엇이었다고 상정해본다면 어떨까요. 또한 암흑의 핵심 속 커츠는 단지 특수한 환경에서 특이하게 변형된 식민주의가 아니라 당시 서구 열강들에게 만연해 있던 보편적 식민주의란 이념을 집약한 인물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최근의 경제사적 연구를 알았을 리 없는 콘래드지만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모호한 상이나마 식민주의의 본질을 직시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니, 다른 맥락일지언정 작가 콘래드는 분명 식민주의의 균열을 보았어요. 당대 식민주의자들 중엔 그 효용성을 찬양한 세실 로즈와 같은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죠. 탐험가 리빙스턴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작품 속 주인공의 숙모가 하는 말에서 드러나듯, 도덕적 열의와 계몽적 신념에서 비롯한 식민주의는 당대 만연했습니다. 익히 알만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서 식민주의의 화신 격으로 제시된 커츠가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며, 나이든 말로가 배에 앉아 선원들과 화자에게 이야기를 풀어내기 전부터 커츠는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식민주의의 균열은 말로가 야만인과 느끼는 유대감이나, 그 무리를 향해 울리는 기적 소리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커츠 자신의 신념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나타나지요. 커츠는 식민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 자신과 야만인들의 지배자로서 자신의 뚜렷한 경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가 서로 다른 자기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야만인을 계몽시키겠다는 위대한 이념을 상정한다고 해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죠. 유럽에는 그를 기다리는 약혼녀가 있고, 그를 대중적 정치인이나 사내 고위직에 배치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을 물리치고 그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해도, [“<참으로 그들에게 이익이 될 그 어떤 자질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무한정하게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커츠의 말은 강력한 동질감을 느끼는 말로에게조차 [“경멸할 정도로 유치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그가 상정한 식민주의의 위대한 이념은 유럽에서 설 자리가 없어요. 반대로 실제로 커츠가 시도한 대로 야만인 사이에 남아 유럽과 결별하고자 한다면 그는 다만 야만인 몇몇을 거느린 족장이 될 뿐, 그들을 근대적으로 계몽시킬 방법은 없어집니다. 때문에 커츠의 위대한 이념은 다만 커츠 자신만이 바라볼 수 있는 공상 속에서 그 찬란한 휘황을 내뿜을 따름이죠. 그야말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인, 자기만의 미적인 향유물로 남고 말지요. 그래서 콘래드는 커츠를 죽여야만 합니다. 암흑의 핵심 속에서 커츠는 자기의식과 자기의식의 인정 투쟁 중에서, 자신의 위대한 이념을 상정해가는 변증법적 지양 과정에서 (당연한 귀결로서)식민주의의 틀을 깨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실 로즈와 같은 이들이 말하는 식민주의와, 당대의 탐험가 리빙스턴이나 소설 속 주인공의 숙모가 말하는 이상적인 식민주의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현격합니다. 그리고 커츠는 이 모두를 포괄하는 인물이며, 둘 사이의 극심한 이질성은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대립과, 극단적인 인정투쟁과, 극단적인 지배와 예속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근대적 유럽인의 시각에서 견딜 수 없는 야만인을 말살하라는 커츠와, 전근대성의 극치인 식인 의식을 기꺼이 향유하는 커츠의 공존이 비롯되지요. 둘 모두를 지양하는 방법은 식민주의의 화신인 커츠가 식민주의의 틀을 깨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바란대로 말이죠. 하지만 콘래드는 가장 활발한 식민주의를 펼쳤던 영국인인 커츠가, 식민통치가 가장 활발히 벌어졌던 아프리카, 암흑의 핵심 속에서 식민주의를 벗어날 무언가를 상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았지요. 아니, 가능했냐, 가능하지 않았냐, 콘래드가 그리 생각했냐,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PC는 잠시 접어둡시다. 정말 중요한 건 콘래드가 그려낸 게 가능치 않은 커츠란 사실이고, 이쪽이 당대의 식민주의를 집약하기 훨씬 더 적합하단 겁니다. 지배자로서의 커츠건, 이방인으로서의 커츠건 모두 식민주의에서 비롯합니다. 따라서 식민주의자가 식민지에서 바라보는 야만인이란 억압적 지배나 계몽적 선도의 대상이 될 순 있어도 식민주의를 지양해줄 무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커츠는 죽기 전 말로에게 자신의 위대한 이념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이념이 지시하는 방향은 소설 속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다른 두 자기의식을 지양한 듯 말하는 커츠지만, 정작 그 실체를 알 수가 없어요. 이는 커츠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커츠에게 각각 자신이 바라는 상을 투사하죠. 식민회사 최고의 상아 수집상을, 위대한 사상가를, 대중적 정치인을, 훌륭한 음악가를, 죽기 직전 약혼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로맨티스트를,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할 신의 사도를……. 사람들이 커츠에 대해 하는 말들은 커츠를 설화적 인물로 만들며 그의 실체는 굉장히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요. 거칠게 추상한다면 스스로 상정한 믿음에 자신을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이념적 인간을 상정해볼 수 있겠죠. 커츠는 암흑의 핵심 속에서 이념의 불꽃으로 야만인이 아닌 스스로만 부단히 비춘 겁니다. 마치(란 표현이 적절할진 모르겠지만) 콘래드가 커츠를, 그리고 식민주의를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로요. 시간이 흐른 후 탬즈 강 위에서 고대 로마의 식민지였을 런던을 굽어보는 말로의 시선은, 분명 식민주의의 균열을 바라봅니다. 키잡이의 죽음을 한숨으로 토로하는 말로는, 식민주의 바깥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로는, 말로를 써내려가는 콘래드는 전자-고대의 로마를 주목했을 뿐입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이로서, 근대적 이념에 따라, 시대가 낳은 체제가 균열로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다른 무엇보다 모순적이고, 중요하고, 또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네, 계몽주의자의 감상주의가 참 골때리죠. 근데요, 저도 콘래드에게 동의합니다. 소재를 닦아낸 주제의 희소성으로 보나 저자가 서 있는 지점으로 보나 <암흑의 핵심>은 그야말로 콘래드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구체화되지 않은 이념 속에서도 지시하는 바가 분명히 보이며, 앞서 언급한 수많은 맥락과 함께 놓일 때, 이 소설은 다른 방식으론 되풀이되기 어려운 고유한 울림을 지니니까요. 그리고 여기에 사이드가 말했던 비극적 한계*를 콘래드가 넘어서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요. * “콘래드의 비극적 한계는, 설령 그가 어떤 차원에서는 제국주의를 본질적으로 순수한 지배였고 땅뺏기였다고 명확하게 인식했다고 해도, 거기서 ‘원주민’이 유럽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도록 제국주의는 끝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점이다.” 2
이 게시판에 등록된 팟저님의 최근 게시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