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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29 21:51:14
Name   moira
Subject   더 힘든 독해
독서를 하다가 발견한 말 중에 "더 힘든 독해가 더 힘센 독해이다"(lectio difficilior potior)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뒤의 potior를 빼고 그냥 렉티오 디피킬리오르라고만 쓰기도 합니다. 서양 문헌학에서 연구자가 텍스트의 역사성을 판단할 때 염두에 두는 원칙들 중 하나입니다. '오컴의 면도날'과 함께 두면 칼의 양날, 또는 모와 순처럼 보입니다.

얕은 지식을 무릅쓰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문헌학은 원텍스트(urtext)를 찾아가는 과정의 체계입니다. 성경이나 그리스 비극을 생각해 봅니다. 가장 처음으로 저자가 작성해서 이 세상에 띄워보낸 글이 있고, 그것을 읽고서 펜을 들어 베껴쓰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필사자들이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그 카피본을 보고 베껴쓰고, 또 그 카피본의 카피본을 베껴썼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 남은 것은 사라진 원텍스트의 그림자들뿐입니다. 원텍스트 A가 파생시킨 카피본 1000개가 문서고에 있다면 그 중 한 개는 진짜 원텍스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카피본 1000개를 방사능 탄소 분석기로 돌려서 제일 오래된 양피지를 찾아낸들 그것이 원텍스트라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장 원저자의 의도를 잘 반영한다고 판단되는 필사본을 A'라고 이름붙여 후보좌에 잠정적으로 놓아둘 뿐입니다. 그리고 A'는 원텍스트에 필적하는 세속적 권위를 허용받습니다. 연구자들은 A'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학생들과 일반인들은 양심에 별 가책 없이 A'를 '원문'이라고 부릅니다.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 필사자들은 베껴쓰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수들을 저질렀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에 지친 한 필사자가 텍스트를 잘못 읽었든지 펜이 미끄러져서 for라고 쓸 자리에 from을 썼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카피본을 베끼는 다음번 필사자는 from을 그대로 베껴쓸 수도 있고, 아니다 이건 맥락상 말이 안 된다고 판단해서 for로 돌아가기도 하고, 심지어 엉뚱하게 of로 초월필사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짐작하기 힘든 이유로 원래 없던 단어를 집어넣기도 하고 원래 있던 단어를 빼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주의하거나 자질 없는 필사자들의 손을 타 '타락'해버린 고전 텍스트의 원형을 찾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르네상스인들 가운데 에라스무스가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언어를 전달하는 메신저들은 중간에 메시지를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장 해석의 난이도를 좀더 어렵게 만드는 쪽이 원형에 가까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컨대 I love her for her intelligence와 I love her for his intelligence 중에서라면 후자를 좀더 신경써 줘야 합니다.

"사라진 이스라엘의 옛 부족 수는 9와 2분의 1개이다"라고 적힌 필사본이 있고, "사라진 이스라엘의 옛 부족 수는 10개이다"라고 적힌 필사본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좀더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후자입니다. 상식적으로 부족 수를 0.5 단위로 계산할 리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더 힘든 독해가 더 힘세고 좋은 독해"라는 원칙을 염두에 두고 '읽는 이를 더 힘들고 성가시게 하는' 독해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가상의 원 저자 또는 필사자가 정말로 '2분의 1짜리 부족'이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가능성까지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9와 2분의 1을 10으로 단순화할 확률은 높지만 10을 9와 2분의 1로 복잡화할 확률은 낮으니까요.

물론 이 원칙은 절대 깨지지 않는 법칙이 아닙니다. 탄소 연대 측정을 해봐서 부족 10개짜리 필사본이 기원전 5세기본으로 나오고 9.5개짜리 필사본이 기원후 15세기본으로 나온다면, 도중에 원텍스트가 왜곡된 무슨 변고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지요. 또한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창조적 감흥에 도취된 스페인의 에케 호모 벽화가와 같은 돌발적인 존재는 나타난다는 것도 고려해야겠지요.

저는 이 원칙을 일종의 넓은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독해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 내 상식과 어긋나는 문장들,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치를 떨게 만드는 발언들이 사실은 '실체'에 좀더 가까운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많은 문과생들이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복잡하고 위태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가능한 한 소거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누군가의 골머리를 썩이게 될 것이라고.

이것이 '인간 중심적 사고', 인간의 정신 양태와 그 활동 양상이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변하지 않으리라고 가정하는 사람들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집착하는 것은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일 수도 있고, 세계의 진화를 방해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순간 우리는 정말 결단을 내리고 과거(원텍스트)와, 그 과거로부터 추정되는 미래와 과감히 단절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결단을 거부하는 결단도 가능하겠죠. 저는 원텍스트를 향한 열망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광주의 진실 A에 우리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A'는 가짜이며 B가 팩트다"고 말하는 주장들을 오컴의 면도날로 쳐내야 할지 lectio difficilior의 영역으로 인정해야 할지,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원텍스트 A를 갈구하는 발화자의 열망의 정도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힘든 독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 표현하자면 '호의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한윤형 같은 키워가 전형적으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런 타입이었습니다. 논쟁하는 상대의 의도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고 가능한 한 그 의도 내에서 상대방의 텍스트를 해석, 해체하는 노고를 일부러 떠맡는. 상대방의 가장 약한 고리를 골라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논지 중 가장 강하고 힘센 부분을 논쟁의 핵심으로 선택해 링 위로 끌고 오는 것이 옳다고 믿는 타입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링이 만들어지는 경우 자체가 극히 희귀하고, 논쟁 상대방은 언제든 더티한 술수를 쓸 수 있으므로, 만일 만들어진 링이 있다면 구경꾼들은 반드시 그것을 보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원텍스트는 무엇이었을까? 뇌과학에 관한 짧은 동영상을 봤습니다. 인간의 뇌가 장애를 입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니, 겉으로는 장애가 없어 보이는 인간의 경우에도 뭔가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입밖으로 발화하기까지, 또는 자판으로 치기까지, 그의 몸속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수히 작은 필사가들의 손에 무수한 필사본들이 차례차례 만들어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보들이 사라지고 변형되고 단순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손실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거나 복원하는 기술을 어느 선까지 수긍해야 할지, 이미 훼손된 데이터를 자유의지의 결과물로 받아들이고 '정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에 대한 의심을 소거하지 않은 채 실수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것에 어느 정도로 만족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p.s.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돌아와요 외로운 홍차항에

p.s.2
저기요! 이딴 생각을 하는 인간은 자문단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저는...



10
  • 자문단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다른의견도 존재해야지요. 그러므로 자문단으로 등 떠밀기 위해 추천!!
  • 수 많은 글자속에 숨겨진 수 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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