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캐롤 캐롤. 영화는 보았는데 저가 얼이벌이해서 영화관에 늦게 입장하는 바람에 몇 분을 그만 놓쳤습니다. 초반 몇 분만 클립으로 떠도는 게 없을까 한참 찾아봤는데 안 보이더군요. ㅜㅜ 영화를 온전히 못 본 셈이니 확신할 수는 없는데요. 저의 생각은...
아무래도 퀴어영화다 보니 평론가들이 어느 정도 보너스 점수를 준 부분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거품은 아니고요. 너무 섬세한 영화라서 오히려 단조로와 보일 수도 있는데, 그건 엄격하게 통제된 고전극이 현대인의 감수성에 맞지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 같습니다. 그럼에도 여성 관객들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지점들은 분명히 있어요. 지적하신 남자친구에 대한 테레즈의 (겉으로 보기엔 \'어장관리\'적인) 태도를 납득할 수밖에 없다는 것, 테레즈는 남자에게 끌리지도 않고 그들의 구애가 귀찮기만 한데 정작 남자를 보호자로 두지 않으면 원하는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학교라든지 아무 곳에도 적을 두지 못한 사진작가 지망생이 뉴욕의 예술가 서클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거니까요. 게다가 당시가 무려 1950년대라는 점을 떠올려 보시면 그녀가 남친의 비난을 뿌리치는 게 얼마나 과감한 행위인지, 테레즈에게 공감의 초점을 맞추는 쪽이 맞는 듯해요. 또 테레즈가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단서는 전혀 없어요. 아마도 작품의 전개상 대충 이용해먹고 버리겠다는(?) 생각이었을 걸로 짐작됨...
캐롤이 빈 총을 쏘는 장면은 테레즈와 캐롤 사이에 구축된 멜로적 환상에서 불필요한 거품이 빠지는 장면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위엄 있는 캐롤이 남성의 세계(총은 남성이죠)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것, 비록 테레즈와의 관계에서는 남성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도 여성이고 테레즈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니까요. 만일 캐롤의 역할을 남성이 맡는 시나리오여서 통상적인 남녀의 불륜여행이었는데 빈 총을 쏘았다면 그건 거세된 남성의 무력감이겠지만, 여성인 캐롤에게 총은 애초부터 빈 총인 거죠. 그래도 캐롤은 쏘아야 해요. 그 스파이 녀석은 진짜 총 맞을 만한 놈이었죠.
테레즈가 캐롤에게 끌리는 것이 단순한 걸크러시인지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지 조금씩 헷갈리면서 미묘한 감정의 줄타기를 따라가는 쾌감이 좋았어요. 영화를 보고 나니 이동진 씨가 구설수에 올랐던 이유를 알겠더군요. 이동진은 영화를 좀 잘못 읽었고 무리하게 꿰어맞추려다 실패한 부분이 많았어요. 보는 사람의 성적 지향에 따라(그리고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에 따라) 평가와 분석이 달라지는 영화란 것은 분명하지만, 저는 확실히 좋았어요. 다시 보고 싶은 영화네요.
팟캐스트 잘 들을게요!

덧붙이자면 청혼은 리처드가 했고, 청혼에 대한 확답은 동반 유럽 여행 여부인 것이죠. 테레즈는 아직 확답을 안 하고 고민하는 상태고요.
이용해먹고 버리겠다기보다는, 리처드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고, 리처드 쪽에서 열렬하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니까 그냥저냥 사귀고는 있는 상태죠. 이런 커플 뭐 흔하죠. 한 쪽이 청혼하고 상대방이 고민하다가 더 좋아하는 사람 생겨서 거절하는, 흔하디 흔한 흐름이라 이게 왜 문제인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유럽 간다고 확언한 것도 아니고, 안 갈 수도 있다고 꾸준히 어필해오기도 했고.. 오히려 50년대에야 문제시 될지 몰라도 결혼조차 잘 안 하고 동거와 자유연애 선에서 관계가 끝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현대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죠.

테레즈가 우는 건 자신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캐롤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자책하는 것이지요. 이건 인지상정이라 봅니다. 사실 이것도 다른 해석의 여지가 전혀 없어서 논란이 될 장면이 아니라고 생각하네요.

아 Moira 님 정말 감사합니다.
[테레즈는 남자에게 끌리지도 않고 그들의 구애가 귀찮기만 한데 정작 남자를 보호자로 두지 않으면 원하는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당시가 무려 1950년대라는 점을 떠올려 보시면]
이 말은 남자+이해심이 적은 저로썬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좀 크게 깨닫게 되네요.
빈 총을 쏘는 장면은 굳이 왜 넣었을까 싶을정도 였었는데 남성적인 역할이었지만 그녀도 여성이고 테레즈와 다를 바 없는 사실이라는 설명이 이해가 되네요.

계속 논리로만 이해하려고 고민하고 생각했는데, 이게 제가 가진 생각 (또는 여성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는 성별) 에선 불가능한 느낌이듭니다.
덧글 정말 감사합니다. 이동진 평론가 말씀도 좀 공감이 가네요.
이제 조금씩 의문되었던 것들이 풀립니다.

오 여기서 조금 갈리는 거 같네요. 테레즈가 \'리처드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싫은 것도 아니고\'... 저는 테레즈가 리처드를 싫어했다고, 적어도 진지한 연애 상대로 보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멜로물에 도덕적 가치판단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무리지만, 무리하게 들이대자면 테레즈는 욕먹을 짓을 한 것은 맞아요. 관계를 유지할 의지가 없을 때는 끝내는 게 깨끗하지요. 본인이 레즈비언으로서 자각이 있었든 없었든, 리처드의 구애에 대해 테레즈가 냉담한 어장관리로 답한 것은 확실하다고 봐요. 영사기 옆에서 남자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을 때라든가 키스를 받았을 때 테레즈의 태도에는 아무런 기대나 떨림이 없었고 오히려 귀찮은 표정과 반응을 보였어요. 그런데도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이동진 식으로 해석해서 \'이 관계가 어쩌면 발전해서 테레즈가 결국 그를 사랑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함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숟가락을 잠깐 얹었다 가도 문제 없지 않을까 하는 뻔뻔스런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테레즈는 순진한 구석도 있지만 자기만의 욕망과 야심을 가진 캐릭터지요. 가난 때문에 비굴하지도 않고, 구내식당에서는 조이스를 읽고, 백화점 직원을 오래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상사의 눈치도 무시하고 캐롤의 전화를 받다가 상사한테 메모지 좀 달라고 당차게 요구도 하고요. 그런 여성이 자기 연애의 실상을 분석할 줄 모른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테레즈가 자의식이 강한 인물이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만, 명확한 자기이해 속에서 타산을 차릴 정도로 주관이 명확하게 서 있는 인물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자의식이 강한데 주관이 서 있지 않은 것은 모순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그맘때 내향적/지적/감수성이 풍부한 이들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네요. 통속적 가치에 휩쓸리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의 특유성을 고수하고 싶어하지만, 경험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없고 자신감도 결여되어 있어 명확하게 현실과 자기 인식을 하지는 못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선택들을 하게 되고요. 그것이 자격지심으로 이어지고.

실제로 테레즈는 자신이 무얼 주문해야할지 판단하지 못하여 맥없이 캐롤과 같은 것을 시키고, 담배 잘 피우지도 못하면서 담배 권하는대로 피우고(영화 막판에 가선 캐롤이 담배를 권해도 거부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입하는 캐롤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내적인 열망과 의식은 있지만, 막상 크리스마스 트리를 딸과 함께 캐롤이 장식하고 있을 때 테레즈는 손님 답잖게 상을 차리고 있지요. 보다 결정적으로, 캐롤이 도청당한 직후에 테레즈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은 \'나는 항상 수락하기만 하는 것이 문제다\'라는 말이지요. 주관없이 캐롤에게 이끌리는대로 끌려갔다가 캐롤에게 폐를 끼치게 된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는 테레즈가 캐롤과의 관계에 대해 스스로 명확한 자기인식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지금 뭘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그저 처음 경험하는 감정에 뭣도 모르고 좋기만 해서 끌려갔는데, 그렇게 뭣도 모르고 끌려만 가다보니 자신과 주변을 파괴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이겠지요. 자기 스스로 확실하게 사리분별을 해서 행동한 사람이라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 아닌가 합니다.

즉, 테레즈는 자신 및 그를 둘러싼 상황과 조건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며, 스스로도 그에 대해 컴플렉스를 강하게 느끼고, 이로 인해 강한 욕망(성장욕, 자립욕)을 느끼는 인물로 볼 때에, 전체적인 인물 묘사가 일관성 있게 통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내적 욕망과 실질적 역량의 불균형이 테레즈의 내적 갈등을 이루는 것이겠지요. 자기 힘으로 걷고 싶지만 미약하고 자기 주관이 안 서 있으니 내내 흐름에 떠밀려가기만 하고, 역설적으로 그런 자신이 불만스럽고. 저 나이 때 흔한 유형의 사람들이죠.

이는 리처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관계를 정리해야한다든가, 이것은 내가 리처드를 이용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든가는 것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만큼의 자기 관계에 대한 영악성과 이해도가 떨어지지 않나 싶거든요. 원작에서도 테레즈가 리처드에 대해서 딱히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싫지는 않고, 사랑이란 것이 뭔지 모르겠고, 잠자리는 같이 하지 못하겠고, 그래도 리처드가 적극적으로 구애하니 일단 잠정적으로 관계를 받아들이고 있는 정도로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물론 영화와 원작은 다르지만, 영화에서 원작에 노출된 리처드에 대한 테레즈의 생각을 부정할 정도로 이반되거나 상충되는 묘사는 없지 않나 싶고, 오히려 연속성이 강해 원작의 관점을 그대로 채택하더라도 위화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테레즈의 자의식으로 말하자면 원작 쪽이 더 강렬하고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기도 하고요(꽤나 까칠하기도 하고 캐롤과 리처드에 대한 열등감도 강하죠).

그야 테레즈가 보다 면밀히 자기 인식을 해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지 말았다면 정답이겠지만, 애초에 자신의 성정체성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이에게는 어려운 기대가 아닌가 싶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사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이 적극적이어서/관계의 선을 정리하는 것이 익숙치 않아서/연애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워낙 흔하기도 하고, 저연령층이나 연애 경험이 드문 이들은 더욱 그러하니까요. 물론 테레즈의 이러한 일련의 태도들을 기만(자신 및 타인에 대해서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제가 보기에는 미숙함에 무게를 두는 편이 더 적절치 않나 싶습니다(19세에 불과하기도 하고, 애초에 캐롤이 첫사랑 수준..).

아, 테레즈가 타산적인(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과 그녀의 마음 상태를 추측하는 것, 두 가지를 제가 좀 혼용해서 쓴 것 같아요. 저는 테레즈가 보이는 태도를 단죄하거나 변명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뻔뻔스럽다\'고 불러도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구밀복검님의 리플을 읽고 나니 좀더 세밀하게 언급해야 할 것 같네요. 사후적으로 관객이 볼 때 \'뻔뻔스러운\' 거죠. 테레즈가 남친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아무리 어린 여자아이도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의 욕망을 잘못 이해할 수는 없어요. 그에 대해 끊임없이 답을 유예하는 것이 비난받을 짓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감독은 테레즈에게 버림받은 리처드와 캐롤에게 버림받은 하지 두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이 가련한 사람들은 자기 여자(라고 믿었던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동성애는 질병이라고 생각했을 50년대 평균적인 남성이지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은 받기는 해야겠죠..

그런데 테레즈의 수동성과 자격지심에 대한 근거로 들어 주신 예들 말이죠, 그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해요. 식사 메뉴를 시킬 때 캐롤을 따라하는 건 단순히 외식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메뉴판을 처음 봤기 때문이겠죠. 만일 테레즈가 진짜 캐롤에게 자격지심이 있었다면 그 자격지심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메뉴를 시켜서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지 않고 캐롤을 따라한 건 식사 메뉴 따위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죠. 담배도 마찬가지, 사랑하는 사람이 권하는 건 다 해보고 싶은 거고, 그건 수동성의 증거라기보단 새로운 걸 배우려는 적극성에 가깝죠. 캐롤 집에서 손님 처지에 다과상을 차리는 것도 자의식 강한 여성이 주눅 들어 있는 상태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죠. 만일 그랬다면 \'야 이거봐라 내가 어리고 가난하다고 날 무시하고 이런 일을 시켜...\' 하는 마음이 먼저 들 거고, 그 내적 혼란을 묘사하는 장면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남녀 사이에서 계급차 때문에 흔히 일어나는 상황, 연상의 부유남이 어리고 자존심 강한 처녀를 유혹할 때 흔히 보이는 티격태격하는 상투적인 전개는 여기서 완전히 소거돼 있습니다. 그러니 테레즈의 미숙함을 이야기하려면 오히려 다른 것을 이야기해야 좋을 거 같아요. 자기 때문에 상처받을 어리석은 리처드에 대한 인간적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이라든가.

테레즈가 \'나는 항상 수락하기만 하는 것이 문제다\'라고 후회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건 사실 좀 핵심을 비껴난 대사예요. 테레즈는 \'지금까지 이렇게 머리가 맑은 때가 없었다\'고 단언하면서 캐롤과 여행을 떠나죠. 캐롤과의 관계에서 테레즈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수동성은 테레즈 자신이 원해서 맑은 머리로 선택한 거였죠. 남친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수동성은 테레즈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50년대 미국 사회의 억압적인 젠더 구조가 테레즈의 필사적인 몸짓(나 남자 싫거든... 키스 싫거든...)을 이해하고 식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드러날 수 없는 것이고요. 테레즈의 그 대사는 마치 \'내 팔자가 그런데 누굴 탓하랴\' 하는, 많은 여성들이 체념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상투적인 대사처럼 들렸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사랑의 궤도가 무너져 출발점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자존심 강하지만 어떤 정치성도 갖고 있지 않은 여성이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하는 ugly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캐롤의 남편은 ugly했죠)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봤습니다. 실제로 이 파국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캐롤이지 테레즈 책임이 아니죠. 아주 산문적으로 그 대사의 의미를 전달하자면 \"캐롤 이 나쁜X\" 이어야 할 거예요.

원작과 영화는 많이 다른 걸로 알고 있어요. 어떤 블로거가 영화가 원작을 망쳐놨다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봤는데, 저는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네요. 원작에서는 테레즈가 거의 병적인 집착과 열정을 가진 걸로 나온다던데... 그리고 영화 속의 테레즈가 자기 성정체성을 모른다(헷갈린다 또는 학습해 간다)는 건 이동진 씨가 퍼트린 헛소문이라고 봅니다. 아니 저렇게 상대를 첨부터 척 알아보고 침대에 뛰어드는 데도 주저함이 없는 여자가 어떻게 자기 성정체성을 모른다는 말인지...;; 최소한 남성에게 끌리지 않는 여성임은 아주 초장부터 나오거든요.

넵 여성이구요. 뭐랄까 사실 더 큰 문제는 당장 술자리 분위기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거였어요. 내가 불편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반응하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뽀뽀를 확 해버렸을 때 그 장면에 놀라 반응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였던 거죠. 내 머릿속에선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남았지만 동석했던 남성들의 머릿속에 과연 그것은 어떻게 재구성되었을까? 그저 돌출적인, 기억에 남길 가치가 없는 술자리 해프닝으로 쉽게 지워졌을 거예요. 그들의 눈에는 그 남성분의 스킨쉽 시도가 너무 일상적인 것이어서 그 자리라고 특히 유별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을 거거든요. 제가 크게 짜증을 내거나 했으면 \'형 술 많이 취했네 그만 갑시다\' 정도가 최대치의 반응이었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렇게 짜증을 내서 나 자신을 ugly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죠. (지금은 짜증 많이 냄...) 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술자리에서 남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평가하고 기억해두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토드 헤인즈는 말하자면 이 서클의 술자리에서 나의 상태를 눈치채고 기록해준 특별한 사람 같은 거죠. 캐롤이나 테레즈가 늘 당하던 일도 그런 일이었겠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람들의 사고회로에서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무표적인 현상이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상, \'나는 누구누구를 사랑하고 사랑받는다\'고 이 놀라운 사건을 만방에 선언하고 축복도 받고 싶잖아요? 캐롤과 테레즈는 여행을 하고 모텔에 숙박하고 사랑의 기운을 있는 대로 뿜어냈지만 영화 속에서 그 관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랑에 크건 작건 적대적인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어요. 남편, 도청꾼, 변호사들, 옛 애인 애비... 테레즈나 캐롤이 당시의 레즈비언 소사이어티에 속해 있었다면 그 속에서라도 인정을 받았을 테지만, 두 사람은 그러지도 않았죠. (테레즈가 자기에게 접근하는 레즈비언을 거부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테레즈가 목격했던 당시 전투적인 레즈비언들의 복장과 이들의 복장이 얼마나 다른지...)
영화 전반에 걸쳐 화면이 부옇게 떠 있더군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희박한 공기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는지, 그것을 죽이지 않고 포착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성취인지, 저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자격지심이라는 어휘를 제가 쓰는 바람에 대화에 있어 혼선을 야기한 것 같네요. \'소심함\', \'자존감 결여\' 정도로 정정하겠습니다. 후반부 이전까지의 테레즈는 자신의 개성과 특별성을 확보하고는 싶지만, 실제로는 내적인 경험적 역량이 부족하고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항상 흐름과 외부에 끌려가는 인물이라는 것이 제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런 유형이 많이 보이지 않나 싶고,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반발적인 아집, 무기력한 순응, 자의식과잉적인 자학, 편한 상대에 대한 신경질적 공격성, 특정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숭배와 확신, 파트너에 대한 의존, 자기 존재 무시에 대한 강한 심리적 저항, 결단에 대한 우유부단함 사이를 오가는 모순성(하지만 표면적인 모순일 뿐이며, 그 모두는 자기확신에 대한 결여와 그에 대한 갈망이라는 심층적 일관성으로 수렴되는)을 보이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테레즈도 마찬가지라고 보았습니다.

위의 맥락에서, 단순한 외식 경험의 결여나 연인과의 경험 공유라면, 물론 감독이 그런 것을 의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본다면 별로 매력없는 구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에서 볼 때 그 장면이 멋들어진 이유는, 상호 주관적 감정의 교류와 객관적 상황의 괴리 사이의 분열성입니다. 두 사람 간에 열망은 이미 넘쳐나는 상황인데, 첫 대면이라는 특성과 둘 사이의 정체성/개성의 차이(캐롤의 능숙함과 테레즈의 미숙함 등)가 어색함을 낳고, 어색함은 의미가 중요하지 않은 대사들에 의해 강화되며, 이렇게 감정적/주관적인 끌림과 상황적/객관적인 거리감이 상충하고, 그 사이에 침묵과 응시가 밀도 깊게 연출되면서 묘한 긴장감과 감정적 고조를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범죄를 공모하듯이 말이죠. 그렇게 포르노스러움이 아니라 로맨틱함이 느껴지고요.

캐롤 집에서 상을 차리는 장면도, 캐롤이 특정한 행위를 권유/명령하고 테레즈가 그에 따르는 명료한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냥 테레즈가 알아서 한 것이라고 볼 때 자연스럽다 싶네요. 강한 자의식(젊은이의 허영심이나 자기 과대 평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지만)이 약한 역량 및 자존감과 결합되었을 때 이런 일은 쉽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새로운 환경이나 조건, 관계를 맞이하는 경험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죠(ex 대학의 새내기나 군대의 초임병이나 회사의 신입사원, 연애관계에서 더 사랑하는 쪽이나 더 경험없는 쪽).

\'지금까지 이렇게 머리가 맑은 때가 없었다\'는 말은, 리처드와 언쟁하던 도중 \'너님은 맛탱이가 간 듯ㅡㅡ\'라는 리처드의 말에 대해 즉각적으로 맞받아칠 때 나오지요. 해서 저는 이것을 감정적인 찬 대사이며, 특별히 무게감이 있다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사로 보지 않았습니다. 언쟁 과정에서 반발심 때문에 본심 이상의 말을 하게 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생각했네요. 설혹 이러한 저의 인상을 배제하고, 이 대사에 무게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습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남자친구에게 \'남자와 관계를 가진 적 있느냐.\'\'그런 것에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커밍아웃을 하기 전 예고일까요. 테레즈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입장이 확고하고 리처드에 대해서도 자신의 태도가 명확하며 그것이 어떤 결과로 향해가고 있는지도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계속 리처드와 기만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든가, 반대로 바로 결별로 점프하거나 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렸겠죠. 제 경우에는 저 대사에서 테레즈의 혼란을 읽어내는 쪽이 자연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원작 같은 경우에도 테레즈는 자신이 리처드와 잠자리를 가질 때 왜 거부감이 드는지 잘 모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 수준이 모호한 상태입니다. 무대 디자이너로서 예술가의식을 포함한 전반적인 자의식은 오히려 영화보다 더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정리하자면, 테레즈가 자신과 리처드 및 다른 남성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어렴풋한 자기기만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명증하게 내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캐롤과 여행을 간다는 것 역시도 강렬한 감정적 충동을 실행에 옮긴 것일 뿐 그것이 낳는 결과에 대해 모호한 판단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며, 캐롤과의 서부 여행이 리처드와의 관계의 종료를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모호한 인식이었을 것이라고 보며(그러니 고작 말다툼 수준의 투박한 대처가 나오는 것일 테고요.), 그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에 대한 상 역시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확한 상황 인식과 플랜을 갖고 행동했다기에는 지나치게 미숙하지 않나 싶거든요.

성애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결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은 그렇게 거침없이 격렬한 잠자리를 가지지만 영화 내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가지지도 않고, 이후에 남자와 자기도 하죠. 그에 대한 에마의 힐난에도 \'잘 모르겠어\'라고 일관하고요. 오히려 그 감정적/육체적 적극성이 상황에 대한 이성적 이해의 부족이나 관계와 상황에 대한 사려 부족과 맞물리면서 아델이 성장과 관계 진전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더 잘 부각시켜주지 않나 싶습니다. 이외에, 아마도 판타지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경우도 그 적나라한 베드 신을 찍기 전에 주인공 양자는 이전까지 동성과 잤던 경험이 없던 것으로 나오죠. 그런 묘사를 어떻게 할지는 감독이 하기 나름이며, 그로부터 결정적인 단서를 항상 읽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캐롤과 테레즈의 첫 성애 장면은 그리 힘을 준 장면인 것 같지도 않고요. 그저 가벼운 낭만적 묘사를 정석적으로 보여주고 넘어감으로써 관객이 모두 예상하고 있던 정해진 수순을 무난히 밟은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미 감정적 흐름은 다 갖춰져 있는 상태였고, 베드신은 그 흐름 속에 자연히 넘어가는 장면이지 그 자체로 전복적 효과를 가지는 장면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원작에서도 테레즈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진 않지만 캐롤과의 잠자리에서 딱히 망설인다거나 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이 부분은 제가 100%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진 못합니다만.).

반론으로만 점철된 댓글이 된 것 같아서, 제 나름대로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자면....저는 원작부터 보고 영화를 봤지만 영화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인물 묘사라든가 감정의 여운 등이 영화 쪽이 훨씬 섬세하거든요. 일정 시기 이후부터 테레즈를 애송이 아마추어 취급하는 원작의 설정보다는, 애정은 넘치면서도 예의를 지키며 어느정도 심리적 거리감을 두는 영화의 캐롤이 양자 간의 사랑의 불안정성을 묘사하는 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진중한 느낌도 나고요. 게다가 원작에서는 캐롤이 불과 몇 달전에 애비와 관계를 가지며 처음으로 동성애를 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그보다는 영화처럼 경험이 많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쪽이 낫지요. 마찬가지로 덜 소심하고 투정 심하며 나 예술가입네 설치고 다니는 소설의 테레즈보다는, 내향적이고 말수적고 외적 수동성과 내적 능동성이 공존하며 내밀한 욕망이 사진 촬영으로 암시되는 영화의 테레즈가 훨씬 깔끔하다고 보고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원작의 경우 재밌고 흥미로운 스토리일 뿐 문학으로서 상급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 정도 수준의 소설은 많다 싶습니다. 50년대라는 혁명성은 있겠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소재의 차원에서나 그런 것이지 형식적 차원에서 특출날 것은 없지 않나 합니다. 반면 영화판은 영화라는 매체가 아니면 시도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나는 오리지날이지요.

스스로 쓰고도 마음에 안 들어 재고해서 몇 마디 덧붙여보자면, 테레즈는 한 마디로 \'바보 취급 받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볼 때 저는 가장 편안한 감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식당 같은 경우도, 알지도 못하면서 이상한 것 주문했다가 바보되기 싫으니까 캐롤을 따라서 주문했다고 보는 것이고요. \'전 이런 데 안 와봐서 잘 모르겠는데 좋은 걸로 주문해주시겠어요?\'라는 솔직한 방법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기 싫어서일 테죠. 이런 데 한 번이라도 와봤고 메뉴를 어디서 귀동냥이라도 했으면 아는 것만 시켜서 스놉질(아집의 형태로 드러났을 때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겠죠)이라도 했을 텐데, 아예 경험이 없는 상태인지라 캐롤과 같은 것으로 주문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에서는 최선의 자기방어로 보였겠죠. 리처드와 가진 다툼 같은 경우도, 자신이 리처드와의 관계 및 캐롤과의 관계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명확한 판단을 하고 있지 못한, 미숙하고 생각없는 사람이라는 약점을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처신에 서툴고 그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스스로에 대한 환상으로 덮곤 하는 이들이 객관적인 현실과 대면하여 자신의 서툰 구석이 노출될 때 으레 자기방어(및 자기기만)를 위해 과도하게 자기 확신을 가장한다든가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딱 그런 사례라고 느꼈습니다. 그만큼 동정이 갔고요. 그건 우리네의 과거 모습이자 현재나 미래에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려운 측면이니까.

잘 읽었어요. 써주신 글에서 납득되고 동의할 수 있는 지점들과 약간 갈리는 지점들이 복잡하게 분포되어 있는데, 저와 구밀복검님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테레즈를 \'인생을 알아가며 성장하는 미성년\'으로 간주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아닌가요?) 저는 테레즈가 영화 속에서 근본적으로 성장/변화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초반에 제시된 테레즈의 캐릭터에서 그의 행동과 심리, 성적 지향이 뻗어나갈 수 있는 최대치를 먼저 산정하고 풀어나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테레즈의 소심함에 관해 이야기해주신 문단에서 나열하신 특성들, 아마도 유아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특징들은 미성년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네이버에 댓글을 열심히 다는 노년층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지요. 제 생각에 테레즈의 미숙함의 모든 징표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녀가 캐롤을 얼마나 \'더\' 사랑하는 약자인가에 대한 징표인 것이지, 아직 \'덜\' 성숙한 그녀가 장차 인생에서 채워나가게 될 빈 공간은 아닙니다.

일단 캐롤과 테레즈의 첫 외식 장면에 관해서, 테이블 위에 떠다니고 있을 두 사람의 열망과 긴장감을 눈에 보일 정도로 가시화시킨 감독의 역량은 정말 훌륭했어요. 여기서 테레즈의 찰나의 망설임이 가져오는 미약한 서스펜스(그녀는 과연 어떤 주문을 하여 위기를 모면할 것인가?)와 그것의 미약한 해소(같은 걸로 주세요)가 이어지는데, 이 조용한 서스펜스가 그토록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말하자면 그 장면이 어째서 그렇게 멋들어진 것일까 하는 질문을 하셨는데요. 구밀복검님은 객관적 상황(원심력) 대 감정적 끌림(구심력)의 분열, 그리고 그 분열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두 캐릭터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셨는데,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 인물이 여성이라는 것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캐롤이 남성이라고 가정하고 똑같은 상황을 영화로 연출했다면 이 서스펜스가 과연 그같은 울림을 줄 수 있을까 하면 그렇지 않다고 보거든요. [범죄를 공모하듯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런 분위기는 두 여성의 비밀스런 사랑에 대한 합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 두 사람의 계급적 차이나 사회성의 차이에서 산출된 것은 아니지요. 두 사람 사이에서 넘쳐나는 호의의 감정과 동질감, 느긋함이 서스펜스를 로맨스로 바꿔놓습니다. 캐롤은 분명 테레즈가 제대로 주문을 못 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 대처 없이 기다리기만 합니다. \'여기는 이게 맛있어요\' 라든가 좀더 친절하게 가이드할 수도 있었을 텐데. 테레즈가 같은 메뉴를 선택한 건 이렇게 무지의 공간에 (시험대에) 던져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액션인 거죠. 뭘 먹든 상관없고 메뉴를 선택할 시간이 아깝다는 선택을 한 거죠. 만일 캐롤이 남성이었다면 이 첫 외식에서 테레즈는 비굴한 사랑의 약자로 보였을 거고 캐롤은 무매너남으로 비쳤을 테지만, 둘 다 성적으로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점이 그런 인습적인 젠더 판단을 일단 정지하도록 요구하죠.

캐롤의 집에서 테레즈가 차를 내오는 장면에 관해서, 일단 테레즈가 먼저 알아서 상을 차리려고 나섰을 것이라는 말씀은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그런데 테레즈가 그렇게 한 것이 소위 \'알아서 긴다\'고 하는 부류의 행동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트위터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도 꽤 논란이 되었던 것인데, 테레즈의 노예근성설 신분차이설 사랑의힘설 등등... 그 장면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찻잔을 만지는 손이 먼저 클로즈업되어서 저는 그게 당연히 캐롤(이나 가정부)인 줄 알았거든요. 카메라가 올라와 얼굴을 비추는데 테레즈인 걸 보고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테레즈가 쟁반을 들고 돌아서자 부엌 뒤쪽 거실에서 캐롤이 딸아이와 트리 장식을 하고 있는 미장센이었던가 그래요. 캐롤이 남자였다면 도저히 넣을 수 없는 장면이었을 거예요. 레스토랑 장면이나 이 장면이나 테레즈가 캐롤에 비해 더 사랑하는 약자임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건 자존심 강한 여성이라면 결코 남성에게 보여주지 않을 모습들을 동성에게 허용하는 모습으로 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집친구나 남자 동료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관대함과 헌신성을 집친구의 나이드신 어머니나 여자 동료들에게는 가끔 허용하는데, 그건 내가 미숙한 주체여서가 때문이 아니라 그런 관대함을 약자-동료들과 나누는 일이 나 자신에게 가져오는 기쁨 때문이에요. 적대적 모티베이션이 없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서로 얼마나 강한 유대관계를 맺는지 생물학과 인류학이 잘 증명해 주고 있지요.

저는 초보적인 걸크러시 정도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지만, 만일 제가 여성을 사랑한다면 남성에게는 결코 허용하지 않을 온갖 행동을 할 자신이 있어요. 그런 행동들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들은 여성 대 여성 관계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거든요. 비굴함이 아니라 관대함으로, 미숙함이 아니라 열의로 말이죠. 남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유상의 거래)과 남자가 남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무상의 의리)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저는 캐롤이 그런 테레즈의 헌신성을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아주 잘 이용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테레즈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명확히 알고 있었는가? 저는 이 질문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그닥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질문은 이성애 영화에게는 결코 던져지지 않는 질문이죠. 저는 대학 시절에 내가 레즈비언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잠시 해본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여자를 사귀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거였죠. 결국 사귀지 못해 포기... 당시 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꾸준히 물어보고 다녔어요. 제가 이성애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집친구와 연애할 때도 계속 물어봤어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 시큰둥한 대답을 얻었죠.) 이런 경우 나의 성정체성은 혼란한 상태인가? 하고 자문한다면 저는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상대방과의 공적인 계약과 행위에 의해 나의 성정체성은 사회적으로 분명히 확립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나 스스로는 나의 \'진짜\' 성정체성을 확신할 수 없을 거라고, 굳이 확신할 필요도 없다고 말이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이성애자 또는 동성애자라고 부를 때 그것은 느슨한 가족유사성의 지칭과도 같다는 것, 그리고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사회적 의제로 삼고 나서지 않는 이상 그의 성정체성의 진위와 순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

영화 속에서 테레즈가 캐롤에게 반한 순간부터,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의식적으로 확신하든 하지 않든 레즈비언으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테레즈가 아직 \'진짜\' 레즈비언이 아니다, 이제 드디어 \'진짜\' 레즈비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캐롤은 상대적으로 레즈비언으로서 성정체성이 명확하다고 이야기할 때 들 수 있는 근거는 그녀가 애비와의 관계에서 레즈비언 성애의 경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테레즈가 캐롤만큼 나이가 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의 이력을 다 살펴보고서 그녀를 레즈비언으로 인정하는 프로세스를 밟아야 할 것인가? 아니겠죠...

이 영화의 주제가 주인공 스스로 레즈비언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는 \'레즈비언 성장기\'가 아닌 이상, 테레즈의 성정체성 자각 여부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해석을 겉돌게 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이성애 내러티브에서는 연애가 소년을 성장시키지만 동성애 내러티브에서 소년/소녀는 성장하지 않아요. 이성애 성장물의 주인공은 연애를 통해 세계가 넓어지지만 동성애(특히 레즈비언 동성애)는 그런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않거든요. 그러나 이 영화가 비동성애자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 영화를 테레즈의 성장기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테레즈가 실연하고 커리어 업그레이드에 성공하고, 성공한 상태에서 옛 연인에게 돌아오는 일련의 진행이 그런 착시를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테레즈가 자기 업글에 성공한 것은 캐롤 덕분이 아니라 캐롤에도 \'불구하고\' 였고 (예술가 서클의 남성 동료들이 큰 역할을 했을 듯),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않았으면 캐롤과 다시 만나는 것은 힘들었을 겁니다. 여성들은 소위 인생의 쓴맛을 겪고 나서 성숙하는 게 아니에요. 인생의 쓴맛을 겪은 여성들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그만큼 사회적 장벽이 높기 때문에.. 테레즈가 어떻게 쓴맛을 극복했는지는 사실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죠. 두 사람의 감정선이 중요한 연애물에서 꼭 필요한 부분도 아니구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거대한 환상과도 같은 멜로의 극치죠.

(테레즈가 찍은 캐롤의 사진이 뉴욕타임즈 입사에 영향을 주었던가? 영화상으로 그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테레즈가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걸로 봐서 그닥 큰 영향은 없었을 듯해요.)

너무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요약하자면 테레즈는 원래 똑똑하고 멋진 레즈비언 아가씨다 입니다 ㅋㅋ

이 글에 댓글을 달고 싶어서 홍차넷에 가입했습니다.
왜 이 작품이 작품상에 노미니만 되고 수상을 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여자의 감정표현을 극대화시키는 영화의 화법이 남성분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낯설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까지는 이런 화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캐롤이 여성이 아니었다해도 테레즈가 캐롤과 연인이 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캐롤이 남자였다 하더라도 끌렸을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이 끌림이 연인으로서의 교감으로 확장되는 모든 사건들은 순전히 캐롤과 테레즈가 여성이기에 가능한 일들 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리니시아님의 글에도 써져있는 기차 안에서 흘리는 테레즈의 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레즈는 아마 캐롤의 고통에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호의가 캐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캐롤의 집을 나서면서부터 울고 싶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승객들이 착석하고 나서야 자리에 숨어서 눈물을 삼킵니다. 많은 남자분들에게는 눈으로 보아도 의아한 이 상황을, 캐롤은 보지 않고서도 이미 알고 테레즈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전화를 합니다. 그리고 테레즈가 바로 사과를 받아들이는 이 암묵적인 공감대는 지극히 여성적입니다.
저는 `왜 캐롤이 이성애자인 나에게도 이렇게 매력적으로 비춰졌을까'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테레즈의 시각을 좀 더 이해해보고 싶었어요. 답은 의외로 캐롤의 남편인 하지를 떠올렸을 때 쉽게 나왔습니다. 캐롤과 하지는 모두 상류층의 사람이고, 고귀한 취향을 지니고 유지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지의 캐릭터는 시종일관 거북합니다. 하지는 캐롤이 자신을 축으로 맴돌기만을 바라고 자신을 떠나려는 캐롤에게 집착하며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는 유아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입니다. 아마 이런 삶의 태도가 지금까지 하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테고, 캐롤의 이혼요구가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충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캐롤은 한 남자의 들러리로 살기를 강요하고 그녀의 여성에 대한 욕망을 거세하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절제하고 그녀의 스탠다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입니다. 그녀가 여자이지 않았으면 하지 않아도 됐을 이런 고민들이 궁극적으로 그녀를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캐롤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적 성의 문제로 캐롤이 남자였다면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매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애비에게 굉장히 많은 눈길이 갔습니다. 그녀의 섬세한 표정과 몸짓이 얼마나 괴롭고 애처로운지는 아마 여성적 감수성만이 깨달을 수 있는 또 다른 영화 속 선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분들에게는 애비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졌을지 궁금하네요.

[테레즈가 캐롤의 집에 놀러가지만, 남편의 사건과 분위기가 안좋아지자 테레즈는 기차를 타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기차에서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이 정말 쌩뚱맞다고 느껴졌습니다.
테레즈가 울만한 근거가 있는 장면이 딱히 없는데 우는 장면이 나오니 지금 나만 이상한건가??? 라는 괴리감 까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 글을 쓰고나서 6개월이 지났습니다. 다시 그때의 감상을 떠올리기가 쉽진 않군요.
심지어 Water님이 말씀하신 '애비' 라는 등장인물이 누군지 가물가물 할 정도군요.

차근차근 글을 되짚어보니 '역대급 호평' 을 받은 작품이라 굉장한 기대감을 가지고 봤습니다.
하지만 제 공감을 사진 못했습니다. (일단 저는 이성애자인 남자 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둘의 첫 대면이 한눈에 빠질 정도의 운명적인건가 싶은 것.
두 번째는 두 여자 모두 각자의 짝에게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하는 모습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라는 느낌에서 공감되기가 어렵더군요.

사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나옵니다. 두 남자가 자신의 아내가 있음에도 서로 밀회를 하죠.
히스레저의 아내는 이혼하게 되기도 하는데 두 사람의 사랑이 꽤나 공감이 가고 이해가 갑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관념의 사랑이 아닌 새로운 그 무언가 라는 느낌마져 들기도 합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히스레저가 오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의 눈물은 동성애자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사회적 통념 때문에 솔직하지 못한 마음에 터져나온 눈물 같기도합니다.
우는 모습을 보던 행인에게 뭘 쳐다보냐며 화를 내는 부분에선 더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근데 사실 이부분이 공감이 가는 이유가 저의 성격적인 부분에 기인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성적인 섬세한 감정이 부족하기에 저렇게 캐롤보단 브로크백 마운틴의 격정적인 연출에 더 마음이 움직인건가 싶구요.

질렐한이 힘들다고 넌 너무 이기적이라고 화를 내는 장면은 가슴아프기 까지 하더군요.
(약 2주 전에 데몰리션을 팟캐스트에서 다뤄야 했어서, 질렐한의 전작을 보던중 브로크백 마운틴도 봐서 기억이 생생하군요)


아마 이건 제 주관적인 성격이 덧붙여져서 이러한 캐롤에 대한평이 나온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공감되지 못한데다, 소위 '내로남불' 이 불편하게 느껴진 모양입니다.
그것도 내가 남자 입장이라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을까? 싶은.. 뭐 그런 감상이 더해져서 이러한 글을 남긴 것 같군요.
(브로크백 마운틴도 내로남불이지만, 저의 취향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뭔가 모순이 좀 있군요??)


'애비' 라는 캐릭터는 사실 캐롤이 전에도 똑같은 사건이 있었겠구나 유추하는 정도의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Water 님의 댓글을 보고나니 굉장히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캐롤과 테레즈.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서 희생되는 두 명의 남자.
그 인물들을 멀리서 관조하고 있는 캐롤의 과거의 애인.
그 자체로도 캐롤과 테레즈의 로맨스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는 애비의 마음이 무게감 있어지는군요.

한참 지난 글인데 긴긴 댓글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

ps. 맨 위에 붉은 글씨로 쓰여있는 본문 부분의 문장은 Water 님이 말씀해 주신 부분이군요.. 확실히 평소 제 성격에서 나오는 무심함이 영화의 감상에 극대화 된 부분 인것 같아보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