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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5/28 19:45:12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단편]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2)




/tag-up

 완전히 위를 보고 누워서 더 이상 몸을 움츠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얼굴이 시
야에 슬쩍 들어왔다. 평소 말이 없던 3학년 선배였다.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고 야수조인
나와 엮일 일도 없는 투수조 사람이었다. 주전에도 들지 못하고 그렇다고 주전 자리를 차지하려
는 열망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십 수 년 전 기억이고 트라우마로 인
해 그 즈음의 기억은 풍화가 많이 일어난 편이지만, 사건 자체를 잊을 순 없는 일이었다.

 몸은 곳곳이 쑤셨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터진 입술
이 따갑고 폐 근처가 찌르는 듯이 아팠다. 왼쪽 손가락도 어딘가가 망가졌는지 힘을 줄 수가 없었
다. 나는 쓰러진 채로 몸 이곳저곳을 차례대로 움직여 보려했고, 그때마다 신경 다발은 격통을 내
뇌로 쏘아댔다. 그때 이미 늑골을 비롯해 온몸의 뼈가 다섯 대 부러져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안 사
실이었다. 부러진 뼈들은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뒤틀려 신경을 건드렸고
그 신호들이 뇌에 도달할 때마다 나는 움찔거렸다.

 ─아프냐?

 머리통은 시야에서 들어왔다 사라졌다를 몇 번 반복하더니 문득 그렇게 물어왔다. 고개를 돌
리기도 쉽지 않아 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도 안에서부터 부어오르기 시작한 입에서
소리를 짜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개를 움직이는 게 나았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보였
다.

 이런 사건사고의 처음이 늘 그렇듯, 시발점은 별 것 아니었다. 인근 학교와의 친선경기가 끝났
고 승전이었기에 감독은 닭을 샀다. 닭에는 콜라가 딸려오기 마련이었는데, 김빠진 콜라를 싫어
하는 인간은 한둘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러한 작자들은 스스로 뚜껑을 닫는 수고를 감수하고 싶
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 정신 나간 놈들은 병뚜껑을 닫는 전담요원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그건 하급생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게 그걸 왜 개기냐. 병신아.

 툭 던지듯 말하는 것이 들렸다. 직후 선배의 머리통이 다시 보였는데 그 위에 얹힌 표정이 무엇
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시야가 아직 뿌옜다. 다만 말투에서 걱정하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뚜껑에 대한 집착이 도를 지나쳤다는 거였다. 회식자리의 막내가 열린 뚜껑을 잠시
라도 방치한다 치면 그 자리에서 곧장 따귀가 날아들었다. 그렇게 몇 번 당하고 나면 사람은 금방
기계가 되었다. 그날 역시 1학년들은 닭의 살을 뜯어내면서도 눈은 병뚜껑을 쫓았다. 그 자리에
는 그저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1학년생이 중
간에 잠시 한눈을 팔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손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 광경을 더 이상 참지 못했
다. 그런 이야기다.

 그 와중에 선배는 사뭇 진지하게 내 몸 곳곳을 툭툭 차보았다. 어떤 곳에선 격통이 올라왔고,
어떤 곳은 촉감만이 느껴졌다.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들어
가서 남은 고기를 뜯는 모양이었고 주변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는 문득 이렇게
물어왔다.

 ─들리냐. 내가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었다. 여기서 풀어 봐도 되겠지? 지금이 기회인 거 같다
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답할 수 없어 그저 찡그렸고, 그저 내 표정이 부정의 의미로 읽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건 기본적으로 상대가 그 반응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예전부터 메꾸고 싶은 빈칸이 있었다. 거의 5,6년 정도 되어가는 빈칸인데 아무래도 채울 기
회가 없었지. 여기가 안성맞춤이다. 볼 사람도 없고 내 단독 책임이 되지 않을 건덕지도 있지. 네
가 녹음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더니 발걸음 소리는 잠시 동안 멀어졌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해봐서 서너 발자국 정도의
거리로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체크해보자. 아버지는 분명히 죽었고, 어머니 쪽이 남아있던가. 뭐 재혼했고 너
에겐 딱히 관심도 없는 창부 같은 여자니까 별 문제 없겠지. 넌 분명히 조부모하고 같이 살고 있
었잖아. 그치.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고, 뒤통수에 둔탁한 통증이 엄습했다. 직후, 통증은 암전하듯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4월 24일. 그것이 내가 살면서 느낀 마지막 통각이었
다.


/inside-the-park home run

 ─내가 아무리 젊을 때 창녀 같이 살았어도 이딴 대접 받으면서 살 이유는 없다구! 시팔!

 옆자리 여자는 계속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었다. 서른 중반 즈음 되어 보였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이였다. 어떤 연유에서 이 시간 이 바
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저 슬쩍 곁눈질이나 해가며 홀짝였다.

 여자는 꽤 비싼 술을 병째로 주문했고 혼자 비울 수 없는 양이었다. 바에는 주인장과 유진, 나
셋뿐이었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여자는 우리에게 연신 술을 따라주었다. 이미 어느 정도 취
해있었던 탓에 술의 이름을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만 알코올에 절여진 코와 혀에도 그 맛
은 독했다. 온더락이라도 부탁했어야 하나 하는 후회를 잠시 했다. 그리고 여자의 등장을 돌이켰
다.

 막차 시간이 지난 즈음이었다. 안쪽의 테이블석을 차지하고 쑥덕대던 사람들은 한두 명이 일
어나기 시작하자 우르르 무리를 해쳤다. 바는 일종의 길쭉한 아일랜드형 주방을 떠올리게 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담소하며 잔을 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안쪽
에는 주인장이 앉아 음악을 틀었고 둘은 나란히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붙어 앉는다는 건
일견 친밀해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멀게 앉는 방법이었다. 같은 방향을 보고 앉는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유진과의 대화는 매끄럽지 않았
다. 쌓인 시간은 간극이 되었고, 그 깎아지른 절벽을 뛰어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는 모든 걸 부수면서 그 공간으로 요란스레 끼어들어 왔다. 애초에 계단을 걸어 올라올 때
부터 소리는 요란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동작 또한 소란스러웠다. 바 건너편에 자리 잡은
여자는 이미 혀가 살짝 꼬여있었다. 메뉴판을 슥슥 넘기다가 무언가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발음
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주인장에게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찍어보였다. 주인은 고개
를 끄덕이더니 바 뒷켠에 진열되어 있던 병 중 하나를 통째로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내 익숙한 손
놀림으로 온더락을 담아냈다.

 유진과 나는 하나 마나 한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여자는 문득 끼어들었다. 내가 여자의 사연
이 일순 궁금했듯이 여자는 이 둘이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던 듯 했다. 나는 다짜고짜 물을 정도로
취해있지 않았지만, 위스키 석 잔을 단숨에 들이킨 여자는 충분히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자
는 유진과 내 비어있는 잔을 보더니 대뜸 술을 채웠고, 자신의 이야기와 궁금증을 두서없이 주워
섬겼다. 그 테이블에서 시간은 꽤나 무가치한 것이 되어 흘러갔다.

 한참을 떠드는 걸 대강대강 들어주며 알게 된 정보는 정말 별 것이 없었다. 남편과 싸우고 한밤
중에 뛰쳐 나왔겠거니 하는 추측을 하게 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유진과의 관계를 구구절
절 설명해야 하나 하는 걱정을 했지만 과용량의 알코올이 들어간 여자의 뇌는 금방 호기심을 과
거의 것으로 치웠다. 테이블을 중간에 놓고 둘러앉은 사람 넷은 주거니 받거니 했고 어느 샌가 시
간과 대화와 정신은 그냥 흔한 파편이 되어 작은 바 안을 떠돌았다.

 여자가 주인장에게 곡을 신청하고 거기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 유진은 남편에 대해 말했고  나
는 내 끝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차피 모든 것이 흐느적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동안 그런 것들은 아
무래도 상관이 없어 보였다. 혼자 춤추던 여자는 이야기하는 둘에게 뜬금없이 다가와 팔을 잡아
끌었다.

 ─좋아하는 거 아냐? 좋아하면 춤추라고. 애야? 이제 쭈뼛거릴 나이도 아니면서 왜들 그러는
데? 춤추면 되잖아.

 무슨 논리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수년 만에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유진과 나는 그
야말로 쭈뼛거렸고, 서로 엉거주춤한 채로 있자 여자는 다시 짜증을 냈다. 휘말리고 싶지 않았는
지 주인장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검색하는 척 했다. 손만 마주잡은 채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유진은 눈을 흘기며 살짝 리듬을 탔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난장판 속에서 여자의 남편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가격을 물었다. 남자는 카드를 긁었고 여자는 손을 뿌리쳤다. 테이블 위에서 혼자 부르르 떨리던
여자의 휴대전화를 남자가 챙겼다. 여자는 마지못해 잡혀 나갔다. 주인장과 나와 유진은 그 일련
의 과정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좋아 보인다. 그치.

 유진이 물었다. 나는 살짝 끄덕였다. 음악은 아직 흘러나왔지만 적막이 흘렀다. 녹아내려 공중
을 떠돌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했다. 잔치는 끝났다. 둘 다 유리조각 같
았다.


/suspended game

 날 똑바로 바라보는 상원의 눈은 그저 나라는 인간에 대한 흥미로 가득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
이라고 한다면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을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건 그것과는 달랐다. 인간의 감
정은 늘 복합적이고, 그건 분노에 휩쓸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1군 콜
업이 걸린 경기에서 선수들은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담긴 눈빛을 보이곤 했다. 마스크 뒤에서 넘
겨다보는 그 표정들은 절실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워 인간이었다. 상원의 그 인간 같지 않은 눈을
보며 난 그네들을 문득 떠올렸다.

 ─뭐 제가 그렇게 흥미로운 인간은 아닌데 말입니다. 뭐가 재밌을지 전 잘 모르겠네요.

 상원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

 프로 레벨에서의 승부 조작은 순위나 기록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프로는
이미 그 판의 먹이사슬 맨 위에 자리하고 있기에 더 위로 가기 위한 부정 같은 건 이루어지기 어
려웠다. 기록을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인간은 없고 결국 가치란 돈으로 환원되는 법이다. 조작
과 거기에 연관된 스포츠 도박 건으로 1군이 한참 시끄럽고 난 후에 도박사 놈들은 다음 판을 찾
아 헤맸다. 다른 종목으로 떠나간 작자들도 있었고 몇몇은 2군 구석으로 스며들어 판을 벌렸다.
TV 중계가 되지 않고 2군에서의 성적이 연봉 등에 직접 연관되지 않다 보니 브로커들은 더 활개
를 쳤다. 언어도단일지 몰라도 ‘프로’ 도박사들은 도박을 하지 않았다. 큰손들이 내부 정보를 꿰
고 주식 시장에 들어가듯 그 작자들도 결과를 정해놓고 돈을 건다. 호구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말이야 승부조작이지만 사설에서 실제로 승패를 놓고 도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시행되어야 돈이 빠르게 돌고 수익도 크다. 사다리 타기 같은 원초적이고 반복 시행
이 빠른 것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이 쓰레기들은 투구 한번 한번을 게임으로 만들
기 시작했다. 애초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베팅할 준비가 되어있는 버러지들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질지 볼을 던질지, 타자가 스윙을 할지 하지 않을지. 그
순간순간마다 누군가의 연봉, 누군가의 생활 밑천에 해당하는 돈이 공중을 오갔다. 이건 한 경기
내에서 최소 백 수십 번은 반복되는 게임이었고, 또한 전체 승부를 틀지 않으면서도 조작이 가능
했다. 그리고 브로커들은 그 중 몇 판만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녀석들은 처
음에는 선수들과 접촉하려 들었다.

 ─단순한 퍼즐 같은 거에요. 그냥. 아니 퍼즐보다는 보드게임 느낌일라나. 그런 거 있잖아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패를 들고 있나. 간파하고 파훼하는 게 주가 되는 것들. 그런 거라
면 아무래도 좋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꽤나 흥미롭다는 겁니다.

 여전히 긴장을 놓아서는 안됐다. 상원이 게임이라 표현한 것처럼 나는 그 자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어쩌면 내 실언을 기다리며 녹음기를 돌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진
의 죽음이 내 책임이 되는 불상사를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수 시간 동안의 경찰 조사만으로도 난
이미 지쳐있었다. 이런 쓸데없는 일로 끝이 연장되는 건 사절이다. 다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상
원의 눈빛에서 느껴지던 그 꺼림칙함이 뭔지는 알 수 있었다. 하나의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
을 때 눈은 광기를 띄게 된다. 그에 버금가는 광기를 나는 한참을 봐왔었다.

 ─그런 이유로 흥미로우려면 저와 무슨 내기라도 거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 그런 기억이
딱히 없는데요.

 상원은 씨익 웃어보였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말려 올라간 그 입꼬리를 보고 내 머리는 홀로 팽팽 돌아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브로커들
은 처음에 2군 붙박이들을 꼬드겨 매수했다. 주로 ‘운영선수’들이 그 먹잇감이 되었다. 2군 리그
는 그 안에서의 승패가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선수들에게 2군은 1군이라는 제대로 된 무대로 올
라가기 위한 통과의례나 다름없었고, 구단에게는 선수를 키워내는 농장 역할이었으며, 누군가에
게는 낙오한 자들이 머무는 귀양지였다. 구단에 따라 공개를 하고 말고의 차이는 있지만, 코치진
사이든 선수 사이든 간에 ‘육성군’과 ‘운영군’은 암묵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육성군은 차후 1군
에서 써먹기 위해 키우는 이들이고, 운영군은 1군을 오가는 선수들 자리를 메꿔주어 그야말로 2
군 경기를 운영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선수들이었다. 말이 좋아 운영군이지 평생 최소 연봉이나
받으며 2군에서 구르다가 기록도 없이 사라지는 뭐 그런 인생들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잠재력이
터질 날이 올 거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들은 늘 쪼들리기 마련이었다. 2군에 발목이 잡혀 나아
가지 못한다 해서 사랑이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고, 아비의 지갑이 빈곤하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
라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도박사들은 호구들의 주머니를 빨고 등치는 동시에, 운영군 선수들도 다른 축의 호구로 삼았
다. 전체 판돈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한 돈이었지만 한 푼이 아쉬운 입장에서는 단비 같았을 터이
다. 그렇게 잠시의 공생이 이루어졌고 몇몇이 서로 행복한 날들이 지나갔다. 브로커가 여럿 달라
붙으면서 이야기가 점차 꼬였다. 일종의 이중 계약을 하는 작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확실해야 하
는 게임의 결과가 확실하지 않게 되자 판은 어그러졌다. 3회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겠다던 녀석
이 택도 없는 볼을 던지고 와서 손이 미끄러졌다고 하는데 의심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어찌되었
건 이쪽도 치명적인 액수를 걸고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작자들은 아예 결과를 못 박아버릴 수 있는 사람을 매수하기로 했다. 같이 허덕대기
일쑤였던 동기 놈이 차를 바꾼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런 식의 인생역전은 금방 눈치 채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었고, 수사가 들어옴과 동시에 그 모든 이들의 즐거운 한때는 끝이 났다. 대한민
국 경찰의 내부고발자 보호 프로그램이 끝 간 데 없이 한심하다는 걸 나는 그 덕에 절실히 알았
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게 된 걸 후회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런 비슷한 결말이 찾아왔을 것을 나
는 미리 알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벽을 때려 찢어진 주먹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key stone

 추위에 곱았을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연신 두들기는 것은 보기에 놀라웠다. 거리 문화 조성 사
업의 일환인 것인지 유흥가 한복판에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추어인지 프로인지 알 수
없는 이 하나가 거기에 앉아 건반을 쳤다. 복잡다단한 연주였다.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
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에 담았다. 유진과 나는 가만히 멈춰서 연주를 들었다. 한 겨울
밤의 버스킹에 사람들은 돈을 얼마씩 내밀었다. 두 곡 째에 접어들었을 때 냉기가 옷 사이로 완전
히 스며들었다. 나는 유진을 이끌었고,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는 다시 병맥주를 하
나씩 사 들었다. 취기가 가시려던 참이었다.

 거리엔 무의미한 놀이거리가 이것저것 있었다. 사격장이니 오락실이니 다들 그 임대료를 버티
며 저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가 싶었다. 소위 사격장에 마련된 에어코킹건은 쏠 때마다 탄도가 제
멋대로 휘었다. 그 총신 위에서 정조준은 오조준이 되기 일쑤였고, 타이밍을 놓친 오조준이 정조
준이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탄도를 가지고 우리는 킬킬댔다. 각자 두어 차례를 쏘아도 경품
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안에서 몸을 덥히고 다시 나와 걷다가 꽤나 생경한 풍경에 맞닥뜨렸다. 스탠드를 포함한 널찍
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안쪽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한켠에서 악기를 스피커에 연
결해 그 자리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가벼운 무곡에 맞춰 사람들은 폴짝폴짝 뛰고 뱅뱅 돌았다. 주
변 상점들이 하나 둘 불을 끄는 늦은 밤이었다.

 유진은 먼저 뛰어 들어가 내게 손짓했고, 나는 잠시 주저하다 따라 들어갔다. 손을 마주 잡고
돌면서 나는 혹여 발을 밟아도 난 알 수 없을 거라 농을 쳤다. 유진은 웃지 않았다. 음악은 강약을
조절하며 속도를 바꾸었고, 템포가 느려질 때면 조용히 대화할 수 있었다. 유진은 내 생일을 기억
하고 있는 동시에 내 말버릇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늘 행복하지 않은 서른다섯이 찾아오면
자결하겠다고 말했었다. 애초부터 내가 자신을 찾은 이유를 유진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선
택한 수단을 물어오는 유진의 질문을 헛웃음으로 얼버무릴 수 없었다. 혼돈스런 야밤의 무도회
는 한창이었지만 우리는 어느새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키스를 해도 별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YIPS

 주말의 방들은 꽉꽉 들어차 남은 건 스위트뿐이었다. 거품이 올라오는 전동 욕조는 방 안에 자
리했고 샤워실과 화장실이 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 이건 흔히 말하는 ‘플레이’를 위한 배치겠
거니 싶었다. 코트를 벗어 걸고, 유진의 것도 그리 했다. 둘 다 아직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있었고
침묵은 베일 듯 날카로웠다. 나는 남은 몇 모금을 빠르게 털어 넣고 세면도구를 챙겼다. 샤워실로
들어가는 뒤에서 무언가를 찾는 소리가 들렸고, 곧 TV가 떠들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유리문을
닫자 문틀과 꽉 맞아떨어지며 나는 소리와 고립되었다.

 사실 늘 그랬다. 욕실은 평생을 내 기억의 성소인 양 굴었다. 특히나 모든 수치스런 기억은 그
안에 똬리를 틀고 24시간 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한 평도 되지 않는 그 공간에 홀로 남아
있을 때마다 몇 년을 묵은 과거들은 내 연약한 정신을 덮쳐왔다. 예컨대 첫사랑에게 던졌던 자의
식 과잉의 대사들, 예컨대 무책임하고 근거도 없던 자신감과 정의감, 예컨대 내가 바라는 낙원이
다른 이에게도 천국일 것이란 환상 같은 것들. 변기에 앉아 있을 때 그것들은 날파리 떼처럼 내
귀를 통해 뇌로 날아들었고 그 안에서 수질과 피질 가릴 것 없이 갉아 먹었다. 나는 그런 환통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는 흔히 물줄기를 받으며 흥얼거렸다. 되도 않는 멜로디라도 그걸로 머릿속을 채우
면 괴로움은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몸을 적시고 바디워시를 치덕거리고 다시 물에 흘려보내고.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를 다시 한 번 닦다가 문득 내려다보았을 때 쪼그라든 내 성기는 물살에 힘
없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고교 야구 감독이었던 아버지의 자살기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뛰어내린 곳의 높이가 충분치
못했던 것인지, 바닥의 완충물이 쓸데없이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불쌍한 인
간은 온 몸의 뼈가 아작난 후에도 죽지 못해 수십 일을 침대에 누워 끙끙댔다. 사실 우스운 이야
기다. 대학들은 시험을 치기도 전에 이미 뽑을 선수들을 골라놓았다. 그게 오히려 보통이었기에
거부하는 사람들은 판을 깨는 인간으로 몰려 린치 당했다. 서류상으로 문제가 없게 꾸미기 위해
경기의 결과는 당연히 경기의 시작보다 먼저 정해져 있었다. 인과는 곳곳에서 미리 역전되었다.
그건 마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기도 전에 아웃이 선언되는 꼴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수염도 자란 적 없는 6학년 꼬맹이였고, 아버지에게 면도를 배울 날은 그 뒤로도 없
었다. 안방 침대에 누운 아버지에게는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몸을 돌려 뉘
일 때에도 낮은 비명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곤 했다. 그건 짐승의 울음과 실상 별 다를 것 없어
보였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몸을 돌리고 나면 괴상한 모습의 플라스틱 통이 침대 밑에
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엔 늘 안방 문이 닫히고 나는 밖으로 쫓겨났다. 그렇게 쫓겨날 때 나는
종종 내 방에 가서 한참 벽을 노려보곤 했다. 그 추방은 나와 부모 사이에 선을 긋는 것과 같았고,
선은 문의 형태로 현현했다. 문의 너머는 순간순간 머나먼 우주가 되어 까마득했다.

 그게 소변을 받는 통이라는 건 한참 나중에야 안 일이었다. 같은 상황에서 나는 아이를 나가게
할지 꽤나 생각했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고민이다. 미지근한 물에 늘어져 흐느적대는
이것이 누군가를 잉태케 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십 대를 이어 내려온 고통의 연속은 여기서
끊어내야 했다. 문 밖에 서있던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지만, 다른 가족들은 원망을 감추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갔다. 누이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또 다시 숨 쉼의 바톤을 이어 받은 셈이다.

 어둠 속에서 나는 유진과 서로 안았다. 유진은 한참을 흐느꼈고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등에 손
톱자국이 아로 새겨졌지만 역시나 아프지 않았다.


/fake bunt slash

 거기까지 생각하고 비로소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상원이 지금까지 일종의 유희를 즐기던 중
임을 알았다.

 상원 자신은 막 부인을 잃은 홀아비의 탈을 뒤집어쓰고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작자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건 보는 눈이 있는 장례식장에서나 하면 되는 것이고, 나와의
1대1 대화에서는 필요 없었다. 유진의 죽음은 그 순수한 호기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금
의 상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머리통 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걸로 무얼
하고 싶은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상원이 왜 굳이 나를 쫓아와 이렇게 대화를 시작했는
지는 이제 기억이 났다.

 ─그때 재판에서 정욱이 쪽 변호사였죠? 이제야 생각났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라는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이제 알아보시네요. 오랜만이죠. 그죠. 잘 지내셨습니까.

 아마 시나리오는 내 눈 앞의 이 작자가 짰으리라. 그 일을 벌인 자가 늘 궁금했었다. 후보는 많
았다. 정욱의 대학선배였던 위원장, 나를 늘 아니꼽게 바라봤던 선배들, 내가 위에서 잡아 끌어주
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대학교 후배, 그 누구도 아니었다. 짧은 대화에서 확신이 들었다. 정확히는
돌아가는 나를 쫓아와 가며 이 대화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증거였다. 예고도 없이 시체로 발견
된 아내의 장례식에서, 그 아내와 전날 동침한 남자에게 뜬금없이 관심을 보인 건 다른 이유가 아
니었다. 흔한 의심에서 나온 행동도 아니었다.

 상원은 그냥 나를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불가사의한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
주한 이제 와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진이 술을 홀짝대며 말했던 감정들이 어디서 연유했던
것인지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우주는 내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나는 멍해졌다.

 ─덕분에요. 먼저 좀 일어나보겠습니다.

 상원은 하고 싶은 걸 이미 다 했다는 양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중에 또 봅시다. 빈칸도 몇 개는 채웠고.

 내 뒤통수에 대고 마지막으로 한번 낄낄댈 뿐이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전날
밤을 생각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원에게 복수를 한 셈이었다. 다만
그건 그게 저 작자에겐 전혀 의미 없는 문제라는 걸 알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덜컹이는
의자에 앉아 몇 번이나 이 이틀을 돌이켰다. 집에 남아있는 약액을 생각했다. 이건 또 다시 시험
문제였다. 이번에도 나는 또 다시 올바른 선택지를 찾지 못할 듯 했다. 아버지가 뛰어내리기 전
남긴 유서와 같았다.


\infield fly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남자의 휴대전화는 매일 밤 2시간 반마다 주기적으로 알람을 울렸다.
남자는 한밤중에 울려대는 알람 설정을 아침에 일어나기 위한 설정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하게 여
겼다. 통각은 인간이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해서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산물이
었다. 위험한 것은 아픈 것이고, 아픈 것은 고통이 되어 피하게 한다. 잘 때에는 혈류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곧 위험한 것이었다. 피가 돌지 않는 조직은 변형을 일으키고 심하게는 괴사
한다. 그러니 이건 남자에게 꼭 필요한 알람이었다.

 침대 아래서 이제 움직이지 않는 인영이 어둠 사이로 비춰보였다. 2시간 반 전에는 꿈틀거림이
남아 헐떡대고 있었지만 이제는 멈췄다. 선택은 책임을 부담하는 행위이고, 남자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방해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 상호에 대한 존중이라 여겼다. 침대 위에서 남
자는 몸을 뒤척여 자세를 바꾸었고 다시 누우며 휴대전화를 머리 옆 탁자에 놓았다. 일은 이미 틀
어졌고 지금 와서 어찌할 순 없는 것이다. 주사기의 약액은 완전히 비어있었고, 남자에게 남은 것
은 없었다.

 2시간 반 뒤부터는 할 일이 많았다.



──────────────────────────────────────────────



음 작년 8월에 장장 3년 6개월 만에 끝을 본 글인데, 창작 카테고리가 보여서 한번 올려봅니다-_-;
이제 투고 안 받게 된 '문장'에 올렸을 땐 문장력은 괜찮은데 장편 소재로 단편을 썼다고 하시더군요.
욕심이 언제나 문제인데 보강해서 쓸 시간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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