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6/15 23:33:03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한국 노벨상 집착 당황스럽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번역자가 한국측의 초청으로 내한했나봐요. 하지만 데보라 스미스씨는 한국에서 인터뷰를 하면 당연히 노벨문학상 질문이 나올 걸 예상하지 못했나봅니다.

사람들은 서구세계가 지닌 경제적 힘을 경외하면서도 그들이 그 경제적 힘을 투자하여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힘에 대해서는 약간 둔감하게 반응하곤 해요. "권위" 라든지, "문화 헤게모니" 라든지. 사실 후자와 같은 힘이 경제적 힘보다도 더 무서울 수 있는데도 말이지요.

교수는 학생에게 학점을 내려주고 학생은 그 처분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지요. 학생이 교수보다 부자라도 말이에요. 심지어 그 학생이 후에 정교수가 된다 하더라도 학창시절 지도교수는 평생 지도교수로서 늘 그 위에서 임하고 있을 거에요.

이 권위의 절대적 비대칭성, 권위자와 비권위자 간의 압도적 차이는 마치 달러화와 원화의 차이와 같아요. 화폐는, 누군가에 의하면, 재화의 가치를 표기하는 기호인데 모든 화폐는 다시 그 가치를 달러화를 기준으로 평가받아요. 따라서 달러는 화폐들의 화폐, 메타화폐 같은 거에요. 한 차원 위에서 거룩하게 존재하지요.

문학 작품의 품질은 독자들의 평가라는 기호로 표기되는데, 이 모든 평가들을 평가하는 게 노벨 문학상이에요. 내가 재미 없게 읽었어도 노벨상을 받으면 "내가 이상한가보지" 라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주관과 강단이 뚜렷한 소수 독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문학상이라는 메타취향으로 자신의 취향을 재단하고, 표기하려고 해요. 그래서 읽지 않을 걸 알면서도 노벨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괜히 한 번 사서 책꽂이에 꽂아보는 거구요.

스미스는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고 독자가 잘 감상하고 즐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작가에겐 충분한 보상이 된다. 상은 그저 상일 뿐이다" 라고 했대요. 청중과 발화자를 떼 놓고 보면 그저 평이하고 옳은 말 같은데, 비서구권 시민들의 흉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우린 그저 "권위"가 우리를 인정해주시기를 갈구할 뿐이거든요.




이하는 율곡 이이(李珥)의 전기에서 발췌한 거에요.


겨울에 명(明)나라에서 국사편수(國史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사신으로 와서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삼공(三公)이 선생을 원접사(遠接使)로 천거하여 국경에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중략)

... 묻기를, “그렇다면 천도책(天道策: 율곡이 언젠가 급제할 때 써냈던 답안지 제목)을 지은 사람인가?” 하자, 그렇다고 대답하니, 두 사신은 머리를 끄덕였다. (원주: 선생께서 거자(1차 합격자)이던 시절 천도책으로 답안을 내서 장원을 하셨다. 당대에 회자되어 중화에까지 전해져서 두 사신 역시 전에 이를 보았었다. 평소 존경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先生爲擧子時。對天道策居魁。一世膾炙。傳入中華。而兩使亦曾見之。欽仰有素。故有此問。)


지금 보면 참 별 거 아닌 일 같은데, 조선인이 조선 과거시험에서 쓴 답안이 명나라에 전해져서 사신들이 올 때 "아 이 사람이 그거 쓴 사람이야?" 라고 물어봤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 지식인들의 국뽕에 불을 지른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저 해당 구절은 율곡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전기성 기록에 빠짐 없이 등장할 뿐더러 심지어 실록에까지 기록되어있지요.

그의 사후에 (본의 아니게) 한 당파의 시조격으로 추숭된 것과 후에 조선 성리학의 대표인물 중 하나로 꼽히게 것과 그 결과 5천원 권에 들어가게 된 것과, 궁극적으로 본인 어머니까지 5만원 권에 들어가게 한 것은 모두 이 사건이 이이의 명성을 당시 하늘 끝까지 올려준 것과 무관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한강씨가 노벨문학상이라도 타는 날엔 그게 언제가 될지언정 언젠가는 반드시 화폐에 얼굴이 올라가지 않을까 저으기 상상해봅니다.


--------------
참고문헌


데보라 스미스 인터뷰: http://www.huffingtonpost.kr/2016/06/15/story_n_10474418.html?ncid=fcbklnkkrhpmg00000001

월사 이정귀의 율곡 이선생 시장: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201&gunchaId=av036&muncheId=01&finId=001

사계 김장생의 율곡 이선생 행장: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01&gunchaId=av007&muncheId=01&finId=001

조선왕조실록의 이이 부분: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nb_115&moId=110&daId=010&gaLid=knb_11511001_001&gaId=&yoId=&ilId=&leId=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957 7
    15157 IT/컴퓨터AI가 점점 무서워지고 있습니다. 4 제그리드 24/12/26 491 0
    15156 오프모임정자역 금일 저녁 급 벙개.. 13 Leeka 24/12/26 403 6
    15155 일상/생각청춘을 주제로 한 중고생들의 창작 안무 뮤비를 촬영했습니다. 2 메존일각 24/12/24 485 9
    15154 문화/예술한국-민족-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소고 meson 24/12/24 345 3
    15152 정치이재명이 할 수 있을까요? 73 제그리드 24/12/23 1750 0
    15151 도서/문학24년도 새로 본 만화책 모음 6 kaestro 24/12/23 395 5
    15150 게임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1 손금불산입 24/12/23 306 5
    15149 사회그래서 통상임금 판결이 대체 뭔데? 7 당근매니아 24/12/23 654 11
    15148 정치윤석열이 극우 유튜버에 빠졌다? 8 토비 24/12/23 861 9
    15147 정치전농에 트랙터 빌려줘본 썰푼다.txt 11 매뉴물있뉴 24/12/22 1101 3
    15146 의료/건강일종의? 의료사기당해서 올려요 22 블리츠 24/12/21 1009 0
    15145 정치떡상중인 이재명 56 매뉴물있뉴 24/12/21 1878 15
    15144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2 셀레네 24/12/19 578 9
    15142 일상/생각플라이트 시뮬레이터로 열심히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8 큐리스 24/12/19 514 2
    15140 정치이재명은 최선도, 차선도 아니고 차악인듯한데 43 매뉴물있뉴 24/12/19 1875 7
    15139 정치야생의 코모도 랩틸리언이 나타났다! 호미밭의파스꾼 24/12/19 388 4
    15138 스포츠[MLB] 코디 벨린저 양키스행 김치찌개 24/12/19 140 0
    15137 정치천공선생님 꿀팁 강좌 - AI로 자막 따옴 28 매뉴물있뉴 24/12/18 759 1
    15135 일상/생각생존신고입니다. 9 The xian 24/12/18 624 31
    15134 일상/생각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5 Picard 24/12/18 452 7
    15133 도서/문학소설 읽기의 체험 -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1 yanaros 24/12/18 314 4
    15132 정치역사는 반복되나 봅니다. 22 제그리드 24/12/18 777 2
    15131 여행[2024 나의 이탈리아 여행기] 0. 준비 7 Omnic 24/12/17 374 7
    15130 정치비논리적 일침 문화 7 명동의밤 24/12/16 887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