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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6/28 14:34:39 |
Name | Neandertal |
Subject |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천문학이나 물리학 분야가 갈릴레오나 뉴턴 같은 천재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데 반해서 화학 분야는 뉴턴 시대까지도 고대 연금술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화학이라는 분야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험 등이 동반 되어야 발전이 많이 이루어 질 수 있는 학문적 특성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그런 기술적인 제약으로 인해 발전이 다소 더디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아무래도 화학의 기반이 연금술과 같은 것에 바탕을 두다보니 관련 기술이나 지식 같은 것들이 비밀스럽게 소수의 관련 장인들 사이에서만 전수되면서 과학계로 폭넓게 전파되지 못한 점도 발전을 더디게 하는데 한 몫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프리스틀리나 라부아지에, 돌턴과 같은 과학자들이 화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라부아지에는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가리키듯 화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연소의 개념을 확립했고 질량 보전의 법칙을 주장했으며 원소들의 명명법을 개선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 라부아지에... 하지만 정작 이 양반의 마지막은 별로 좋지가 못했는데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난 후 전에 징세청부인으로 공직에서 활동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794년 5월 콩코드 광장에서 기요틴에 올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고 맙니다. 재판 당시 라부아지에는 판사에게 지금 하고 있는 실험만 마무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당시 판사는 “공화국에 과학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서 그의 간청을 일축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죽고 나서도 웃지 못 할 해프닝의 대상이 되고 마는 얄궂은 운명을 피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1900년에 그의 조국 프랑스는 과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을 기려서 파리에 그의 청동 동상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그 청동 동상의 얼굴이 라부아지에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라부아지에 대신 그의 동상에 오른 얼굴의 주인공은 프랑스의 철학자 콩도르세(Condorcet)였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였던 루이 에르네스트 바리아스가 다른 사람이 조각한 동상을 참조해서 해당 동상을 제작했던 것인데 바리아스가 라부아지에의 동상이라고 생각하고 참조했던 그 동상이 실은 콩도르세의 동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콩코드 광장에서 목이 달아나면서 죽음을 맞이했던 라부아지에였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세운 자신의 동상에도 엉뚱한 사람의 목이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상마저도 주인처럼 말년(?)이 좋지 못했습니다. 나치가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을 때 그 동상을 철거해서 녹인 다음 총알을 만드는 데 사용해 버렸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지금 프랑스 파리를 가더라도 그 비운의 동상을 만나 보실 수 없다고 하네요. ![]() 지금은 파리에 가도 찾을 길 없는 라부아지에 동상...심지어 얼굴은 다른 사람...--;;; 라부아지에를 재판했던 혁명 재판의 판사는 “공화국에 과학자는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공화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다 과학자들이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업적의 과실을 따먹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라부아지에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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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아지에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 이전까지 실험은 마치 백종원처럼 소금 적당히, 한 큰 술 이런 식으로 기록되었는데 라부아지에가 거의 최초로 무게를 재는 단위를 써서 정량으로 기록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라부아지에도 여러 일화가 있는데 악명 높은 징세인으로 사형 당한 것도 유명한 일화죠. 어린 부인이 대부분의 저서를 대필하기도 했고요. 물리학과 화학의 출발은 각기 뉴턴과 라부아지에가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인류사에 미친 영향이나 사상사에 미친 영향, 개인의 위대함은 사실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더 보기
라부아지에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 이전까지 실험은 마치 백종원처럼 소금 적당히, 한 큰 술 이런 식으로 기록되었는데 라부아지에가 거의 최초로 무게를 재는 단위를 써서 정량으로 기록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라부아지에도 여러 일화가 있는데 악명 높은 징세인으로 사형 당한 것도 유명한 일화죠. 어린 부인이 대부분의 저서를 대필하기도 했고요. 물리학과 화학의 출발은 각기 뉴턴과 라부아지에가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인류사에 미친 영향이나 사상사에 미친 영향, 개인의 위대함은 사실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화학의 과학사가 언제나 좀 묻히는 경향이 있었죠. 뉴턴 이야기를 할 때 라부아지에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뭔가 통(?)했군요.
사실 물리학에 비해서 화학에는 패러다임론도 약하게 작용하고 과학사적으로 흥미롭지도 못한 부분이 1800년 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실험 법칙들이 입증되고 이후에 물리화학에서의 발전은 거의 없다가 현대 입자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주석처럼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유기 화학이 함께 계속 발전해오긴 했는데 물리학이 주는 정밀함이나 신비한 느낌이 많이 약하기 때문에 과학사적인 흥미는 거의 이끌어내지 못했죠. 화학 실험의 기초는 라부아지에가 세워놓은 그 수준에 사실 머물러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사실 물리학에 비해서 화학에는 패러다임론도 약하게 작용하고 과학사적으로 흥미롭지도 못한 부분이 1800년 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실험 법칙들이 입증되고 이후에 물리화학에서의 발전은 거의 없다가 현대 입자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주석처럼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유기 화학이 함께 계속 발전해오긴 했는데 물리학이 주는 정밀함이나 신비한 느낌이 많이 약하기 때문에 과학사적인 흥미는 거의 이끌어내지 못했죠. 화학 실험의 기초는 라부아지에가 세워놓은 그 수준에 사실 머물러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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