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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28 00:53:49
Name   뤼야
Subject   [문학] 지하인간 - 장정일


지하 인간

내 이름은 스물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6)중에서 -



장정일은 1984년 시 [강정간다]로 문단에 데뷔했고, 그 후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시집은 제가 알기로 꽤나 잘 팔려나갔습니다. 1판은 13쇄까지, 그 후 신장판이 3쇄를 거듭했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2003년 개정판 3쇄니, 그 후 몇 쇄를 거듭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는 장정일의 문학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시들이 많습니다. 애인이 어려서 삼촌과 같이 읽었다는 [석유를 사러]도 있고, 장정일을 문단에 데뷔시킨 작품인 [강정 간다]도 실려있습니다. [샴푸의 요정]이나 [지하도로 숨다]같은 장정일의 특유의 절창도 같이 실려있습니다. 

장정일의 시에는 여러 지명이 등장합니다. 장정일의 또 다른 시 [길안에서 택시잡기]의 길안은 사과로 유명한 고장으로 경상북도 안동과 인접해 있지요. [강정 간다]의 강정은 실제 지명은 아닌 듯 합니다. 검색을 해보니 제주도에 강정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긴 한데, 시를 읽어보면 '강정'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에 더 가깝습니다. 그에 반해, [안동에서 울다]의 안동이나 길안 등은 실제 그 고장의 모습을 짐작해 볼만한 힌트들이 등장하지요. 

작년 여름에 애인과 길안에 갔습니다. 장정일이 길안에서 택시잡기가 어렵다니까 정말 그런지 우리도 한 번 가볼까 농담처럼 던졌던 말을 실행에 옮겨버린 것이지요. 안동역에서 길안까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는 버스를 타고 종점인 길안에 내리니 길안 읍내는 걸어서 10분이면 돌아볼 수 있는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요. 읍내라고 해봤자 단층으로 올린 건물 몇개에 들어선 작은 식당과 농협, 슈퍼마켓 두 서너개, 파출소, 우체국, 흙먼지 날리는 자그만 시외버스터미널이 전부였습니다. 길안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길안 읍내 사람 모두와 통성명쯤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길안 읍내를 휘휘 둘러보고, 조그만 마을의 느리게 흐르는 시간에 취해 있다가 길이 끝나는 곳 어디쯤 서 있던 정자에 누워 낮잠도 잤습니다. 더운 날씨였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춥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뻔뻔한 이방인 둘이서 정자를 차지하고 있는데, 동네 어르신이 나타나는 바람에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기억이 나네요. 아쉬웠습니다. 정말 길안의 바람은 차고 깨끗하고 향긋했으니까요. 안동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더군요. 시내의 터미널로 돌아갈까 하다가 길안에 왔으니 이왕이면 택시를 잡자고 했는데, 택시는 커녕 차도 간간히 한 두대가 다닐까 말까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길안에서 택시잡기는 정말 어렵구나...

[지하 인간]은 제가 아주 힘들고 우울했던 시기에 저를 많이 위로해준 시입니다. 시집 전체에 깔린 자본주의의 우울한 풍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시지요. 저는 이 시를 정말 좋아해서 제 블로그의 제목을 '지하인간의 방'이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내이름은 스물두살, 한 이십년쯤 부질없이 살았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말자... 앞으로 살아야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이 구절을 외고 또 외면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시가 있는지요. 있다면 한 번 소개해 주셔도 괜찮을 텐데요.

시는 혼잣말입니다. 화자와 청자는 같은 사람, 즉 분열된 한 사람일 확률이 높지요. 내가 내게 거는 말. 그리고 그 말이 곱고 아름답다면 한쪽으로 무너져가는 자신을 추스리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말이 필요합니다. 힘들겠지만 제발 살아있어 달라고 용기를 주는 말이 필요합니다. 나는 존중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음을 환기시켜 줄 말, 이제까지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격려해 줄 말이 필요하지요. [지하 인간]은 제게 그런 말이었습니다. 땅속에 묻히고 싶도록 아팠던 날들을 가만이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잠이 안와서 리뷰게시판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몇 자 끄적여 보았습니다. 오랫만에 해보는 1등이군요. 학창시절에는 많이 해봤습니다만. 크크크 




* Toby님에 의해서 리뷰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5-07-01 11:50)
* 관리사유 : 리뷰게시판을 내리면서 자유게시판으로 게시글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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