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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8/05 07:52:27 |
Name | 뤼야 |
Subject | [리뷰]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
현대인은 거의 모두가 완벽한 사회화에 성공한 개개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사회화에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만의 페르소나에 완벽하게 적응했음을 의미하기도 하죠. 그러나 어떤 신경증적 미봉의 상태로 페르소나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이를 스스로 포기하려는 이도 없지는 않습니다. 슬라예보 지젝은 이를 두고 "히스테리증자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상징적 지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또는 주저하는 주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연계와 배치의 자의성에 불과한 페르소나의 텅 빈 중심을 간파한 개인들입니다. 현실적 규정력이라는 인력에 자신을 맞기지 못한 채 영혼이 귀속될 장소를 얻지 못해 쉼없이 서성거리는 셈입니다. 문학 속에서 이러한 분열증을 앓는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지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요. 맨하탄에서 성공한 변호사인 화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기묘한 남자인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면서 바틀비라는 새로운 필경사를 고용하게 되는데,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찬 바틀비는 처음에는 문제없이 일을 잘 수행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변호사가 평소처럼 일을 맡기자, 바틀비는 돌연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답하며 일하기를 거부합니다. 이후로 바틀비는 점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창문 건너편의 벽을 바라보면서 백일몽에 빠지는 일이 잦아지지요. 변호사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바틀비를 설득해보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돌려줄 뿐입니다. 어느 휴일,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려다가 그 안에 바틀비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바틀비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죠.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자리를 뜨지조차 않는 바틀비의 외로움은 묘한 방식으로 변호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의 바틀비에 대한 감정은 연민과 혐오가 뒤섞인 아주 복잡한 것이 되어가고, 회유와 설득을 반복하지만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결국 변호사는 바틀비를 남겨둔채 사무실을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바틀비는 여전히 떠나기를 거부합니다. 후에 변호사는 바틀비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갑니다. 훨씬 여윈 바틀비를 보고 안타까웠던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사식을 넣어주지만 바틀비가 식사를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변호사는 바틀비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바틀비가 과거에 수취인 불명 우편을 처리하는 사무실(dead letter office)에서 일했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변호사는 바틀비를 헤아리기 시작합니다. '수취인 불명 우편에는 얼마나 많은 절절한 사연들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며, 바틀비는 그곳에서 갈 곳 잃은 우편들을 불태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요. 그는 이렇게 뇌까리며 [바틀비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과연 바틀비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고전적인 리얼리즘에 대한 반동으로 제가 일전에 쓴 '너무 유창한 화자의 문제'(https://redtea.kr/?b=3&n=674)로 언급한 적이 있었던, 즉,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인식론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문학에 대두됩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 이러한 화자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문학과 비평계의 화두가 된 것이죠. 하여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선구적 작품을 꼽을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작품이 바로 허먼 맬빌의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작품이 씌여진 것이 1890년이니 19세기의 작품이 20세기의 작품으로 대접받는 셈입니다. 여러 비평가와 철학자들이 [필경사 바틀비]를 자신의 저작에 소재로 사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저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아감벤이나 네그리를 경유하여 진중권이 쓴 [필경사 바틀비]까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해석을 내린 것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화자인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두 명의 필경사를 자신이 붙인 별명으로 칭하는데, 이를 통해 주인공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무신경 즉, 그를 둘러싼 타인이란 기껏해야 '별명으로 불릴만한 특징을 가진 사물(도구)'과 다름 아님을 드러나지요. 그러나 바틀비는 주인공과의 인상깊은 조우를 통해 자신을 각인시킵니다. 주인공이 바틀비라는 타자의 지평에 눈을 뜬 순간, 주인공은 바틀비라는 타인의 드러나지 않은 '진실'에 강렬한 인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작품 속에서 '이름을 돌려받는 행위'는 한 개체의 고유성에 눈뜨는 순간이며 이는 또한, '세상이 갈라지는 순간'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필경사 바틀비]를 독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진중권은 이를 두고, [바틀비:변호사 = 디오게네스:알렉산더] 해석해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아감벤이나 네그리가 바틀비를 '폭력에 저항하는 세속적 메시아' 또는, '거부를 해방으로 나아가는 1단계'로 여긴 것에 미학의 조미료를 살짝 뿌린 진중권식 비틀기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아감벤이나 네그리의 지나치게 정치사회적인 해석도 제게는 그리 온당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사회학자고, 저는 철학적 인식론에 회의를 품은 문학덕후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바틀비를 한 개인의 진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해석을 내릴 수 없다는, 즉, 독자가 바틀비에 대해 알 수 있는 진실은 오직 화자를 통해서이며, 소설 속의 화자를 의심하는 순간 바틀비의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화자인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강한 인력을 느꼈기에 그가 바틀비에 대해 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단점은 작게 보이고, 혐오하는 사람의 단점은 크게 보이는 이치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면벽面壁하는 바틀비보다 바틀비의 이름을 돌려준 주인공에게 주목해서 바틀비를 읽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의 이름조차 염두에 없는 주인공이 바틀비라는 기인을 만나 그를 이해(또는 오해)하는 과정 즉, 바틀비를 향한 의문과 분노, 회유가 관심과 연민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점차 고조되다가, 종적을 감추었을 때 해소되는 긴장감이야 말로 바틀비를 읽는 묘미죠. 말하자면, 주인공의 바틀비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완벽하게 사회화된 주인공이 '페르소나를 스스로 벗어던진 타자'의 지평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에 주목하여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면벽할 수 밖에 없는 바틀비의 진실은 어디에도 없음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아감벤이나 네그리가 이야기하는 '어떤 저항'이라기 보다는 삶을 향한 목숨을 건 도약 이후에 나타나는 어떤 후유증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틀비에 텅빈 몸짓 속에는 발화發話하는 순간, 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아버릴 진실에 대한 애도가 담겨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화자가 바틀비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근거는 돌아갈 곳이 없는 편지를 태우던 예전의 그의 직업이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해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요. 결국 이해란 오해일 뿐입니다. 진리에 능하다는 것은 대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걸작인 것은 대답하지 않고 질문하는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끝없는 오해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이해 속에서 우리는 겨우 인간일 뿐이지요. 삶의 진리에 대한 왈가왈부는 이 세계가 커다란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변증법자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이며, 진실은 절대 말로 옮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환원론자들이죠.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이란 타인에게 옮겨지는 순간 한나절의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고 소비되고 버려지는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은 슬프기까지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당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성의 질서에 편입하기를 거부하는 당신의 낯선 욕망의 흐름을 당신은 어떻게 제어하고 있습니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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