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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8/02 07:42:37
Name   뤼야
Subject   사라, 쥬디, 앤 그리고 블루 - 여자와 아버지
[바리데기][심청]처럼 나약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거나 희생을 강요당하는 전래의 이야기, 또는 텅빈 부성(父性)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갈급함이 부른 비극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고 많습니다. 이문열이 쓴 대하소설 [변경]의 '모니카'를 봅시다. 비극적 사랑 끝에 버림받고 자살하는 여성, 결국 부성의 빈 자리 때문입니다. 양반에게 농락당한 노비의 딸, 아버지가 없는(?) 무당의 딸, 기지촌의 창녀, 산업화시대의 공단 근로자, 1960년대의 파독 간호사, 수많은 여자들이 문학 속 비극의 이름을 수놓습니다. 이런 설화와 문학이 단지 이야기로 그치지 않았다는 극단적인 증거가 바로 '일본군 위안부'지요. 결론, 우리의 아버지는 (대부분) 나약했기에 딸을 지켜줄 힘이 없었습니다.

영화 [테이큰]을 통해 잘 나타나는 '딸바보' 캐릭터는, 위 맥락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어쩌면 구시대, 이 땅의 힘없던 아버지에 어떤 반동같은 것이 아닐까요? 공작 수컷의 깃털마냥 '딸을 사랑하는 행위'가 자신의 세속적 성공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테이큰]처럼 온몸으로 딸을 지키는 이야기가 인기기도 하고요. 자의반 타의반 비혼자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서, 딸을 팔아먹지 않고(!) 온 사랑을 쏟아붓는 행위란 그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합니다.

그럼 딸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려 문학 속에서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를 소환할라치면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어려서 읽은 [소공녀]가 먼저 떠오르고, 이어서 몇년 전에 읽은 마리샤 페슬의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아버지를 찾은 [빨강머리 앤][키다리 아저씨]도 있네요. 그러고 보니 네 가지 이야기 모두 주인공이 '어린 소녀'이며 작가가 모두 여자고,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어린 시절에 읽은 이야기들입니다. 서로 다른 네 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모두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소녀인 것은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보다는 보살핌을 받는 소극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미성숙한 여자의 심리가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있는 이야기들이고, 이런 심리야 말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이야기를 가능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공녀]의 주인공인 사라 크루의 아버지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무렵 사라를 기숙학교에 남겨두고 인도로 떠납니다. 그가 열대의 나라에서 전염병에 걸려 객사하는 바람에 사라는 가파른 개고생의 길로 접어들지만, 아버지 판타지는 결국 경제력 판타지!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부는 책의 제목대로 사라를 다시 '작은 공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지요. '공주로 살고 싶어요'라는 메세지는 비인간적인 기숙사 교장의 악행과 공주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꼬꼬마 악녀들에 의해 희석되어, 사라에게 상속되는 부副의 면죄부가 되어버립니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쥬디의 경제적 후원자는 '키가 매우 큰'데, 실제로 키가 크다기 보다는 후원자의 그림자로 은유되는 쥬디의 의존적 심리의 크기가 큰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곰씹어보면 약간 변태적이기까지 한데, 쥬디는 갑자기 꿈처럼 나타난 후원자 덕에 바라던 대로 대학에 진학하지만, 결국은 이야기의 종착역이 후원자(아버지)와의 결혼이라는 것이 함정! 이런 노골적인 판타지는 순정만화 수준 정도밖에는 되지 않지만, 역시나 주인공의 고난(고아라는 점)과 세속적 성공(대학진학)이라는 교묘한 포장으로 쥬디의 '공주되기'에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인 앤의 아버지인 매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속 아버지상입니다. 말수가 적고 수줍으며 자애로운 그는 천방지축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고아소녀 앤의 호기심을 한 번도 나무라거나 꺽으려 한 적이 없지요. 앤을 위해 극복하기 어려운 자신의 정신적 장애까지도 극복하려고 애씁니다. 매튜가 죽었을 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가 없는 앤의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책을 읽는 재미까지도 잃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자애로운 아버지. 사회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지만, 앤의 기행奇行까지도 믿음과  이해의 이름으로 감싸안은 아버지. "앤은 내 딸이야."라는 그의 수줍은 고백은 아직도 제 마음을 울립니다.  

[빨강머리 앤]이 다른 두 작품과 궤를 달리하는 이유는 앤이 공주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아버지가 되기 어려운 인물인 매튜(그는 너무나 수줍어서 여자를 보면 가던 길을 돌아가는 사람이지요.)의 고아 소녀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매튜 자신을 극복하는 지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성품좋은 사라나 쥬디와는 달리 앤은 타고난 단점이 많은 인간적인 주인공인데다, 허영심때문에 이러저러한 사고를 치면서 고난을 자초하지요. 앤이 공주가 아닌 인간으로 성숙해지는 발판은 그녀의 단점까지도 조용히 지켜봐주는 자애로운 눈길이 곁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블루의 불행학 특강]의 블루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위의 세 작품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선 작중 분위기부터 다르죠. 위에 소개한 세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전근대임에 반해, 이 작품의 배경은 현대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주인공 소녀 블루의 아버지는 대학교수로, 타인이 쉽게 넘보기 어려운 지적 아성을 쌓은 인물입니다. 아버지를 둘러싼 세 사람의 미스테리한 죽음에 대해 블루가 의문을 품으며 이야기는 시작되죠. 미스테리를 풀어내는 천재소녀 블루의 정신적 유산은 아버지로부터 연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셋의 죽음은 결국 아버지와의 비밀과 맞닿은 것이기에, 그녀의 추리는 아버지라는 모순에 대한 지적 도전장으로 이어집니다.

이 수다스럽고 떠들석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유산을 거부하는 딸의 도래를 보여줍니다. 첫번째 미스테리한 죽음의 주인공인 블루의 어머니는 배반당한 공주로 박제된 나비표본으로 은유되고, 아버지(진정한 사랑)을 찾아 블루의 아버지에게 날아드는 여자들은 'june bug'으로 은유됩니다. 죽어 박제가 되거나 손을 휘저어 내쫓는 하찮은 것! 아버지를 찾는 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블루는 기이한 아버지와의 긴 여행을 끝장내는 것으로 아버지의 아성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쓰다보니, 아버지 판타지를 찾으러 멀리 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수녀들이 있지요. 그녀들이야말로 궁극의 아버지 판타지에 도취된 셈이 아닐까요. 행복하겠습니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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