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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07 07:55:16
Name   뤼야
Subject   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
저는 음식 만드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싼 값에 신선하고 좋은 식재료가 나와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 꼭 손해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합니다. 식재료를 다듬거나, 칼질 하거나, 불 앞에서 음식이 익어가는 과정 모두를 즐깁니다. 음식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완성된 음식을 누군가에게 대접하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조리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다 잊어버립니다. 제가 학부때 화학을 전공했으니 요리사가 된다면 전공을 살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억측도 해봅니다. 주방은 제 유기화학 실험실이 되는 것이겠죠. 돈을 적게 벌든, 많이 벌든 상관없고 먹고 살면 된다 생각으로 제 업장을 가지고 싶다는 꿈도 꾸는데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이탈리안 음식점에서 일년 정도 일했습니다. 책이나 강습을 통해 익히는 것이나 지인에게 대접하려고 음식을 하는 것과 상품으로서 음식을 만들고 파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지요. 상품의 단가에 맞추어 식재료비를 산정하는 것, 산정된 식재료비에 맞추어 최대한 좋은 퀄리티의 상품을 뽑아내는 것, 예산 안에서 최상의 식재료를 고르는 방법, 식재료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법부터 시작해서 식재료비가 높은 메뉴의 감가를 다른 메뉴에서 뽑아는 법이나 잘 나가지 않는 메뉴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다른 메뉴에 활용하는 방법, 기존의 메뉴와 상충하지 않는 새 메뉴를 개발하는 방법 등등 일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가 만족할 만한 상품을 만드는 것이겠죠.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니 주방에서도 잘 하겠지 막연히 생각하고 친구에게 어필을 했지만 친구는 콧방귀만 뀌었더랬습니다. "한 번 해봐. 나중에 나 원망하지말고. 월급 많이 못준다." 뭐 대충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한 달도 못버티고 그만 둘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저는 잘 해나갔습니다.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는 다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설거지같은 잡일도 힘이 들지만 무엇이든 대량으로 준비해야하는 과정 하나하나 힘이 들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업장에 있는 화덕의 온도는 섭씨 400도 정도를 유지하는데 여름에 조리복을 입고 두건을 쓰고 그 앞에서 삽질(화덕안에 들어간 피자는 한 번씩 돌려주어야합니다)을 하고 있으면 땀이 비오듯 흐릅니다. 리조또에 들어가는 쌀을 볶는 작업은 어떻구요. 화구의 출력을 최대로 높여놓고 중국의 웍과 비슷하게 생긴 둥근 팬에 분량의 쌀과 버터, 양파 와 각종 향신료를 넣고 생쌀이 절반쯤 익을 때까지 눌어붙지 않도록 쉴 새 없이 팬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팔이 빠질 듯이 아프지만 조리를 끝내고 나면 화구의 불을 끄면 갑자기 누가 에어컨이라도 켠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입니다. 불앞에서 하는 일 말고도 중력분과 박력분을 일정비율로 섞어서 반죽기를 돌리고 빼낸 반죽을 포션해서 공굴리고 바트에 넣어 발효시키고, 휴지시키고,  미리 발효시켜둔 반죽의 상태에 따라 상온에 보관할 것인지 냉장에 둘 것인지도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식재료는 냉장고에 넣어두어도 계속해서 상태가 변하기 마련입니다. 해산물 파스타나 리조또에 들어가는 홍합이나 바지락은 보관이 가장 어렵습니다. 바지락은 해감을 시킨후 살려두는데 하루 정도가 지나면 살이 줄어듭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제 몸의 영양분을 소모하는 것이지요. 하루가 지난 바지락으로 봉골레를 해보면 통통하던 살이 없어지고 껍질에 간신히 붙어있는 살점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홍합은 하루가 지나면 모두 폐기처분 합니다. 신선하지 않은 해산물은 비려지므로 음식맛을 해치게 되니까요. 과발효된 반죽도 모두 폐기처분 합니다. 과발효된 반죽으로 피자를 만들어 화덕 안에 넣으면 반죽에 구멍이 뚫려서 토핑된 치즈가 화덕의 바닥에 눌러 붙게 됩니다. 그 순간 주방은 순식간에 화생방 훈련장이 되어버리지요. 치즈가 타면서 나는 연기와 바닥에 눌어붙은 치즈를 다 긁어내기 전까지는 화덕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주문이 밀려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 주방은 순식간에 패닉상태가 되어버립니다.

[화덕에서 미국식 감자피자를 구웠네요. 감자가 무거워서 구멍이 잘나는 피자 중 하나입니다.]

과발효된 반죽이 아니더라도 반죽을 골고루 평평하게 만들어내지 않으면 피자에 구멍이 생깁니다. 미국식 피자와 달리 화덕피자는 밀가루 반죽이 매우 얇기 때문에 두께를 골고루 유지하는 것이 어렵고 제대로 폈다고 해도 화덕안에서 구멍이 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지요. 처음으로 반죽을 밀어서 토핑을 얹고 화덕에서 잘 구워진 마르게리따를 손님상에 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몸은 만신창이인데 그 즐거운 기분은 참 오래가더라고요. '내가 진짜 요리사가 된건가? 앞으로 나를 셰프라고 부르라고 해야지!' 혼자 바보같은 상상을 하며 히죽거렸더니 친구가 " 그렇게 좋냐?" 하더라고요.  반죽을 제대로 펴기 위해 버린 반죽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친구의 업장이 아니었다면 제 마음대로 연습삼아 반죽을 펴고 버리는 짓도 못했겠죠. 사장을 친구로 둔 덕에 제 마음대로 이것저것 연습한다고 쓰레기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파스타는 피자와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친구의 업장에서는 스파게티와 링귀네를 사용했고 건면이기 때문에 미리 삶아서 일인분씩 포션을 해둡니다. 여름과 겨울, 즉 계절의 변화에 따라 삶는 시간을 조금씩 달리합니다. 면을 삶는 물의 양과 들어가는 소금의 양도 정확히 계량합니다. 일인분의 양은 많이 주는 집은 200g서부터 140g 정도까지 다양한데, 제가 먹어본 경험에 의하면 200g을 주는 집은 거의 없고 160g정도가 평균치 인듯 합니다. 파스타는 조리가 끝난 후에도 '알덴떼'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삶아내는 것이 요령입니다. 집에서는 파스타를 푹 익히지만 업장에서는 집에서 하는 것보다 조금 더 딱딱하게 조리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차적으로 삶아낸 면을 씹어보면 가운데 아주 작게 익지 않고 남아있는 노란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너무 오래 익힌 셈이 됩니다.



파스타는 매우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준비과정과 조리과정을 보면 조리사의 역량이 금방 드러나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건면이 아닌 생면의 경우는 우리 입맛에 잘 맞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탈리아 정통 생면은 우리가 먹기에 약간 덜 익은 듯한 식감이라고 할 수 있죠. 거기다가 한국인들이 그런 식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아서 완전히 익힌 생면을 내는 집도 있는데 이걸 먹느니 차라리 수제비를 먹겠다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생면의 경우 링귀네나 페투치네같이 비교적 가는 면이 있는가하면 파파르뗄레나 딸리아뗄레 처럼 아주 굵직한 면을 쓰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설익은 듯한 식감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면 건면을 삶아 내는 파스타집을 권해드리는 편입니다. 저도 건면을 제대로 조리해서 내는 집을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여러 파스타를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이제 슬슬 출근준비를 해야할 시간이네요. 다음번을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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