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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8/03 06:52:16
Name   뤼야
Subject   안티고네는 울지 않는다 - 윈터스 본(Winter\'s Bone)
이 글은 고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 대한 전체적인 스포일러와 데보라 그래닉 감독,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영화 [윈터스 본](2010)의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또한 구밀복검님이 진행하시는 팟캐스트 영화계契(http://www.podbbang.com/ch/8720)에서 다룬 [윈터스 본]편을 듣고 난 후 영화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본 글입니다.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중 하나로 오이디푸스의 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한 채로 떠돌아 다니게 되고, 안티고네의 두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왕권을 놓고 다투다 죽게 되자, 안티고네의 삼촌이자 오이디푸스의 동생인 크레온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요. 크레온이 에테오클레스만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들에 그냥 버려두라는 포고를 내리자, 안티고네는 혈육의 정에 이끌려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들에 버려진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몰래 묻어줍니다.

이 사실을 안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생매장형에 처하지요. 안티고네를 연모하던 크레온 왕의 아들 하이몬도 안테고네를 따라 죽기로 결심하는데 크레온은 아들이 죽게 된 것에 놀라서 안티고네의 생매장 처형지로 달려갑니다. 하이몬은 아버지를 보자 격분하여 칼로 찌르려고 하고 이에 크레온이 도망치고, 하이몬은 자살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안 크레온왕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침대에서 자살한다는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양심(자연법)과 국왕의 명령(실정법)의 대립을 은유하는 이야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영화 [원터스 본]의 배경은 미국의 오자크라는 외딴 마을입니다. 주인공인 17세 소녀 '리 돌리(Ree Dolly)'의 팍팍한 삶을 증명하는 것은 컴퓨터도, 전화기도, 티비도 없는  겨울 산골의 삭막한 풍경만이 아닙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리와 두 동생을 돌봐야할 어머니는 넋이 나간듯 하고, 아버지인 제섭(Jessup Dolly)은 실종된 채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리에게 닥친 비극의 전부가 아닙니다. 리의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사라진 아버지는 그저 가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사라진 채 나타나지 않아도, 죽지않고 가족에게 나타나도 문제입니다.

마약판매 혐의로 실형선고를 앞둔 아버지가 집을 담보로 보석금을 내고 종적을 감추자 경찰이 리에게 찾아와 아버지가 제 시간에 법정에 출두하지 않으면 집이 경매에 넘어가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엄마와 어린 두 동생까지 돌봐야 하는 리는 유일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적을 쫓을수록 리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게 돌변하고, 심지어 위협을 가하기도 하지요. 결국 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단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나선 것 뿐인데 마을 사람들이 리에게 이토록 적대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윈터스본]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는 하지만 소위 말하는 헐리우드식 스릴러의 문법과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가중시켜 관객을 몰입하도록 하는 장치는 전혀 사용하지 않거니와, '어린 소녀의 가족 구하기'라는, 자칫 신파조로 흐르기 쉬운 소재에 몰입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테리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라는 소재를 잔인할 정도로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나 정신 나간 어머니의 머리를 빗기며 낮게 읇조리는 리의 노래와 어린 두 동생에게 스스로를 지키라 이르며 총 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시종일관 담담한 리에게 닥친 암울하고 참혹한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몰입하게 되는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혹시나 영화의 관객은 특정한 장면에서 특정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장치(연출)에 길들여진, 너무나 수동적인 감상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거의 대부분의 영화는, 영화를 찍는 시선에 대한 자기 인식을 스스로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일전에 소설의 화자의 문제에 대해 제가 쓴 글에 대해 팟저님이 달아주신 덧글(https://redtea.kr/?b=3&n=674&c=10552)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이러한 자기인식을 스스로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짧습니다. 이에 [윈터스 본]에 드러난 '하드보일드함'이란 영화를 찍는 시선에 대한 자기인식이 감독의 의도하에 철저히 반영된 결과물이 아닐런지요.

더구나 영화의 결말에 다다라서도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사실 이외에 아버지를 둘러싼 미스테리의 대부분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아버지의 미스테리한 죽음(또는 실종)에 대한 힌트도 없이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관객은 제섭의 죽음이 오자크 마을의 비밀스런 작업와 관계된 것을 눈치챌 수 있죠. 다만 더 큰 실정법(또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까발려지지 않는 것 뿐이지요. 관객이 알 수 있는 사건의 진실은 딱 거기까지 입니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진실은 묻히지도 드러나지도 않은채 리에게 강요된 방관자의 입장은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를 완전히 다 벗겨내면, 리는 더 이상 마을에 발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아버지를 법정으로 호출하는 미국의 실정법과 아버지의 실종(또는 죽음)을 비밀로 묻어야하는 오자크라는 마을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실정법 사이에서 리는 그 어떤 법에도 기대지 않은 채 자신만의 법(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자연법)으로 맞섭니다. 어쩌면 리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인 안티고네를 헐리우드식으로 다시 불러낸 캐릭터일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영화를 봐도 소설의 수식어와 서사를 불러낼 수 밖에 없는 문학덕후인 제 감상입니다. 또한 어쩌면, 한 평자의 말처럼 [윈터스 본]은 실질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남성적인 힘에 맞서는 여성의 힘을 연상시키는 페미니즘 영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윈터스 본]을 매우 재미있게, 인상 깊게보았습니다. 영어로 씌여진 리뷰도 여러 편 보았는데, 위 이미지는 외국의 한 팬이 만들어 올린 영화 포스터에 대한 annotation입니다. 저만큼이나 이 영화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재미있어 보여 같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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