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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5/25 05:00:52
Name   Danial Plainview
Subject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생각을 한 번 모아볼까요?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 전격 취소 발표로 타임라인은 시끄러운데, 티타임은 여전히 평화롭네요. 그래서 한 번 불판을 깔아 봤습니다. 사실은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 날린 게 아까워서...

 그럼 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제 기본적인 생각은 이 글에서 크게 바뀐 바 없습니다.
 https://redtea.kr/pb/pb.php?id=recommended&no=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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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북미정상회담의 핵심은 북한의 [어떤 행동]과 미국의 [어떤 행동]을 교환하느냐에 달려있다. 북한이 낼 수 있는 패를 약한 순서에서 강한 순으로 나열하면 핵 동결, 핵 감축, 핵 폐기가 될 것이고, 미국이 낼 수 있는 패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대북 적대시 정책 변경,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제공, 제제 해제, 경제협력(혹은 원조)이 될 것이다.

 이 때 김정은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핵보유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북한 체제의 숨통을 트게 만드는 것, 즉 핵 동결이나 핵 감축 선에서 미국의 경제지원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정은은 탄두가 아닌 발사체를 논의로 삼아 미국의 본토 타격을 할 수 없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의 폐기 같이 현재 한국이 하고 있는 것 같은 미사일사거리 제한을 아젠다로 들고 나올 수도 있다.

 반면 트럼프의 입장에서 가장 원하는 그림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비가역적인(CVID) 핵폐기가 있기 전까지는 제제 해제, 경제협력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 이후는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CVID한 핵폐기란 트럼프 임기 내에 종료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경제협력의 경우 남한이 공동투자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 기능할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적기 때문이다.

 이것이 북미정상회담의 첫 번째 포인트이다. 서로가 가장 낮은 패를 주면서 상대방의 가장 좋은 패를 따내기 위해 어떤 식으로 움직일까? 국가안전보좌관 볼턴은 (사실 기존의 CVID와 큰 차이가 없는) PVID라는 워딩을 들고 나와 핵물질 뿐만 아니라 생화학 무기까지 의제 대상이 될 것이라 얘기했다. 이는 전형적인 크게 부른 다음에 살짝 깎아주는 방식의 협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북한은 전통적인 벼랑끝 전술을 고수했다. 바로 트럼프 주변의 강경파들 때문에 협상 자체가 어그러지고 있으며, 그 경우 공화국은 이런 무의미한 협상에서 빠져나가겠다는 발언 말이다.

***

 북한은 대북 적대시 정책 변경이나 불가침조약 이상의 것을 원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이유로 불가침협정에 준하는 것을 이미 받은 전례가 있음에도 북한은 그 판에서 빠져나간 바가 있기 때문이며 두 번째 이유로는 핵무기만큼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내 손 안의 몽둥이'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최소한 제제 해제와 그에 뒤따르는 에너지 지원, 경제협력을 원한다고 보는 게 옳다. 좋다. 이것은 남한과 미국 모두 충분히 줄 수 있는 용의가 있다. 문제는 이런 북한이 어디까지 내줄 가능성이 있느냐이다. 즉, 질문을 바꿔보면 이렇다. [북한은 정말 CVID한 핵폐기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정상회담은 일반적으로 이미 실무진들이 합의한 사항을 정상이 합의해 약속의 권위를 높이는 절차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불과 정상회담이 3주 안쪽으로 들어온 상태에서 실무진 접촉은 전혀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고위급으로 보이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은 사진 한 장만을 남긴 채 내용은 두리뭉실하게 꾸며졌다. 그 말은 정상회담 전까지 아무 것도 합의되지 않을 확률이 높고, 결국 정상회담에서 양측 지도자가 합의안을 도출하고 나면 그 뒤의 실무접촉으로 그 약속의 구체적인 단계를 협의하는 방식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CVID한 핵폐기의 진짜 문제는 디테일에 달려 있다.

 CVID한 핵폐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실무적인 이야기까지 간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의 수많은 협상 끝에 항상 문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범위(scope), 검증(verification), 기간(duration).

 첫 번째로 범위의 문제인데 이는 양쪽 모두 큰 이견 없이 합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플루토늄만을 포함했다가 개구멍 만들어 준 것 아니냐는 비난을 들었던 94년 제네바 합의 이후로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HEU; Highly Enriched Uranium)등의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포함한 핵 관련 활동, 핵물질 및 모든 핵물질 제조 시설, 핵무기 제조 시설, 핵탄두 등이 포함될 것이다. 

 문제는 검증과 기간이다. 당장 농축우라늄 생산을 위한 원심분리기의 소재부터 문제가 되는데,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필요한 이 원심분리기는 UF6라는 기체 우라늄을 회전시키면서 우라늄 235를 농축시킨다. 회전 시간을 짧게 하여 우라늄 235의 농도가 3%정도가 되면 저농축우라늄이 되어 핵 발전용으로 쓰이지만 회전 시간을 길게 하여 우라늄 235의 농도가 90%의 고농축우라늄이 되면 무기 생산에 필요한 우라늄이 되는 것이다. 이 원심분리기는 원통 모양으로 지름이 20~30cm정도밖에 되지 않아 5,000개 정도를 별로 크지 않은 시설에 보관할 수 있다.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시설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은닉이 쉽고, 따라서 이 시설의 위치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사찰단이 찾아내기 쉽지 않다. 따라서 거증책임은 북한에게 있게 되는데, 완전한 핵폐기를 위해서는 북한이 신고한 시설 외에 아무 곳이나 사찰단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전방위적이고 불시적인 모니터링 말이다. 그런데 의혹이 있으면 검증 과정에서 사찰 대상 시설이 확대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군사적, 안보적 이유에서 대립이 생겨 해결의 프로세스로 보였던 것은 위기의 프로세스로 돌변한다. 이런 과정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북한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일 각오를 해야 한다. 여기에 북한의 고민이 있다. 신뢰를 위해 밟아야 할 단계가 아직은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핵 폐기의 결단을 할 수 있겠는가? 

 다음 검증의 문제는 이미 생산된 핵물질의 양과 핵탄두의 수에 대한 것이다. 북한이 어느 정도의 핵물질/핵탄두를 만들었는지는 김정은 외에 아무도 모른다. 핵물질 제조시설조차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북한이 1년에 몇 kg을 생산하는지조차 정확하지 않으며 한 발에 정확히 몇 kg의 핵탄두가 사용되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플루토늄의 경우 1발에 6~8kg 정도가 사용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술이 충분히 숙련될 경우 4kg으로도 1기를 제조할 수 있다고 알려짐) 즉, 북한의 핵폐기 과정이 끝났음을 선언하려면 북미 양국이 200명 남짓한 IAEA 사찰단을 동원하여 북한 전국을 샅샅이 뒤진 후 핵 제조시설이 없으며 핵탄두는 이 정도가 생산된 것이 맞다고 정치적으로 합의를 보는 외엔 없다. 

 그 다음으로 기간의 문제는 CVID라는 것은 북한이 "앞으로도"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찰단이 상주해야 한다는 문제이다. 초강경파 볼턴은 이에 우리가 원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들어가서 사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면, 과연 어느 정도의 기간이 현실적인 기간이 될 것인가?  

 그러므로 CVID한 핵폐기는 매우 실무적인 사안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결단에 달려 있음이 명백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내 불안감은 핵협상이 좌초될 가능성보다는 실무를 포기하는 데 있었다. 트럼프가 성과에 눈먼 나머지 졸속으로 폐기를 진행한 이후, 핵 위협이 실제로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북핵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해 버리는 경우 가장 큰 피해자는 남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쟁점은, 정상회담에서 CVID한 핵폐기와 그에 따른 상응조치가 합의된다 해도, 어느 단계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핵폐기와 제제 해제, 경제협력이 보상안으로서 교환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언제] 그 보상을 실시할 것인가? 

 한 가지 예상답변은 행동 대 행동이라는 원칙을 더 세분화하여 행동을 가역적 조치, 준가역적 조치, 불가역적 조치로 나눈 다음 상응조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협상 개시와 같은 조치는 가역적 조치로서 북한이 접촉에 나서면 미국도 접촉에 나서고, 준가역적 조치로서 제제 해제, 제도적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북한의 위반이 발견될 경우 다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 불가역적 조치로서 경제 협력/지원, 북한의 핵 폐기가 완료됨과 동시에 상응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협상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핵무기의 금지는 소위 핵의 평화적 이용(=원자력) 역시 금지하는 절차이므로 이에 상응하는 조치로 반드시 에너지 지원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식량과 같은 상대적으로 끊기 쉬운 지원부터 시작하여 사찰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에너지 지원도 확대해 나가는 방법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

 여기까지 썼는데 오늘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 전격 취소를 발표했다.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협상이란 항상 체급차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지금 트럼프의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를 평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에 현재 행동은 올바른 방향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럼프는 취소를 발표했다. 왜? 

 첫 번째 가설은 이 역시 트럼프가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블러핑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든 지금, 도리어 찬물을 뿌림으로써 협상이 열리느냐 열리지 않느냐는 미국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과시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트럼프는 다시 북한이 숙이고 들어올 것을 바라고 있으며, 협상장에 나설 것이다. 이 가설이 맞다면 위험 요소는 북한은 1인독재 하의 신정통치국가이며, 그들이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흠집내면서까지 다시 굴복하고 협상장에 들어오겠냐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들어가는 임기응변식 정상회담이라는 판 자체가 북한에게 유리한 지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정상이 직접 만났음에도 아무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트럼프가 받게 될 비난도 크다. (김정은에게는 감히 비판할 세력이 없다) 예컨대 고이즈미는 2차 북일정상회담 이후 식량지원에도 불구하고 납북자 다섯 명을 돌려받는 데 그치자 공항에서 납북자 가족들에게 수모를 당한 바 있다. 그 외에 중국과의 충분한 사전조율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북한이 기존의 이익을 크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을 수도 있다. 북한이 정말로 노리는 것은 북핵 문제 해결이 아니라 과거 북한이 중소갈등 사이에서 이득을 취했던 것처럼,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중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이나 제제해제 의사 표명을 한다면 이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내가 생각한 가설은 여기까지이다. 다른 가설은 무엇이 있을까? 

 또한 가설 외에 확실한 것 두 가지가 있다. 

 1. 백악관 공동 성명은 외교문서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정제되지 않았고 표현은 천박하다. 이는 그의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면을 보여준다.
 2. 한미정상회담 직후에 이런 발표를 냈다는 건 북미정상회담을 중재하던 문재인의 노력을 속된 말로 물먹였다고 봐야 한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시사한다. 중재자로서의 한국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 혹은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말아먹은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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