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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0/09 00:31:01수정됨
Name   그림자군
Subject   좋아하는 시 모음
1.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로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박준 - 환절기



2.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 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줄곧
  어쩌다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같은 법칙들과
  죽을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
  3일, 5일, 6일, 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심보선 - 인중을 긁적거리며



3,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 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 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는 것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도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다는 걸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는 걸

  천양희 - 기차를 기다리며



4.
  오늘 아침에도 남의 불행을 통하여
  나의 불행을 위로받으려고 밥을 먹었다
  오늘 아침에도 좌변기에 앉아
  상처받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당신의 말씀을 변기 속으로 흘려보냈다
  나는 물 위를 걸은 예수의 흉내를 내다가 익사한 적이 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다가 만들지도 못하고
  서너 차례 뺨을 얻어맞은 적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기쁜 날이 죽는 날이라고
  누가 칼로 이슬을 자르며 웃는 웃음을 따라 웃다가
  느닷없이 몰매를 당한 적도 있다
  내가 고통받을 때마다 당신도 함께 고통받는다는
  당신의 말이 나는 아직 의심스럽다
  나의 불행을 통하여 남이 위로받기를 원하며 밥을 먹고
  흰 거울을 보며 푸른 넥타이를 매기 전에
  좌변기에 즐겁게 앉아 있으면
  오늘 아침에는 불행한 사람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도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도 없다.

  정호승 - 아침에 쓴 편지



5.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착어: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6.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정일근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7.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황동규 - 쨍한 사랑노래



8.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때 한 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 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 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허형만 - 사랑論



9.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번 열어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기형도 - 조치원



10.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 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 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의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

  원재훈 -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11.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재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

  최정례 - 냇물에 철조망



12.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사람, 너는 누구냐
  밤하늘 가득 기어나온 별들의 체온에
  추운 몸을 기댄다
  한 이름을 부른다
  일찍이 광기와 불운을 사랑한 죄로
  나 시인이 되었지만
  내가 당도해야 할 허공은 어디인가
  허공을 뚫어 문 하나를 내고 싶다
  어느 곳도 완벽한 곳은 없었지만
  문이 없는 것 또한 없었다
  사람, 너는 누구냐
  나의 사랑, 나의 사막이여
  온몸의 혈맥을 짜서 시를 쓴다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별처럼 내밀한 촉감으로
  숨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나는 아름다우냐

  문정희 - 사람에게



11
  • 받침이 어떻든 다 아름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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