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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8/27 08:00:29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영국 생활 이야기 (3): 간지
1. 상징 자본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이자 철학자이자 사학자이자 문화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양반이 있습니다. 이 양반이 다작으로 유명한 가운데 특히 히트를 친 저서가 몇 권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영역본 제목으로) Outline of Theory of Practice (실천이론 개론?) 입니다. 본서는 북아프리카의 모 부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사회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행위들에 대한 이론적 해석을 제공하는데요, 그 와중에 부르디외가 사용한 상징 자본 (symbolic capital) 이라는 용어가 후에 학계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예컨대 이렇습니다. A가 B에게 선물을 줍니다. 그런데 이게 통상적인 수준의 선물이 아니라 꽤 값어치가 나가는 선물입니다. 가격표는 없지만 B는 이 선물이 값나가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B는 고마움과 부담을 동시에 느끼고, 결정적으로 A에 대해 약간의 부채감과 미안함 같은 걸 느낍니다. 이 감정이 유지되다 보면 A가 왠지 좀 좋은 사람 같아 보이고 좀 대단한 사람 같아 보입니다. 뭔가 아우라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이런 상황에선 A가 무얼 부탁할 때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자기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달라거나 하는 부탁은 더욱 거절하기 어렵지요.

A는 단순히 B에게만 선물을 준 게 아닙니다. 마을 공용 재산으로 약간의 땅을 기부하기도 하고,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잔치에 소 한 마리를 턱 기부하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 전체가 A로부터 약간의 아우라가 나오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제 이런 상황에서 A는 딸의 혼처를 잡습니다. 이 때 A가 획득한 아우라는 A네 가족의 재산이나 족보 상의 수준보다 한 급수 높은 혼처를 잡는 데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이 결혼식은 또 A 입장에서 약간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로 호사스럽게 치러집니다. 이 성대함은 A의 아우라에 큰 보탬이 될 거고, 들어오는 축의금 양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아우라, 이 위신을 부르디외는 상징 자본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자본]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 상징 돈도 아니고 상징 자산도 아니고 상징 자본일까요. 돈이나 자산은 꼭 그게 투자하고 굴려서 이자를 물어오라는 법이 없지만 일단 [자본]이라고 하면 이건 이미 투자와 증식 개념이 들어간 겁니다. A가 딸의 결혼을 앞두고 지출한 모든 돈은 단순히 낭비된 게 아니라 투자된 것이요, 이는 간단히 말해 현금을 내고 채권이나 주식을 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이 때 A가 돈을 주고 획득한 자본이 채권이나 주식이 아니라 뭔가 더 추상적인 것이요 상징적 가치로만 표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 자본이라고 부를 수 있구요.

투자가 있는 곳에 투자금 회수가 있지요. 이렇게 획득한 상징 자본은 마치 채권에 이자가 붙듯 증식이 가능합니다. A는 이렇게 획득한 아우라를 통해서 좋은 혼처, 더 많은 축의금, 마을 사람들의 존경심, 상류 사회로의 진입 등을 얻을 수 있고 이는 그 어떤 다른 형태의 자본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오직 상징 자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2. 영국의 상징 체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서든 이 상징 자본은 끊임 없이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각종 훈장이 그렇고, 기부금이 그렇고,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건물 이름을 지어주는 게 그렇고, 스포츠 구단의 영구 결번이 그렇고, 홍차넷에 글을 쓰는 게 그렇고 등등. 모두 돈과 시간과 노고를 할애한 끝에 획득하는 무형의 자본이라는 점에서 상징 자본이라고 할 만합니다.

영국인들은 이 상징 자본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능합니다. 국가가 나서서 일반대중의 심리를 조작해서 그렇다고 봐도 좋고, 그보다는 그냥 문화 자체가 위신과 명예에 높은 값을 쳐주며 이에 발맞추어 그에 어울리는 국가 수준의 상징 체계가 성립했다고 봐도 좋습니다. 혹은 국가와 대중 간에 서로 주거니 받거니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좋구요.

왕실로부터 어떤 작위를 받고 어떤 훈장을 받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작위를 받고 훈장을 받으면 타이틀이 달라집니다. 예컨대, 전에는 신용카드 전면에 Mr. John Smith 라고 써있었다면, 작위를 받는 순간 Sir John Smith가 되는 거지요. 또 공적인 자리에서 이 달라진 지위에 걸맞게 호칭이 달라집니다. 호텔에 투숙한다고 합시다. 전에는 호텔 벨보이가 "Mr. Smith, 뭐 도와드릴 것 없나요?" 하더니 이제는 "Your Excellency, 뭐 도와드릴 것 없나요?" 하고 말합니다. 장관이 되었다고 합시다. 어디가서 소개할 때마다 사회자나 진행자가 꼬박꼬박 "Your Right Honourable, 장관 of XX부, John Smith" 라고 불러줍니다.

작위 자체도 매우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작위 수여와 동시에 영국 귀족이 되는 것이므로 자동으로 귀족으로서의 다양한 권리나 의무가 따라옵니다. 의무 중에는 군대 지휘의 의무 같은 것도 있는데요, 예컨대 한 작위는 그 이름이 C.B.E. 입니다. 무려 Commander of British Empire의 약자지요. 대영제국 지휘관이라니... 간지좀 보세요. 뭐, 물론 명목상의 의무지요. 실제로 시키진 않는답니다. 참고로 전직 맨유 감독 퍼기경, 맨유 레전드 보비 챨튼 경이 바로 이 C.B.E 작위 보유자입니다.

이런 명예와 위신은 사람들이 그 상징 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한 실제적인 영향력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그 상징성을 인정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해당 상징이 의미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영국 사람들은 실제로 이 체계를 인정하고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공산주의 운동을 오래 한 활동가인데요, 그의 자서전을 보면 형으로부터 영주 (lord) 작위를 물려받기 전과 후로 본인의 공산주의 활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세히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에는 집회라도 하고 있으면 경찰들이 무식하게 달려들어 다 잡아가더니 영주가 되고 난 후에는 털 끝도 안 건드리더랍니다. 그래서 나중엔 경찰이 오기만 하면 다른 집회 참가자들이 "이 분은 로드에요." 라고 친절하게 경찰관들에게 알려주고 고기방패 (?) 로 잘 써먹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3. 옥스브리지의 간지

대학교로 말하자면, 이 위신과 영예의 집합체 같은 곳이 옥스브리지, 그 중에서도 옥스포드입니다. 크게 보면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엄밀하게 따졌을 때 케임브리지가 약간 더 학구적인 분위기인 반면 옥스포드는 약간 더 정치인과 관료들의 배출구요 사회 엘리트들의 재생산의 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들이 이곳에서 배우는 건 단순히 전공 지식이 아닙니다. 서로 교류하는 법, 공식 석상에서 식사하는 법, 스포츠 활동, 라틴어로 기도하는 법 등등... 굳이 과목으로 정해져있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엘리트의 사회생활을 습득하게 됩니다.

자, 여기서 문제는 옥스브리지가 제공하는 이러한 특권(?) 들이 오직 영국 사회 안에서 자라나고 활동하고 늙어가고 다시 애를 낳아 기를 영국인들에게만 간지고 혜택이지 유학생들, 특히 대학원 유학생들에겐 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연구능력으로만 따지면 영국 상위권 대학들 간에 결정적인 차이 같은 건 없습니다. 지도교수가 누구인지, 그양반 정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도만 신경쓰면 되지 뭐 무슨 나중에 영국 정치계에 투신할 것도 아닌데 간지 신경 쓰게 생겼습니까.

그런데, 이 간지가 엉뚱한 데서 터집니다. 옥스브리지의 아우라는 영국이라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만 유효한 것인데 그게 국경을 건너면서, 영국이라는 특수한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면서, 이유는 은폐된 채 오직 그 아우라만 남게 됩니다. [누구누구가 케임브리지 출신이래. 와 쩐다. 왜? 왜긴 왜야, 케임브리지잖아.] 뭐 대충 이렇게 되는 거지요 ㅡㅡ;

영국인들은 원래가 상선 굴리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장사를 참 잘합니다. 옥스브리지는 자신들의 국내향 상징력이 국외에서도 먹힌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이 점을 이용해 외국인들을 적극 불러옵니다. 옥스브리지 출신이라는 간지 넘치는 선물을 줄테니 어서 와서 자국인보다 너 댓 배는 비싼 외국인 등록금을 내고 가라는 거지요. 이 때 제일 큰 고객은 물론 미쿡인입니다. 돈이 많잖아요 ^^; 또 간지라는 게 매우 중독적인 면이 있어서 부모세대가 이 맛을 시음하면 반드시 자녀들에게도 같은 걸 먹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대손손 고객이 되지요.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부녀 옥스포드 유학생인 빌 클린턴과 첼시 클린턴입니다.




4. 상징 폭력

누군가가 한 번 간지 넘치는 상징을 손에 넣었다고 합시다. 그의 다음 선택은 당연히 자신이 보유한 상징의 힘을 더 찬양고무하고 그걸 보유하지 못한 다른 이들을 모욕주고 핀잔 줌으로써 자신의 자본을 최대화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돈을 벌어 아파트를 한 채 산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그 아파트 집 값 올리기 위해 주민회 활동 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이버 부동산에서 자기 아파트 좋은 아파트라고 댓글을 단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처럼 물리력이 아닌 상징의 차원에서 행사하는 폭력을 부르디외는 상징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나 자기 집 집값이 올라가길 바라지 내려가길 바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이 유학한 국가, 유학한 대학교의 위신, 평판, 랭킹이 올라가길 바라지 내려가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국에 유학중인 외국인들이 영부심을 부리는 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좀 재수 없는 건 사실이지요 -_-;; 폭력이잖아요. 기성용이 영부심을 부렸을 당시 국내 여론이 그토록 뜨거운 반응을 보였던 것은 그의 멘션들이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상징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5. 결론

며칠에 걸쳐 쓰다 보니 두서가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서둘러 결론을 내려보자면, 영국 유학생 출신들 혹은 영국 대학들 본인이 자랑하는 위신, 평판, 아우라, 간지는 잘 구축된 허상이 아니면 조금 과장된 실상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걸 유통시키고 있는 걸 발견하시거든 절대 당황하지 마시고 즉시 가까운 파출소나 국정원에 신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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