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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2/18 23:06:23
Name   The xian
Subject   스물 다섯 살까지 저는 한나라당의 지지자였습니다 (5)
(4) 에서 계속됩니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문제사병 취급을 받았습니다. 혹시나 문제사병 취급을 받은 게 정치성향의 변화 때문이 아닌가 하고 예상하셨다면. 아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나이가 많은 것만으로도 위험군이었습니다. 게다가 원래 운동엔 젬병이었고 20대 초중반부터 무릎과 허리가 안 좋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문제사병 취급 받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문제될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있었던 지지 정당이 없어졌다 뿐이지 어릴 때부터 학교 교육과 가정 교육으로 뿌리박은 반공정신은 어디 가지 않았습니다. 훈련소에서 다른 훈련병들이 간부가 주적이라고 농을 치든 말든 저는 북한이 주적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늙은 훈련병이 농담을 못 알아듣는다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성향에 대해 누가 묻는다 해도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을 딱히 입 밖에 낼 이유도 없었습니다. 시쳇말로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만 당시의 정훈교육은 먼저 간 군대 동기들 사이에서 들었던 정훈교육 내용과는 달리 - 물론 정권이 변한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겠지요 -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는 내용 일변도보다 분쟁이 세계 각지로 확대되고 있고 군의 유지 이유도 북진통일이 아닌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식으로 변했기 때문에 제가 당시 반공주의자가 아니라 해도 큰 거부감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에 혈안이 된 것은 현역 시기나 동원 훈련 시기보다도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 때 받았던 예비군 훈련때의 교육이 가장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교육은 적폐청산 과정의 수사를 보면, 국정농단 세력에 빌붙은 수구세력 이익단체들이 개입했다는 게 드러난 지 오래지요.)

해가 바뀌어 스물 여섯에 자대에 가 보니 저보다 나이 어린 병사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를 데려온 중사님조차 저보다 나이가 젊었습니다. 당연히 자대에서도 저는 문제사병이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성격 문제나 훈련에 못 따라가는 몸 상태 같은 제 자신의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그나마 약간은 이름 있었던 출신 학교 덕에 행정 일을 하게 되었고 어찌어찌 속된 말로 '짬'이 차게 됩니다.


하루 하루 시간이 가서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2002년에도 저는 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드컵의 열기니 거리응원이니 하는 걸 잘 모릅니다. 나중에 그 당시 영상을 보고 '아. 그랬구나' 하는 정도지요.) 문제사병이었고, 성격은 좀 나빴고 내성적이었지만 일만은 그럭저럭 펑크 안 내고 한 편이었기 때문에 저는 딱히 다른 보직으로 가지 않고 말년을 행정반에서 야근으로 보냅니다.

분대장도 못 달아서 별다른 권력도 없었고 있어도 별로 부릴 생각도 없었습니다. 인망은 없었지만 애초에 생기지도 않는 인망이 뭘 잘 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군대에 있는 사람들과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고 싶던 것도 아니었으니 별 신경 안 썼습니다. 다만 당시 동기들이나 몇몇 후임들이 늙은 선임, 늙은 동기인 저 때문에 피해 봤던 것은 두고두고 미안할 뿐입니다. 그들은 아마 저를 보고 싶지 않거나 죽이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요.


어쨌거나. 말년이 되어 하루하루 전역일자를 계산해도 될 때쯤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됩니다. 네. 16대 대통령 선거입니다. 당시 부대 간부들 사이에서는 열이면 열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이야기들이 나왔고 병사들에게도 공공연히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라는 식의 간접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반 부대에서도 이 지경인데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불법행위에 가담한 충견이 된 기무부대 등은 오죽할까 싶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고. 2002년에는 남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의 상대가 좀 생소한 인물입니다. 노무현 후보랍니다.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은 알아도 노무현? 물론 제가 그 당시 노무현이란 정치인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어떻게 하다가 그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쏭달쏭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같은 연설을 제대하고 나와서, 그것도 한참 뒤에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부대 간부들은 노무현 후보를 얕잡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쨌든 실제 선거일보다 부재자투표는 먼저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선 날짜보다 먼저 부재자투표를 하러 갑니다. 그런데 부재자투표일까지 몇번을 찍으라는 말이 - 물론 그것이 공적인 지시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 간부들 사이에서 나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모르겠는데 저는 왜 그랬는지 그 때는 그 말이 좀 많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찍으라는 번호를 안 찍고 '다른 번호'를 찍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다른 번호'의 후보자는 당선됩니다. 몇몇 간부들은 빨갱이 운운하는 헛소리를 하거나 나라가 어떻게 되려느냐 같은 소리를 했지만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그런 소리를 했었죠) 저는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한 말년 병장이 16년 전 단순한 반발심에서 찍지 말라는 후보에게 던진 표가 그 사람을 흠모하게 되는 계기가 될 지 누가 알았으려나요. 어쨌거나 그 표는 제가 한나라당 이외의 후보자에게 던진 첫 번째 표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 이후 저는 제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대하고 난 뒤. 다 잃어버린 것들은 마음 속에 접어 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의 번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 다음 편, 6편이 마지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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