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4/04 13:06:20수정됨
Name   메아리
Subject   서평 『가나』 – 정용준
  정용준, 1981년생, 2009년 현대문학 「굿나잇 오블로」로 등단, 대표작 「떠떠떠, 떠」 , 「가나」. 이 단편소설집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두 작품은 「떠떠떠, 떠」와 「벽」이다.

  「떠떠떠, 떠」는 말더듬이와 간질 발작 환자의 사랑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말더듬이 심했던 주인공은 그 열등감 속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초등학교 시절, 간질 발작으로 쓰러졌던 여자 동창을 놀이 공원에서 동물 탈을 쓴 캐릭터 분장을 하고 만난다. 그 여자애는 팬더, 주인공은 사자다. 주인공은 여전히 말을 못하고 여자애는 가끔 발작을 한다. 발작을 할 때마다 그녀는 탈을 뒤집어쓰고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고 그냥 깊은 잠에 빠지는 거라고 말한다. 제발 불쌍한 표정으로 그걸 보고 있지 말아달라고 한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가 발작에 빠지고 주인공이 그걸 보며 괴로워한다. 어떻게 저 표정이 고통스럽지 않단 말인가, 하며 그녀의 고통에 동조한다. 그리고 발작에 빠진 그녀를 향해 말한다. “떠떠떠, 떠, 사, 사라, 사랑해.”

  「벽」은 노숙자들이 납치되어 서해의 외딴 고도 염전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 염전에 팔린다. 염전의 지배집단은 그들의 한쪽 발목을 잘라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일하는 중에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어길 시에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며 일꾼들을 통제한다. 그런데 원래 일꾼이었다가 반장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반장5도 그런 사람이다. 지배 집단은 반장 후보들로 하여금 일꾼들을 때려죽이게 하여 공범으로 만들어 그들의 수족으로 부린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시체들을 얼려 벽을 만든다. 하지만 일꾼9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다가 맞아 죽는다. 주인공 21은 그런 9를 때려죽이고 반장이 된다. 그리고 뒤로 들어오는 일꾼들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을 가한다.

  아픔을 가진 이들은 쉽게 가까워진다. 그것은 아픔이 연대감을 형성하는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같은 종류의 아픔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픔은 우리로 하여금 연대를 쉽게 하도록 한다. 왜 그럴까? 아픔은 무엇이길래 우리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까? 「벽」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이 보인다. 끌려온 노숙자들은 비록 말은 할 수 없지만 심정적 연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떠떠떠, 떠」에서는 그 연대가 사랑으로 발전한 반면, 「벽」에서 그 연대는 깨지고 만다. 염전의 지배자는 그 연대를 깨기 위해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한다. 하나는 공포이고, 만일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상대적 쾌락을 제공해줌으로써 그 연대를 해체시킨다. 고통은 사람들을 뭉치게 하고 쾌락은 흩어지게 한다.

  아픔은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의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 현재 내가 아픔에 빠져 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아픔을 겪은 후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게 되면 내가 겪은 아픔이 내놓은 길을 따라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기회를 만나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은 의외로 많은 것을 준다. 그것은 자의식의 단단한 껍질에 균열을 내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자의식이란 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연대에는 부정적이 된다.

  연대하기 위해 아플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아픈 것이 필연이고, 그 아픔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필요 역시 없다. ‘아픔 = 연대’도 아니다. 아픔이 연대가 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험난함이 있다. 그 험난함 뒤에 준비되어 있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한 이라면, 자신의 아픔을 쉬이 폐기하지 마라. 아픔을 통한 성찰이야 말로 세계를 향한 다른 입구일지도 모르니까.



3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048 게임[LOL] 4월 8일 월요일 오늘의 일정 2 발그레 아이네꼬 19/04/07 3067 3
    9047 음악[클래식] 쇼팽 에튀드 10-1 Chopin Etude Op.10, No.1 ElectricSheep 19/04/06 3156 1
    9046 게임 [LOL] 4월 7일 일요일 오늘의 일정 14 발그레 아이네꼬 19/04/06 3842 2
    9045 음악차에 술탄 8 바나나코우 19/04/06 3376 1
    9044 일상/생각봄의 기적, 우리 동네 6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9/04/06 3900 24
    9043 과학/기술화학 전공하면서 들은 위험했던 썰 몇가지 29 Velma Kelly 19/04/05 5946 15
    9042 도서/문학사마달, 일주향 작가의 천마서생 3 덕후나이트 19/04/05 6911 0
    9041 음악[팝송] 위저 새 앨범 "Weezer(Black Album)" 2 김치찌개 19/04/05 3645 2
    9040 기타요즘 보고 있는 예능(3) 2 김치찌개 19/04/05 3721 0
    9038 게임(스타1) 최강자와 어울리기 - 같이 놀자 ! 8 알료사 19/04/05 4321 11
    9037 영화생일 감상 정리 2 알겠슘돠 19/04/04 2916 2
    9036 일상/생각평온한 마음 6 하얀 19/04/04 4000 21
    9034 도서/문학서평 『가나』 – 정용준 2 메아리 19/04/04 5823 3
    9033 음악[클래식] 포레 시실리안느 Sicilienne, Op. 78 ElectricSheep 19/04/03 4523 4
    9032 일상/생각콘텐츠 개발 국비지원사업에 대한 소고 4 메존일각 19/04/03 3473 6
    9030 게임너 정말 나쁜아이구나. 26 사나남편 19/04/03 7152 10
    9029 사회제1저자, 교신저자, 학회, 자리싸움, 그리고 관행 24 烏鳳 19/04/03 6168 22
    9028 의료/건강의사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 2. 진단=사후확률Up & 진단의 두 축 6 세란마구리 19/04/03 4348 10
    9027 도서/문학시험기간에 보면 좋을 아마추어 작가들의 만화 추천 4 BiggestDreamer 19/04/03 7327 6
    9025 영화[MCU] 엔드게임 이후의 마블이 더 기대되는 이유. 20 Cascade 19/04/02 4736 5
    9024 여행2년뒤에 써보는 산티아고 순례길 후기 4 아재 19/04/02 5617 6
    9023 스포츠[MLB] 보스턴 레드삭스의 현재와 향후 페이롤 6 AGuyWithGlasses 19/04/02 4676 4
    9021 스포츠폴로 그라운드 잡설 청춘 19/04/01 5421 5
    9020 IT/컴퓨터GPU 2개로 하나는 게임, 하나는 녹화하기 (OBS) 5 메리메리 19/04/01 10151 6
    9019 방송/연예마리텔2 1-1 8 헬리제의우울 19/04/01 4145 1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