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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5/03 01:33:56
Name   트린
File #1   c0022325_5037b3e886765.jpg (86.5 KB), Download : 20
Subject   [단편] 갈림길



  200만 년 전 지금의 중국 광시성 깊고 아늑한 숲에 판당이라는 판다가 살고 있었다.
  당시 판다는 인간과 호빗, 또는 10년 전 비빔면 크기 대 10년 후 비빔면처럼 다른 것은 다 똑같지만 덩치만 현재
판다의 딱 절반 크기를 가진 동물(* 이 고대 판다들은 아일루포다 마이크로타라는 학명, 일명 피그미 자이언트 판
다라고 불린다.  http://en.wikipedia.org/wiki/Ailuropoda 항 참조.)이었다.
  판당은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이 풍부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느 판다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친구였다.


  판당은 부드러운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열다섯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이것저것 보고 생각하느
라 그리 되었다. 판당은 다른 판다에 비해 자신이 쓸데없이 너무 바쁘고 치열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해서 좀 더 여유롭게, 좀 더 느긋하게 살기 위해 얼른 낮잠을 자야겠다고 마음먹은 뒤였다.
  그는 간간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게 다 좋았다. 판다라서 좋았고,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
실도 좋았고, 배터지게 대나무를 먹은 뒤여서 좋았다.
  슬슬 잠이 오려 한다.
  슬슬... 슬슬...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 약간의 권태가 있을 때 아이디어는 샘솟는 법이다. 뭐, 다른 종족은 어떤지 몰라도 판다
인 판당은 그랬다.
  판당은 가물가물한 정신 속에서 얼마 전에 대나무 숲에 있을 때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번개가 아래로 내리꽂히던
광경을 떠올렸다.
  번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고 가장 굵던 대나무에 직격했다. 거센 비에도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윗둥에 불이 붙어
온도가 뜨거워지자 아랫둥이 과열되더니 곧 마디마디가 굉장히 큰 파열음을 내며 터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폭발로 잘
게 잘린 섬유소들이 불쏘시개처럼 변해 불똥을 품은 채 아래로 떨어졌다. 내려앉은 불똥은 돌풍이 불면서 오래되어
건조한 대나무잎과 골고루 섞어주었다.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얼마 못 가 꺼졌지만 일부에서는 촘촘히 자란
대나무들이 비를 막아주어 불이 그곳을 먹어치우는 데 일조했...


  '...대나무 맛나. 판동 좋아. 걔랑 씨름하는 거 재밌어. 판당당 예뻐. 판당당은 정말 상냥해.
  판당당이랑만 함께 있고 싶어. 다른 애들이 오면 싫어. 하지만 판당당이랑 이케이케 하는
  건 귀찮아. 힘들어. 그냥 둘이서 씨름하고 웃는 게 재밌...


  ...판당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새 잠이 들었던 것이다. 판당은 중요한 갈림길에서, 선택의 순간에서 잠을 자버
린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오잉?"


  무슨 갈림길? 무슨 선택? 높은 산에 막혀 올라가지 못한 구름이 검어지기 일쑤인 이곳에서 한 달에 잘하면 열 번도 더
보는 번개와 그 부록인 불을 떠올리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런 생각을 했을까.
  판당은 의아해 하면서도 왠지 불에 대해서 더 생각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더 길게 생각해서 맨 마지막 결론
까지 시원스레 내버리면 굉장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긴 혜택은 판당 자신은 물론 다른 판다에게도
대대손손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뭐, 아닐 수도 있고.
  판당은 결론을 내고 얼른 자자 싶어 코를 긁적거리면서 억지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왜 그랬을까? 왜 수많은 장면 중에서 유독 그 장면을 떠올렸을까? 혹시 그 후의 일 때문일까?


  번개가 떨어진 다음날 판당은 호기심에 아직도 조금씩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땅을 앞발로 파헤치다가 용케 타지 않은
죽순 여러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죽순은 노랗게 익어 평소와는 다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판당은 잠시 망설이다가 먹어 보았다.
  처음 느끼는 맛이었다. 무척 맛있었다. 얼른 먹고 하나 더 먹자 싶어서 판당은 죽순을 먹는 속도를 높였다. 입에서 살
살 녹았다. 판당은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땅에다 그러모았던 죽순을 껴안았다. 평소 느긋하던 그가 양손에 죽
순을 쥔 채, 입을 재게 놀리자 다른 판다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호기심을 보였다.
  판당은 등을 돌리고 허리를 아래로 숙였다. 이 맛있는 것을 혹시나 누구에게 빼앗길까 봐 걱정이 들었다. 다른 판다들
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와 대체 얘가 무얼하나 알고 싶어했다.
  판당은 위기감에 앞으로 구른 뒤 잽싸게 달려나가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물론 잽싸게란 주관적인 느낌이고 판다인 판당이 달려봐야 엉기적거리면서 잠시 앞서는 것뿐이었다. 판당은 익은 죽
순을 씹어삼키는 내내, 반 발짝 차이로 추격자 대여섯 마리의 콧잔등과 콧김을 느껴야만 했다.


   "아!"


  판당은 눈을 홉떴다.


   "아아!"


  왜 불에 대한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서 자꾸만 왜 의식을 건드리는지 이제 알았다. 판당은 졸린 가운데에도 드디어 제
대로 된 결론을 낸 자신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문제는 식사예절이었다.
  되짚어 보니 너무 교양이 없어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판다 털만큼 많은 나날들에서 신나게 자다가 일어나 보
면 구운 죽순은 수십, 수백, 수만 번 생길 텐데 그걸 친구들 나눠주지 못하고 혼자 욕심쟁이처럼 신나게 처먹었단 말인가.
  회상이 먹는 순간에 집중되자 재가 흰 배에, 그리고 그 위에 뒹굴면서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묻은 기억까지 떠올
랐다. 꼬락서니가 아주 가관이었을 것이다.
  판당은 부끄러움에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몸을 돌려 엎드려 누웠다. 풀들이 얼굴을 콕콕 찌르는 게 반성하라고 타이르
는 것 같았다.
  판당은 상상을 거듭하여 예의 바른 판다와 그렇지 못한 판다 사이에는 다른 이득이 있다고 추측했다. 전자는 점잔빼느
라 단기간에는 약간 손해를 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리하며, 후자는 그 반대로 장기적으로는 손해를 볼 것 같았다.
  친구들의 손가락질이 평판으로 남아 아마 그런 결과를 만들 것이다. 판다는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판다는 그러한 갈림길에서 어떤 위치를 선택해 살아가야 할지 결정해야만 한다. 이 선택은 개인은 물론
대대손손 이어져 전자와 후자 사이에 분명한 차이로 남을 것이었다.


   '그래. 난 예의바르게 살 거야. 내일은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징.'


  판당은 결론을 내린 즉시 잠들었다.


  판당이 내린 결정은 판다에게 영구히 남았다. 결과적으로 불을 통해 예의의 장점을 깨달은 판다들은 서로에게 관대해
지고 더욱 느긋해졌다. 그리고 견제하거나 서두르지 않아 남는 시간에 더욱 열심히 대나무를 먹어치웠다. 그 결과 판다
들은 과거보다 두 배로 커지고 뚱뚱해질 수 있었다.  
  한편 200만 년 전 최소 여섯 종의 유인원 중 한 종으로서, 아프리카 사바나에 등장한 현생 인류의 직계조상 호모 에렉
투스도 비슷한 시기에 수십, 수백, 수만 번 불과 마주했다.  
  그 뒤의 일은 여러분 모두가 아는 바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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