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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20 23:04:27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2)

12.

재귀반사(*빛을 받은 방향 그대로 되돌려 보내는 반사 방식) 소재 긴 챙에 IR LED 라이트를 동여맨 희한한 모양의 모자를 쓴 엄마 앞에 순찰차가 멈춰 섰다. 경찰관들은 이제야 알겠다는 얼굴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안수진 중위 어머님 되시죠?"
"그런데요?"
"그 모자는 어디서 나셨죠?"
"딸이 줬어요."
"...그렇군요. 그 모자 좀 벗으시고 저희랑 잠시 말씀 좀 나눌까요?"

친절한 말투와 달리 경찰관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위아래를 훑었다. 무기를 의심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명은 양쪽으로 살짝 갈라져 언제든 서로를 돕기 쉽게 포진하였다. 만약 총이나 칼을 꺼내 겨누면 다른 쪽이 제압하기 쉬운 구조였다.  
그러든 말든 엄마는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싶었다. 말을 모든 것을 베는 칼처럼 만들고 싶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딸, 그런 딸을 부당하게 대우한 군대, 많은 사람을 속인 대통령, 살인자가 걸어다니도록 만든 사회 등 할 말은 많았으나 너무 길었다.
그저 딱 한마디 줄여서 말할 뿐이었다.

"우리 딸은 잘못 없어요."
"알겠습니다. 전부 말씀해 주세요. 일단 배남 중사부터. 배남 중사는 어떻게 됐죠?"
"그 사람이 딸이랑 싸웠어요. 박인수인가? 박은수? 그 사람 편을 들라고 그러다 안 한다니까 막 화내면서 권총을 뽑더라고요."

경찰관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엄마가 보기엔 이 이야기를 듣기도, 처리하기도 싫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복잡할 것 없이 저 단어만 외우라기에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까 진짜 효과만점이었다.


자이 아파트 경비실 바깥에서는 난리가 났다.
교통 경찰관들이 덜덜 떨면서 총을 뽑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에 들이닥치더니 이어서 순찰차들이 여러 대 몰려들었다. 그들은 봉쇄 현황을 묻고 조를 짜서 마스터키를 받고 301호로 올라갔다. 경찰 특공대가 오면 부르라며 무전기도 한 대 놔두고 갔다. 그러나 그 다음에 온 것은 호랑이에 별이 붙은 마크를 단 국군방첩사령부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더니 대뜸 내부 CCTV를 요구했다.
권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경비원은 반사적으로 화면도 띄우고, 프린트도 하고, 복사본도 주려 했다. 그러다 떠나기 전 301호 입주자 아줌마 분이 손을 잡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딸이 선생님 살리려고 하다가 이 사단이 났어요. 제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주세요. 거짓말까진 안 바라고, 그러면 들키면 큰일나잖아요. 그쵸? 어떻게든... 그냥 그래 주세요."

그렇다.
시간을 끄는 건 언제든 가능했다.
자신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려는 후임 경비원을 제지한 채 오십대 경비원이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근데 문제가 있어서요. 아까 구로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관님이 전화로 단단히 말씀했단 말입니다. 이 아파트가 지금 범죄 현장이라고 비 관계자는 열람도 금지, 유출도 금지라고 으름장을 놨거든요. 바로 보여드리기는 좀 그래요."

키는 작았지만 말투와 눈빛이 가장 날카로워서 누가 봐도 상급자인 요원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소리죠? 우리가 더 상위 기관이고 계엄 상황에서는 경찰을 수사 지휘한다는 사실 모르십니까? 심지어 두 명의 군인이 관련되었고, 나머지 남자도 군인으로 의심됩니다. 경찰의 명령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아이고, 선생님이야 군인이니까 경찰이 안 무섭겠지만 저 같은 민간인이 뭘 압니까. 경찰은 감방 보낸다 그러고, 선생님은 내놓으라 그러고... 저기, 영장 그런 건 없는 것 같고 그럼 여기다 '군이 책임진다'고 각서 하나만 써주시면 안 됩니까? 공문이라도 주시던가요."

경비원은 서랍에서 주차 관리 스티커 옆에 뭉쳐 있던 꼬깃꼬깃한 이면지와 볼펜을 꺼내 내밀었다.

"뭐요? 각서?"
"저도 살아야죠. 나중에 경찰이 와서 '왜 군인한테 넘겼냐'고 저를 잡아가면 이걸 보여줘야 할 거 아닙니까. 요새 같은 때 어디 함부로 잡혀가면 안 된다는 거 선생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소속이랑 관등성명, 그리고 '영상 강제 징발함'이라고 딱 한 줄만 써주십시오. 그럼 바로 비번 치겠습니다."

요원은 경비원을 한참 노려보았다.

"진심입니까? 지금 뭐하는 수작입니까? 저희에게 각서를 받는다고요?"

경비원은 한숨을 쉬며 불만과 격정을 토로하는 쪽으로 얘기를 만들었다.

"선생님, 요새 불황입니다. 저희 다 비정규직 그러니까 하청의 하청이고요. 주민 협의회에서는 티 하나라도 꼬투리 잡아 경비 단가 깎으려고 하는데 심지어 경찰 비협조 얘기까지 나오면 2026년 경비 업체 교체 안건이 올라올 수도 있고 그게 심지어 저 때문이라는 얘기도 남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입니다. 좀 봐주십쇼."

요원은 혀를 차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씩씩댔다. 군인의 폭력이 미덕이 되는 시대, 보통은 성질대로 했겠지만 경찰 핑계를 대니 막무가내로 굴기도 애매했다.

"하 나 참 씨..."

요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상부에 협조 공문을 팩스로 쏴달라고 요청하려는 것 같았다.
경비원은 웃음을 가리기 위해 얼른 동의를 받아 화장실로 자리를 떴다.


아무도 없는 터널을 지나며 수진은 머리 위 CCTV를 몰래 살폈다. 그리고 CCTV의 기종을 파악한 뒤, 다음 CCTV 간의 간격을 계산하여 재빨리 땀에 전 롱패딩을 벗어 주머니에 접어놓은 쓰레기 봉투에 둘둘 감았다. 이제 그녀는 검은색 롱패딩에서 파란색 롱패딩 차림이 되었다. 저는 다리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뀌었다.  
터널 끝에는 빗자루, 리어카, 제설 장비통 옆에 낙엽을 치우는 서울시 쓰레기 봉투가 놓여 있었다. 수진은 그 옆에 자신의 쓰레기 봉투를 버렸다. 만약 누가 AI CCTV가 아니고 보통의 CCTV로 집요하게 관찰한다면 갑자기 모습과 다리 상태가 달라진 장면을 보고 바로 체포하러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 배남의 시체가 시선을 분산시켜 그렇게 철저한 감시를 하기에는 손이 모자랄 거야.'

배남을 생각하자 총성, 피, 시체가 떠올랐다.
수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잊으려 애썼다.
구로역 광장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문닫은 고깃집 가게 문 근처에 숨어 있던 덩치 큰 남자가 스윽 나왔다. 보민이었다. 둘이 움직이면 무조건 들키므로, 보민은 아파트를 나오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걸어 이곳에 숨었다. 시킨 대로 겉의 담요는 화단에 버린 듯 더 얇은 무릎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당연히 가방은 버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간격을 두고 미리 말한 대로 신호등을 건너 문닫은 구로 공구 상가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신분이 드러났다는 가정 아래 보민도 다리를 절룩이며 수진을 따라왔다.
새로 개축한 곳을 지나 시멘트와 벽돌로 만들어진 구 상가로 접어든 두 사람을 쇳가루와 절삭유, 먼지 냄새가 환영했다.
미로처럼 얽힌 복도, 끝없이 쌓인 박스와 자재 들을 지난 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었다.
수진이 속삭였다.

"여기."
  
수진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빛바랜 푸른색 셔터 앞에 섰다. 셔터 오른쪽 쪽문이 열쇠를 받고 뻣뻣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바닥에는 주인을 잃은 베어링과 볼트들이 자갈처럼 굴러다녔고, 한쪽 벽면엔 재고 조사를 하다 만 서류 뭉치가 누렇게 떠 있었다. 유일한 광원은 반쯤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뿐이었다. 그마저도 켜켜이 쌓인 쇳가루 먼지에 가려져, 빛이라기보단 희뿌연 안개처럼 실내를 부유했다.
그런 조명 속에서 얼핏 보이는 건 빛바랜 라꾸라꾸 침대와 잡동사니가 가득한 책상, 그 앞의 의자뿐이었다. 모두 한 가운데 모여 있었다.
보민이 물었다.

"여기는?"
"내가 계획을 세우고 두세 다리 건너 빌린 은신처야."
"옷이니 뭐니 생각해 보면 엄청 정교하게 짰네?"

보민은 말을 마치자마자 어둠 속에 감도는 꽤 강한 냉기를 느끼며, 정교한 계획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으면 여기엔 최소한 기름 채운 난로가 있었을 것이다.
수진이 무언가 찾으며 책상 위를 더듬으며 대답했다.

"처음엔 죄책감에 못 이겨 충동적이었지 뭐. 취미고, 면피고, 꿈 같은 것이어서 탈출할 방법, 숨어 있을 데는 있어야겠다 싶었어. 하지만 그 외에는 이렇게 될지는 당연히 몰랐어."  
"그랬군."
"찾았다."

책상 위에 있던지도 몰랐던 독서등이 켜졌다. 합판 책상 위에는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전선 피복들이었다. 수진이 굵은 케이블의 배를 갈라 구리선만 뽑아내고 버린 흔적이었다. 그 옆에는 공조기 배관에 쓰이는 은색 알루미늄 덕트 테이프가 다 쓴 휴지심처럼 덩그러니 굴러다녔다.
중앙에는 그녀가 작업 중인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낡은 철제 탄약통, 혹은 공구함이었을 녹슨 깡통의 안쪽 면은 촘촘한 구리 매시로 빈틈없이 도배되어 있었다.
책상 구석에는 피복을 벗기다 이가 나간 니퍼, 납땜 인두 대신 불에 달궈 쓴 것으로 보이는 일자 드라이버, 그리고 뭉툭해진 커터 칼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쇳가루와 잘려 나간 금속 조각들이 낡고 더러운 독서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그 혼란 속에서 오직 상자, 그 '패러데이 케이지'만이 기묘할 정도로 정교했다. 외부의 신호가 단 1퍼센트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금속과 금속을 겹치고 테이프로 밀봉한 그 작은 공간이 버티고 있었다.

"햐. 이게 다 뭐야? 너 아이언맨이야?"
"흐흥, 보기보다 쉬워. 그리고 난 아이언맨보다는 앤트맨에 가까워. 이거 거의 다 주워온 거다? 처음에 쿠팡에서 원단 샀다가 후회하고 그 다음부터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주워서 자작했어. 보민 씨, 내가 맡긴 거 가지고 있지? 줘봐."

보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작지만 같은 구조인 패러데이 상자 두 개를 꺼내 건넸다. 하나는 배남의 핸폰을 넣은 것이요, 또 하나는 아직 열어보지 않은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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