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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12 21:48:51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8)
8.

"엄마, 나 왔어."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가 마치 옛날 시골 마을 입구에 세워놓던 장승처럼, 현관 앞 중문에서 팔짱까지 끼고 버티고 서 있었다. 평소엔 전혀 보지 못했던 굳은 얼굴과 결연한 자세였다. 두 사람은 약속한 듯 벗어놓은 신발이 가득한 제자리에 그대로 서 버렸다.
엄마는 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은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어른 앞이니 인사를 시도했다.

"안녕하-"
"안녕하지 못해요. 이게 무슨 일인가요, 학생."
"학생...요?"

엄마는 그가 어리둥절해하든 말든 말을 이었다.

"밤에 이래서는 안 되죠. 여자들 사는 집에. 아무리 군인이래도 이래도 되나요? 대체 왜 온 거죠?"
"아, 저기 그러니까. 음."
"학생 본인도 말 잘 못 하겠죠?"

너는 나이 많이 먹어봐야 꼬마야, 알겠니? 심지어 제대로 행동도 못 하는 불민한 인간인 게지.  
엄마는 그렇게 말하였다.
군인에 학생에, 공적인 신분과 적은 나이를 골고루 공격하는 말투에 수진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자리 선정도 예술이었다. 중문과 신발장 앞을 가로막았으니 넌 환영받지 못한다는 신호를 주는 동시에, 아까 말한 대로 슥 지나쳐 수진 방까지 갈 수가 없었다. 남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난 셈이다.
그런데 그건 수진도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을 빼앗겠다는 생각 하나로 사회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는데 초장에 좌초되게 생겼다.  

"대답하세요, 학생. 왜 눈만 굴리나요."

남은 어떻게든 해 보란 표정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네가 들어오라고 했다고, 한마디 해 달라 이거였다. 그게 아니면 명분이 없었다.
수진은 새로운 엄마를 발견해서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키가 160도 안 되는 분이 갑자기 터무니 없이 크고 강력해 보였다. 옳은 장소에서 옳은 말을 하는 당당한 모습 때문이리라. 지금 그녀는 수진이 매사 순진순박하다고 단정한 그냥 보통의 아줌마가 아니었다. 당신은 엄연히 일가를 이루고, 영토를 확장한 한 명의 전사였다. 그 영토가 침범당하는 걸 두고볼 분이 아니었다. 당장 남편이 삼십대에 위암으로 세상을 달리한 뒤에도 외동딸을 기르며 성공적으로 가계를 꾸리신 분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신산스러운 세월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그러나 눈앞에 창궐한 새로운 야만 앞에서는 위험한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정론을, 진실을 발견 못 해서 죽었을까? 원칙은 총알을 막아주었나?
수진이 반응하지 않자 남은 권총이 담긴 가슴팍을 가볍게 쳤다.

'알았다고.'

슬슬 감탄에서 걱정으로 돌아온 수진은 엄마에게 눈짓으로 말렸다. 하지만 기세를 탄 엄마는 선을 넘어버렸다.  

"대답 못 하면 나가요. 수진아, 문 열어라."
"어어?"

엄마는 두 손으로 남을 밀며 관념에서 현실로 내려왔다. 위대한 전사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평범한 키 작은 엄마만 남겨졌다. 체중이 크게 나가지 않는 남은 엄마가 사력을 다해 밀자 살짝 휘청였다.
불쾌해진 남이 소리쳤다.

"이 아줌마가 왜 이래? 손 안 떼?"
"내 집에서 나가요!"
"아니, 당신 딸이 집에서 보자고 했다고. 수진이, 너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내 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그리고 그게 말이 돼? 12시 넘어서 술 취해서 오는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사람이 어딨어."
"어라, 어느새 반말?"
"당연히 반말이지 그럼. 내가 어른인데."
"오늘 첨 봤는데?"
"이 인간 진짜 취했나. 안 나가?"

두 사람은 서로 밀더니 급기야 한데 엉켜 둥글게 돌아갔다. 수진은 머릿속에서 목적과 현실의 무게추가 미친 듯 오가는 바람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몸싸움이라도 말리자 생각한 순간 사건이 터졌다. 자꾸만 상승하는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엄마가 남의 뺨을 쳤다.
가까운 거리라 힘도 실리지 않았지만 손가락에 낀 낡은 금반지가 남의 입술을 제대로 찢어놓았다. 길게 찢어진 입술에서 핏방울이 제법 많이 떨어졌다. 피는 그의 레인저후디 파카와 현관, 널린 신발 들을 물들였다.  
평생 누굴 때려본 적 없는 엄마는 뜻하지 않은 자신의 행동에 놀라 얼굴이 새하얘졌다.
남이 중얼거렸다.

"이씨."
"아니, 그게."

남은 피를 스윽 닦더니 그 손 그대로 엄마의 턱을 후려쳤다. 거의 채찍 소리가 날 정도로 세고 빠른 손놀림이었다. 엄마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눈이 뒤집어졌다. 머리를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한 줄기 코피까지 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엄마! 머리! 엄마!"

수진이 비명을 질렀지만 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군홧발을 치켜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수진이 일단 몸통으로 밀었다. 밀린 남이 신발장에 부딪혔고, 와장창 소릴 내며 신발장 위에 놓은 각종 트로피가 어지럽혀진 신발 사이로 떨어졌다.

"어? 뭐야, 너?"

수진은 파카 주머니에서 전기 충격기를 들며 소리쳤다.

"뭐냐니, 이 미친놈!"

수진은 손아귀 안에서 번쩍이는 파란 스파크를 찔렀다. 그러나 남은 특유의 반사 신경을 갖고 간발의 차로 피하더니 수진의 어깨와 등을 잡아 진행 방향 그대로 세게 던졌다.
수진은 마루에 턱을 찧으며 미끄러져 들어갔다. 전기 충격기는 부엌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은 군홧발 그대로 따라 들어왔다. 수진은 시야가 흔들리는 가운데에도 필사적으로 텔레비전 쪽으로 기어 간격을 확보했다.
남이 피식 웃었다.

"야, 내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갑자기 사근사근해지더라니 이 개 같은 짓 하려고 꾸민 거구나. 전기 충격기는 언제 샀대? 술에 약이라도 탈 생각이었냐? 그래서 나 졸면 전기 충격기 찌르려고?"
"닥쳐!"
"전기 충격기는 접촉 부위가 너무 한정적이란 말씀이야. 차라리 날이 있는 칼이 더 위험했을 텐데 왜 안 썼어? 자신이 없었나 근접전 교육을 더 잘 받지 그랬어. 아, 그치? 근접전 교관이 바로 나지?"  

수진은 텔레비전 근처 바닥에 있던 녹색 3킬로그램짜리 아령 두 개를 연거푸 던졌다. 남은 상체를 흔들어 모두 피해 버렸다. 수진은 아연실색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1킬로그램짜리 핑크 덤벨을 던졌다.

"죽어!"
"이것 맞고 죽겠냐? 아주 지랄하네."

덤벨을 피해 왼쪽으로 쓱 돌아 그림자처럼 다가온 남이 따귀를 때렸다. 반쯤 일어섰던 수진은 다시 주저앉았다. 수진은 어떻게든 간격을 벌리려고 텔레비전의 부속물인 스탠드형 우퍼를 쓰러뜨리며 벤치 쪽으로 몸을 날렸다.

"얼씨구."

수진은 욕설할 기운도 아껴, 모든 힘을 다해 벤치 봉 중간을 잡고 휘둘렀다. 15킬로그램으로 보통 제품보다 가벼운 벤치 봉은 겨누고 휘두를 수 있으면 확실한 무기였으나 당연히 지금 수진의 몸으로는 무리였다. 방바닥에 길게 포물선을 그린 봉은 그저 남이 뒤로 가볍게 스탭을 밟았다가, 다시 앞으로 오는 동작만으로 헛되게 지나쳤다.  
하지만 포기란 없었다. 수진의 손이 원반으로 향했다.

"아나, 네년은 이게 약이다."  

남은 글록 17을 뽑아 머리, 머리에서도 미간을 정확히 겨누었다. 이어서 2.5킬로그램짜리 원반을 던지려던 수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권총, 그 중에서도 검은 총구는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세상이 단순해졌다. 심장 소리와 좌우 귀 밑에서 심하게 팔딱대는 핏줄 소리와 함께 이성, 마음, 용기가 모두 그 검은 구멍 안으로 빨려들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 죽는 거야?'
  
남이 피식 웃으며 총을 집어넣었다.

"어휴, 내가 병신이지."

총구가 사라지자 마법처럼 세상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반항할 마음은 사라졌다. 무서웠다.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었다. 엄마는 죽었거나 죽어가고, 평소에는 층간 소음을 신경썼던 아파트 위나 아래, 옆의 사람들은 조용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더니 이곳이 고독한 섬이요, 미로의 막다른 곳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남이 총격 소음 신경 안 쓰고 방아쇠를 당긴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남이 승리자처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인생 조진 줄 알아라. 내가 눈치가 빨라. 하는 꼴 보니 너 같은 년은 뭐가 있어. 내가 인원 지원받아서 컴이고 뭐고 너희집 다 뒤질 거야. 그래서 증거 생기면 나 죽이려던 죄까지 붙여서 널 꼭 총살시킬 거야."
"있긴 뭐가 있어."
"흐흥, 없어? 그래, 없을 수 있지. 근데 무슨 상관이야. 네 컴퓨터가 나한테 있잖아. 나랑 나와 친한 수사관들이 열심히, 정밀하게 뒤지면 그 컴에서 없던 군사기밀도 두어 개 나오고, 아동 포르노도 나오고 그러겠지. 와, 잘난 척하던 인간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었네? 심지어 여덟 살짜리 남자애랑 섹스하고 싶어했네?"
"인간!"

분노가 그녀에게 마비를 풀고, 다시 힘을 돌려주었다. 수진은 소리 지르며 배남의 턱을 향해 주먹을 뿌리며 뛰어올랐다.

"쓰레기야!"

나름 이십대 여성부 우승도 한 주먹이었다. 남은 살짝 숙이면서 오른쪽 배에 어퍼컷을 먹였다. 수정은 처음으로 간과 간에 연결된 여러 가지 핏줄을 느꼈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수진은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바닥에 음식을 토하며 발버둥쳤다.
온몸을 엄습하는 고통 속에서 수진은 눈물과 함께 필사적으로 사과했다.
엄마.
엄마.
미안해요.
나 잘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엄마.
죽지 마요.
흐려지는 의식 뒤로 즐거워서 웃는 배남의 얼굴이 보였다. 완벽한 그의 승리였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였다.
남의 몸이 갑자기 붕 떴다. 그는 마치 마법처럼 옆으로 날아가더니 70인치 텔레비전에 부딪혀 박혔다. 난데없이 불상사를 당한 텔레비전은 전기 불꽃을 튕기며 반쪽으로 부서졌다.
남을 몸통박치기로 날린 것은 검은 그림자였다. 기절 직전인 수진의 시야에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대한 그림자는 왠지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새로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소리쳤다.

"내 여친한테서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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