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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08 23:41:24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6)

6.
용기, 또는 만용은 그때 한 순간이요 경비원의 인터폰을 받은 수진은 자신은 겁쟁이니 겁쟁이답게 행동하자고 생각했다. 아니, 상식적으로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을 죽여본 술 취한 군인을 굳이 직접 상대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경찰을 부르세요."
"..."
"곤란하다니 무슨 소리세요. 어딜 보나 정상이 아니잖아요."

처음엔 관심이 없던 엄마는 인터폰 통화가 3분이 넘어가자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로비에서 계속 있을 것 같다고요?"
"..."
"네."
"..."
"꼭 부탁하신다니요. 부담스러워요."
"..."

수진의 눈이 커졌다.

"캔이오?"
"..."
"뭔 캔 얘기를 한다고요?"

수진은 순간 전신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경비원은 그가 자꾸만 캔인지 스타인지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떠벌린다고 말했다.

'두 단어를 합치면 캐니스터야.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생소한 단어를 들은 아저씨가 떼고 들어서 그렇지, 진짜 캐니스터 얘기라면? B-1에 들어갔던 그 강철 깡통이라면? 남이 시체가 담긴 그 물건을 보고, 심지어 날랐다면?
남은 실제로 대통령을 독대했을 정도로 실세 중 실세였다. 금일봉을 수시로 받아 비싼 가게에서 비싼 술을 마신다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기도 했다. 계급은 중사였지만 영관급도 그를 어려워했고, 독불장군 스타일로 완전 제멋대로라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수업 당시 강사면서도 지각은 물론 결근까지 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보자. 나는 윤석열이야. 나는 최소 46명의 체포를 지시하고 이들을 고문하도록 부하에게 지시했어. 국내 정치인들을 이적 행위 및 간첩 행위, 부정 선거, 북한의 도발과 초반 국지 교전을 이유로 계엄을 시작했지만 모두 끝났어. 부정 선거 증거도 없어. 정치인들이랑 반체제인사들은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이들도 별다른 증거를 내놓지 못해.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빨리 다치고 빨리 죽어. 이들은 고문의 흔적을 몸에 남긴 시체가 돼. 증거가 없으니 국제 사회, 시민 사회는 사방에서 압력을 넣어. 시체는 죽어도 못 보여줘. 땅에는 묻기 힘들어. 드러나기도 쉬워. 절단, 소각 같은 건 특수한 시설이 필요하고 관계자도 생기고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 그럼 내게 이미 있는 자원과 방법으로 해결하러 들겠지. 내겐 뭐가 있지?'

707이 있었다.
당장 707은 특수전 병력이고, 이미 쿠데타의 공범이다. 특수전 병력은 헬기와 친한데 얼마나 친하냐면 작계에 있는 참수 작전 때문에 대형 훈련 때마다 특수작전항공단이 제공하는 헬기를 타고 돌아다녔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태우고 뜨고 내릴 정도의 힘을 가진 헬기라면 캐니스터 몇 개는 식은죽 먹기였다. 특수전 헬기들은 야간 침투 능력이 기본인데 이는 어둠 속에서 저고도로 오래 날면서 추락하지 않는 능력을 뜻한다. 어두운 밤바다를 낮게 날면서 김 양식장과 어장을 피해 해군이 평시 작전하면서 기록한, 해류가 거센 공역에 캐니스터를 버린다면.

'아예 가라앉거나 가라앉지 않더라도 태평양 쪽으로 빠져 사라지겠지.'

술에 취한 자들은 평소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거나, 평소 가장 자주 하는 활동에 대한 감상을 떠벌릴 때가 많다. 이는 과시일 때도, 자기파괴욕구일 때도, 심지어 깊은 죄의식에 따라 현실의 자신을 단죄하고 선을 실천하여 순진무구했던 어린이 시절을 되찾으려는 무의식의 발현일 때도 있었다.
따라서 경비원이 들은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아니라면 확인해야 했다. 거의 안 되겠지만 남을 설득할 여지도 엿볼 필요가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나오든 수진은 남과 부딪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겁쟁이가 동굴에서 나올 기회였다.  
너무 오래 혼자만의 세계에서 떠돌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는 뚫어지게 바라보고, 경비원은 계속해서 하소연하는 중이었다.

"네, 알았어요. 내려가요."

수진은 인터폰을 끊고 파카를 찾으러 방에 들어갔다. 엄마가 가벼운 걸음으로 따라와 물었다.

"누가 왔대? 이상한 사람?"
"그런가 봐."
"노숙자야?"

이 급한 와중에도 수진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렇다. 황량하고 걍팍한 정신 세계를 가진 배남은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는 사회와 멀어져 머물 데 없어 정처없이 방황하는 처지였다.

"그건 아니고 파견 때 봤던 이상한 남자 있는데 술 마시고 와서 행패 중인가 봐."
"설마 헤어졌다는 남자친구?"
"아냐.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와도 별 일 없어. 이런 식으로 하지 않을 사람이야."

수진은 보민을 떠올리며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그에게 자신은 그저 모자라고 심지어 위험한 사람이었다. 죄가 있는 자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으며, 그러면서도 혹시나 싶어 계엄 정권에 해가 될 만한 정보를 천천히 그러모으는 불만분자였다.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으니 이별을 결심한 이유 또한 설명이 불가했다.
보민이 자신의 일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을 경멸할까. 아니면 함께 저항하자고 할까. 어느 쪽이든 수진은 보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보민도 결국 군인이었다. 특공연대 소속이어서 과거에는 충정 훈련, 현재에는 대 테러리스트 훈련이라 일컫는 시위 진압에 동원되는. 그도 손에 피를 묻히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성은 착한 사람이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선택권 없는 말단이었다.
수진은 달랐다. 수진은 말단이나마 시스템의 핵심에서 AI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었다. 점을 찍고, 버튼을 누르고, 사람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래서 아무 설명 없이 연락을 끊었다.
보민은 상처받았겠지만 그게 나았다. 자신처럼 더러운 세계에 그를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그저 갑작스럽더라도 빨리 헤어져 주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 금세 또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자신을 잊을 것이다.
한편 선택과 운명은 웃기게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 위험한 남자를 대면하게 만들었다.  

"여기 온 사람은."
"응."
"내가 좋대. 나랑은 아무 접점도 없고, 난 관심도 없는데."

엄마의 눈이 커졌다. 사슴을 닮은 힘없는 그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어쩌니. 문제다. 문제야. 파견 갔다가 만났다면 군인일 거 아냐. 이게 결국... 그 뭐니 스토커 아냐?"
"그치.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될 수도 있지."
"가지 마."

엄마가 옷소매를 잡았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수진은 엄마의 예감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다독였다.  

"로비엔 경비원도 있고, CCTV도, 보는 눈도 많고 괜찮아. 엄마,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경찰관을 부를게. 요새 군인 대우 쓸데없이 잘해 주는 거 알지? 여자에다 군인인 사람은 남자에다 민간인인 사람보다 더 중요시 여겨. 그래서 경비 아저씨가 안절부절 못 한 거야. 그것도 그렇고 지금 말 안 하면 또 찾아올 사람이야. 온 김에 이야기 하고 처리해야 해."
"그래?"

본인이 생각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소리였지만 정작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인 딸을 굳게 믿는 엄마는 팔을 놓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수진은 파카를 입으며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자신은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옷장 구석에 만들어 놓은 비밀 구역을 찾아 열었다. 그 안에는 검은색 전기 충격기, 그 옆에는 요새 스마트폰이 들어갈 만한 패러데이 상자 즉 납 상자 겉에 구리 / 니켈 도금 원단을 덧댄 전파 차단 상자, 마지막으로는 용기를 내 사무실에서 만든 엑셀을 일정 분량씩 암기해서 복기해 기록한 데이터가 든 USB가 들어 있었다.  
수진은 이 세 개를 손가락으로 쓱 쓸다가 전기 충격기를 파카 주머니에 넣었다. 잘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나 없는 것보단 나았다.
수진은 현관문을 나서다 말고 엄마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녀올게요, 엄마."
"조심해. 빨리 와."

수진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한밤 중인 만큼 복도는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야식을 인포 카운터에 놓는 배달 기사, 청소하시는 분, 경비원 둘 해서 네 사람 뒤로 배남이 보였다. 얼굴이 험상궂은 그가 수진을 발견하고 씩 웃었다.
수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인간도 나랑 똑같아. 손에 피를 묻히고, 그걸 정당화하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

차이가 있다면 묻힌 배남은 묻힌 피가 아주 많고,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수진은 당당한 태도로 로비 안의 경비원과 배남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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