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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9/13 05:51:46
Name   王天君
File #1   the_night_of_the_prophet.JPG (87.3 KB), Download : 15
Subject   [스포]선지자의 집 보고 왔습니다.


  오늘도 희망상담콜센터에서는 전화기들이 불이 나고 상담원들의 키보드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민여주 역시도 그 많은 목소리 중 하나로 하소연하는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가능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특징이라면 상담을 받은 사람들의 칭찬 후기가 많아 우수사원으로 뽑혔다는 것, 그와 동시에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개인신상정보를 빼돌리는 부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렇게 고만고만한 하루를 보내는 민여주를 멀리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어느날, 여주는 자신의 원룸 건물 정문에 이상한 낙서가 되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불안한 마음에 계단을 오르던 중, 뒤에서 말을 거는 낯선 아저씨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앞을 보니 벙거지 모자를 쓴 남자가 손수건으로 자신의 입을 급히 틀어막습니다.

영화는 1992년 다미선교회의 휴거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여주는 어렸을 적 경기도 외딴 지역의 사이비 선교회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메시아 노릇을 했던 과거가 있습니다.여주를 뒤쫓고 납치한 중헌은 당시 여주의 철없는 말에 지나치게 감명해 21세기에도 휴거를 믿으며 여주를 통해 신앙을 증명하고 싶은 광신도입니다. 여주는 사이비 종교의 기억을 잊은 현재에도 상담센터 직원으로서 메시아 노릇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희망을 쫓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해 가짜 희망을 파는 사람 사이에서 이 둘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셈이지요. 중헌에게 납치당했다가 풀려난 사건과,  자신이 명의를 건넨 상담센터의 어느 고객이 대부업체의 보험금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여주는 혼란스러워합니다. 영화는 여주의 고뇌를 통해 믿는 자와 속이는 자 사이에 있던 사람은 어떻게 추종자들의 믿음을 책임져야 할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영화가 이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과정은 미처 채우지 못한 부분들이 보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묵직하지만 현실적인 디테일들이 빠져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발이 채일 때가 많아요. 이는 제작비의 현실적 한계로 인한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주제의식의 축 아래에서 기능적으로만 움직이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는 거죠. 갑자기 납치당한 여주는 왜 저렇게 소극적으로 반항하는가, 탈출 기회가 있는데도 납치범의 과거를 파헤치는 데 주력하는가, 어떤 심정의 변화가 생겨서 납치범의 교화를 위해 몸소 저리 움직이는가, 윤구는 대체 왜 저렇게 열심히 여주를 돕고 비밀에 흥미를 가질까, 자기가 정보를 파는 업체를 왜 전혀 몰랐다는 듯이 설명하는가, 왜 효준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사건을 경찰에 가지고 가지 않는가, 항기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중헌에게복수하기 위해 왜 번거롭게 굳이 찾아가서 몸싸움을 벌이는가 …. 물론 이들은 나름의 진지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움직이는 심정적 동기는 현실적 동기로 이어질 만큼 설득력이 없어요. 이를테면, 납치까지 한 사람이 방문을 잠가놓았다고 해서 납치된 사람한테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 정도의 과감함과 실행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방문을 부수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게 훨씬 더 일관성 있는 캐릭터의 묘사일텐데요. 이처럼 영화는 종종 상징적 대사와 감정이 넘칩니다. 진실은 무엇이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인물들의 대사나 다른 자료로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플래쉬백을 나열하는데 이 때문에 정작 미스테리로서의 장르적 재미는 크게 떨어지고 영화 자체가 좀 구차해지기도 합니다. 윤구나 항기 같은 인물은 시나리오의 지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여요.

중간자와 구원의 모순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바로 여주입니다. 무지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맹신을 초래했다, 그걸 잊고 살다가 뒤늦게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이후 그 광신도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척하며 거짓된 안식을 준다, 그리고 자신은 계속해서 가짜 메시아로서 상담원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여주의 삶이 이런 줄거리로 끝났다면 종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한 개인의 진실이 타인과 시스템 전체에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묻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엔딩에서 여주는 자신의 상담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효준을 찾아가 사과를 합니다. 충원을 찾아가 구원하려는 장면과, 효준에게 사과하려는 장면 때문에 영화의 철학적 질문은 오히려 속죄를 통한 한 개인의 성장담으로 축소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고 묻는 이야기의 본질을 그래도 반성했으니 이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꺼야, 라며 대책없는 해피엔딩으로 퉁치는 느낌이 들어요. 동시에, 구원이라는 기만적 행위의 모순이 일관되게 심화되어 오다가 이 엔딩씬에서 자기부정을 하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여주는 과거에는 아무 것도 몰랐기에 선지자의 입장에서 타인을 기만했습니다. 현재에는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타인을 기만하면서, 자기 자신까지도 기만하게 되죠. 모든 사건이 끝난 후에도 상담원 일을 하며 타인을 구원하는 여주의 기만은 계속 됩니다. 그런데, 엔딩씬에서 자신의 구원을 부정하고 더 이상 기만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로 전환되기 때문에 연속되던 거짓 구원의 고리가 갑자기 끊어집니다. 차곡차곡 중첩되고 순환되던 이 모순이 한 개인의 반성이 담긴 엔딩으로 그 동안 쌓아놨던 무게를 스스로 허물어트리는 이야기로 귀결되고 마는거죠. 이 장면을 제하고 보더라도,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정말 유의미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여주의 선택들은 인간의 나약함과 믿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던지지만, 동시에 불쌍한 이에 대한 연민과 어쩔 수 없는 비겁함 같은, 시시하고 개인적인 답변만을 제시하는 느낌이랄까요. 종교적인 딜레마나 정말 깊은 사유를 만족스럽게 담아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사한 자기기만을 긍정하는 묘한 찌질함에 대한 씁쓸함만이 더 짙게 남습니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다가도 갑자기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듯해서 어떻게 감상해야 할 지 좀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입니다. 제작 여건에 따른 현실적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주제 의식을 더 심도 있고 밀도 있게 파보는 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들이 드는군요. 어린 시절의 여주에게 지배욕과 허영을 좀 더 심어준다든가, 휴거가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는 인지부조화 현상과 이를 어쩔 수 없이 긍정해야 하는 어린 여주의 공포라든가, 자기 파괴를 곧 구원과 동치시키는 신도들의 모순이나, 진실을 알리지만 이 때문에 적그리스도로 격하되고 새로운 메시아의 출현을 바라본다거나 하는 설정들로 나름의 각색을 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휴거까지의 카운트 다운을 조금 더 오락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을 것도 같네요. 아마 감독님도 스스로의 작품에 만족스럽진 않을 겁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씹을 거리가 많다는 것도 나름의 수확이 아닐까요.

@ 여주의 어린 시절을 처음에 깔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을 했는데, 기획은 그렇게 되어있는 걸 보고 좀 신기하더군요. 감독님이 편집에서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린 부분이 많다고 하시던데 영화는 연출로만 모든 게 이루어지는 예술이 아니라는 걸 다시 실감했습니다.

@ 김부선씨가 따님을 응원하기 위해 극장에 오셨던데, 가까이에서 뵈니까 좀 신기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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