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1/07 00:00:21
Name   멍청똑똑이
Subject   입김의 계절
새벽 운동을 하는 날의 출근길은 무척 정신이 또렷하다. 아침부터 땀을 흘린 탓인지 몸도 좀 가벼운 느낌이고. 맨투맨이나 후드티만 입어도 추운 줄 몰랐던 계절이 어느덧 끝나가는지, 코트를 입어도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정도 추운 날씨가 만원철과 광역버스를 타야 하는 내게는 딱 좋다고 생각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숨을 훅, 내쉬자 하얀 입김이 눈 앞에 천천히 퍼진다. 올해엔 어쩐지 계절이 다가오는 것이 매번 갑작스럽다. 한 번 더, 이번엔 따뜻한 입김을 불듯이 하- 하고 숨을 내쉰다. 방금 막 양치를 한 탓인지 민트향이 살짝 코끝을 스친다. 칫솔질을 할 때면 매워서 눈물이 찔끔할 정도의 치약답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겨울에 어울릴 하얀 입김이 둥실둥실 하늘로 퍼진다.




입김을 뱉는 것은 나도 모르던 습관이다. 예전에 같이 걷던 사람이 옆에서 가만히 보고는, 입김을 후, 하, 후, 하 하고 불면서 다닌다고 웃었던 일이 떠오른다. 애기냐고 귀여워하면서도 다 큰 사람이 그러는 게 꼭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는지 종종 또 그런다 또 하고 핀잔을 주고는 했다. 나는 어쩐지 그 말이 듣기 좋아 추운 날에는 꼭 후, 하, 후, 하 하며 입김을 뱉곤 했다.




옛 생각이 뭉클뭉클 떠오르는 것이 꼭 입김을 닮았다 싶었다. 후, 하고. 하, 하고. 뭉게뭉게 퍼져나가다 금세 희미해지며 풍경에 스며든다. 입김이 스러지듯이 기억도 스러진다. 느린 걸음 사이로 부러 뱉던 입김 대신 입술을 앙다문다. 입김을 뱉는 일이 습관이 아니었다고, 문득 깨닫고야 만다. 옅게 늘어진 입꼬리로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한시 바쁜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걷다 보면, 계절의 향기도, 온도도, 색깔도 뒤늦게 알아채곤 한다. 봄에는 꽃향기와 포근한 공기가, 여름에는 쨍한 햇볕과 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가을에는 은행 냄새와 겨드랑일 간지럽히는 바람이, 겨울에는 하얀 입김과 시린 하늘이 있다. 갑작스러운 계절도, 불쑥 생각나는 기억도 이제 나쁘지도 무섭지도 않다. 김장을 담근 장독대를 땅 속에 묻어 둔 것처럼, 가라앉아 가는 것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 그래도 쓰고, 맵고, 시고, 짜고, 달았던 기억들 중 몇 가지는 추억으로 떠다니고 오늘처럼 우연히 또 떠오를지도 모른다.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계절이 반갑듯이, 때때로 불쑥 생각나는 추억들도 하나 둘 반가워지는 일이 썩 나쁘지 않다. 울렁이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어디에도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기억력이 좀 좋은 탓에 일상이 덜 심심하면 좋지 뭐. 하며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역사 안에는 사람들의 온기 탓인지 후, 하 하고 불어도 입김은 나오지 않고, 가파른 계단 탓에 가쁜 숨만 꿀렁꿀렁 삼키며 인파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더 이상 습관처럼 불지 않는 입김에도, 겨울은 제자리를 찾아왔고 덜컹이는 차창 너머에는 아직 미련이 남은 가을의 햇살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조금 더 추워지면, 꼭 호두과자를 사 먹겠다는 다짐을 했다. 뒤늦은 봄이 와도 아쉽지 않게.



5
  • 하 하 후 후
  • 하얗게, 따뜻하게, 행복하세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23 의료/건강마음의 병에도 골든 타임이 있습니다. 7 김독자 19/10/31 5097 41
9924 영화날씨의아이 짧은 감상문 (본문, 리플에 스포 포함 가능) 8 알겠슘돠 19/10/31 5874 0
9925 스포츠[NBA] Orlando Magic Chronicle - (4) 또 다시 원맨팀 5 AGuyWithGlasses 19/10/31 4725 2
9926 게임[LOL] 11월 2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5 발그레 아이네꼬 19/10/31 3564 0
9927 게임[LOL] 11월 3일 일요일 오늘의 일정 7 발그레 아이네꼬 19/10/31 3760 0
9928 문화/예술(11.30) 바흐 마태수난곡 - 전석무료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비누남어 19/11/01 4070 5
9929 게임[불판]블리즈컨 1일차 31 the hive 19/11/02 4269 0
9930 일상/생각고등학생 아들,딸 그리고 부부 근데 방이 두개뿐이라면? 16 오디너리안 19/11/02 5185 0
9931 도서/문학서효원 - '천년마제' 6 덕후나이트 19/11/02 5696 0
9932 일상/생각미국 고등학생 아이들 6 풀잎 19/11/02 4649 14
9934 게임[불판] LoL 월드 챔피언십 - 4강 1일차(토) 155 OshiN 19/11/02 4534 0
9935 게임아우터 월드 리뷰 2 저퀴 19/11/03 5292 5
9936 일상/생각자살유예중입니다. 30 necessary evil 19/11/03 6402 1
9937 기타2019 WCS 글로벌 파이널 결승전 우승 "박령우" 김치찌개 19/11/03 3641 0
9938 게임[불판] LoL 월드 챔피언십 - 4강 2일차(일) #1 187 OshiN 19/11/03 5428 0
9939 게임[불판] LoL 월드 챔피언십 - 4강 2일차(일) #2 182 OshiN 19/11/03 5738 0
9940 요리/음식이 시국에 올리는 고토치라멘 이야기 - 1 5 温泉卵 19/11/04 6958 11
9941 음악탈팬티 13 바나나코우 19/11/04 3795 1
9942 일상/생각정치 용어 - 퀴드 프로 쿼 15 풀잎 19/11/04 5676 7
9944 오프모임[마감]15일 금요일 저녁8시 경복궁역 족발벙 106 다람쥐 19/11/05 5662 11
9945 게임그래서 이제 롤 안 볼거야? 24 Cascade 19/11/05 4638 5
9946 기타[MLB] 사이영상 최종후보에 오른 류현진.jpg 11 김치찌개 19/11/06 3912 3
9947 꿀팁/강좌뭉청멍청한 나를 위한 독서 정리법 8 사이시옷 19/11/06 5847 10
9948 일상/생각입김의 계절 5 멍청똑똑이 19/11/07 4278 5
9949 음악파고! 가고! 9 바나나코우 19/11/07 5117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