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7/04 10:39:38
Name   Under Pressure
Subject   [사이클] Belle 'EPO'que
의사, 약사분들이 많은 사이트에서 비전공자가 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니 뭐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 되어 버렸는데, 틀렸더라도 귀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


1970년대까지 어느 스포츠든 암페타민이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전부터 알음알음 사용되던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1980년대 아주 맹위를 떨치던 약물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벤 존슨이 적발되었던 약물이 바로 스타노조롤, 강력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였죠. 하지만 사이클은 스테로이드...하고는 조금 연관이 떨어지는 종목입니다. 근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닌데, 이 동네는 아무리 스프린터라도 근력을 일정 이상 올려서 얻을 것이 별로 많지 않고 잃을 것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동네는 최신 유행(?)이었던 스테로이드보다는 각성제라던가 코티솔, 카페인 농축액(커피나 레드불 따위와 비교하면 곤란한 양입니다) 같은 것들이 여전히 돌아다녔죠. 국가 단위로 자가수혈이 적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만 그 당시는 극소수의 이야기였습니다. 미국이니까 가능한 정도... 자가수혈은 실제로 굉장히 주변의 협조가 많이 필요하다더군요.


1988년, 한 선수가 약물 적발로 실격됩니다(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발견된 물질이 이전과는 좀 다른 물질이었습니다. 바로 EPO, 에리트로포이에틴이라는 약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사이클 선수들의 이른 사망소식이 들려오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EPO 복용과 연관을 강력하게 의심받았고, 실제로 의사들은 이 당시 18명의 선수의 사망에 EPO라는 약물이 연관되어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EPO는 적혈구를 생성하는 호르몬이며, 사이토카인으로 골수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즉 적혈구 생성에 필수적인 호르몬인데, 자연적으로도 신장에서 생성되는 물질입니다. 주로 신장 이상의 환자나 빈혈 환자들에게 쓰이는 약이라고 하네요. 현직 의사분들 계시면 이 부분을 자세히 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적혈구...를 생성하는 약이기 때문에, 달리기, 자전거, 조정 같은 종목에서는 이보다도 더 좋은 약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약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를 한 의사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탈리아 의사들입니다. 의외로 이탈리아는 이 분야(스포츠 의학과 ...약물)에서는 톱을 달리는 나라입니다. 여기에서 Francesco Conconi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Conconi라는 사람은 페라라 대학의 교수이자 스포츠의학을 주로 다루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위한 스포츠 의학적 연구로 시작을 했습니다. 유능한 사람이었는지, 그가 도왔던 Moser라는 선수는 에디 먹스의 타임 트라이얼 속도기록을 경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Conconi test라고 해서, 유산소-무산소 한계치를 테스트하는 기법도 개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사람과 제자 의사였던 Michele Ferrari, Luigi Cecchini와 함께 EPO를 상용화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EPO는 당시 신약이라 가격도 비싸고 효과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합성을 통해 가격을 낮추고, 자가수혈법과 이에 맞는 훈련법을 개발해서 선수들의 기록 향상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후 이 세 사람의 연구실에는 수많은 선수들이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하고, 물밑에서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전거를 포함한 스포츠계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이 약물이 금지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알음알음 사용되던 EPO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대체로 1994년으로 추정됩니다. 추정된다고 쓴 이유는, 저는 2016년부터나 사이클을 본 사람이고, 이 시절의 기록이나 증언이 인터넷에는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자료를 모아 본 결과 대체로 이 때부터다라는 잠정 결론을 낸 것입니다.

1994년 아르덴 클래식 중 한 경기인 La Fleche Wallonne에서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Gewiss라는 팀 소속의 이탈리아 선수 세 명이 거의 90km에 가까운 거리를 독주합니다. 상식적으로 펠로톤이 3명보다 후반으로 갈 수록 훨씬 빠른 것은 자명하며, BA를 저렇게 치면 특히나 아르덴 같이 업다운이 많은 코스에서는 쉽게 지칩니다. 그런데 이 셋은 그런 상식도 비웃듯 점점 펠로톤과 격차를 벌려버리면서 최종적으로 1분이 넘는 차이로 셋다 골인해 버립니다. 포디움을 한 팀 소속 세명이 다 먹어버리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죠. 그뿐만이 아니라 그날 최종 Top 10중 8명이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해당 경기 하이라이트입니다. 마지막까지 미친놈처럼 페달을 밟는 3인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보니 같은 코스에서 그 전까지 경기 평균속도가 40km/h를 넘은 적 자체가 없는데, 이날 경기 평균시속은 43km/h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선수들 증언으로도 이날따라 유독 펠로톤 속도가 전에 비해 빠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하죠. 펠로톤의 모든 선수들이 이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놈들이 이거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했구나' 다른 선수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팀들이 Gewiss에게 따져서 니들 뭐 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당시 Gewiss의 팀 닥터는 위에서 말한 Conconi의 제자, Michele Ferrari였습니다. 이 사람의 발언이 후에 나온 랜스 암스트롱 다큐멘터리에서 밝혀지는데, 정말 걸작입니다.

"EPO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쓰기 나름이죠. 오렌지 주스도 하루에 10리터 마시면 죽잖습니까."

물론 이 발언 직후 Gewiss에서 잘리고, 팀도 스폰서가 시즌 끝나고 스폰을 철회하면서 해체되지만, 페라리의 명의(?)로서의 명성은 드높아지고, 개인 병원을 차리는 계기가 됩니다...


이 이후로는 정말 도그나 카우나 돈만 있으면 EPO를 써대게 됩니다. 정말 악명높은 팀으로는 Mapei라는 팀이 있는데, 글을 따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이클 사상 가장 강력한 팀으로 평가받습니다만, 동시에 사이클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팀입니다. 거의 모든 선수가 조직적으로 EPO를 해댔고, 결국 스폰서였던 Mapei가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까지 타격이 오자 스폰을 접으면서 가장 강력한 팀이 해체되어 버렸죠. 그리고 이 팀이 그 시절 서브스폰이었던 Quickstep이 메인으로 올라오면서 현재의 퀵스텝으로 재창단된 것입니다... 현재 퀵스텝 감독인 르페베레가 마페이 감독이었죠. 그래서 르페베레도 약물과 관련해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데, 워낙 사이클 판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산 자체가 안되어있는 막장이라...(이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후술하겠습니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Once(후신인 Astana 창단 후 몇년 뒤까지), Mapei, RadioShack, Team Sky가 사이클 사상 약물로 가장 악명이 높은 팀이 아닐까 싶습니다. Once는 나중에 Operacion Puerto라는 사건을 따로 이야기하면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Mapei는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RadioShack은 랜스 암스트롱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할 계획입니다.


90년대 중반~말까지 지로나 투르를 보면 정말 약물 스캔이 한 해도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마페이는 아예 TDF에 초대조차 매년 받지 못할 정도였고, 1998년 Festina 사건, TDM 사건... 매년 십수 명의 선수들이 대회 도중 도핑을 탈락하던가 약물 유통 적발로 퇴장당합니다. 정말 웃긴 건, EPO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전까지는 도핑 테스트로 적발을 할 수 없었던 약물이라는 겁니다... 물론 혈중 비정상적인 적혈구 농도를 이용해서 대체로 이 놈 EPO를 했다 이정도까지는 특정할 수는 있었지만, '나 딴사람보다 선천적으로 원래 적혈구 수치 높았음'이라던가 '그거 체내에서 잠시 과량 합성된거임' 하는 핑계로 죄다 빠져나간... EPO는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체내에서도 합성이 되서 참 이게 골때리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로 적발된 사건을 보면 방식이 현장 급습... 이 시절 보면 진짜 개막장이 따로 없습니다. 의심되는 팀의 팀카 트렁크만 까 봐도 약국을 차릴 급의 다량의 약이 나왔다고 하던 시절입니다.


많은 올드 사이클 팬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 EPO 자체는 90년대 초부터 금지되었던 약물입니다. 도핑 테스트로 걸러내지 못한 게 2000년까지인 거죠. 시드니 올림픽부터 도핑 테스트로 EPO를 100% 걸러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Xe 가스를 자가수혈 시 같이 주입해서 자연적으로 적혈구 수치가 높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고...(이 Xe가스 주입은 격투기 선수들도 많이 이용해 먹었습니다) 언제나 창은 방패보다 강합니다.


2000년 이후로도 EPO 적발은 계속됩니다. 워낙에 효과가 약물이다 보니... 랜스 암스트롱은 위에서 말한 의사인 페라리의 주 고객이었는데, 선수 시절 수많은 의혹을 뿌리치다 결국 은퇴 이후 2013년 1월에 자신의 EPO 복용사실을 전부 털어놓게 됩니다. 그렇게 도핑 적발기술이 발전되어도 도핑 기술이 한참 앞서있다는 거죠. 주로 약물 적발은 도핑 테스트보다 약물 유통과정이 적발되고 그 과정에서 해당 의사나 병원의 장부를 까보는 과정에서 선수들과 연관성을 찾게 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랜스도 저 거래내역이 결정타가 되었죠. 사실 랜스의 제명은 약물 복용 그 자체보다 랜스가 감독이었던 브뢰닐과 함께 동료 선수들에게 약물을 강요하고, 자신의 약물 복용사실을 아는 동료나 직원들에게 온갖 공갈과 협박을 가하면서, 자신은 클린한 척하고 라이벌 선수들을 약쟁이라고 몰아붙이는 내로남불이 더 컸습니다.


이태리 의사 3인방 중 Conconi와 Cecchini는 법정에 결국 소환됩니다만 자기 변호를 잘 했는지 의사 자격 정지까지는 먹지 않았고, 페라리는 너무 연루가 많이 되어서 의학계에서도 제명됩니다. 이 셋은 영어권 위키나 사이클 사이트에서 무조건 'notorious'라는 수식어가 꼭 붙을 정도로 사이클계에 어두운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들입니다. 저 셋을 안 거친 그랜드 투어 우승자는 막말로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선수 시절 내내 도핑 적발기록이 없는 인두라인조차 소속팀인 Banesto 전원이 Conconi 병원을 들락날락거렸다고 할 정도니 그냥 2010년대 이전 사이클은 약물에서 자유로운 선수가 아무도 없다고 보면 됩니다.

http://corearoadbike.com/board/board.php?t_id=Menu03Top1&no=691358

사이클이 그간 얼마나 약에 절어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입니다. 저기에서 Bugno는 EPO의 최조 사용자 정도로 인식되는 사람인데 왜 기록이 없는지 잘 모르겠고, Indurain도 사실상 약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세스트레도 ONCE 소속이었고. 그러면 정말로 90년생 현역인 퀸타나만 남죠. 저중 대부분이 EPO 내지 자가수혈법 사용자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이클의 인기는 90년대 말 최전성기를 달립니다. 아직도 사이클 사이트에서 언급되는 이름들-인두라인, 판타니, 랜스, 랜디스, 율리히... 클래식으로 가면 뮤세이유, 프라일레... 그런데 정말 그럴 법합니다. 그시절에는 약이라는 걸 몰랐고, 다들 미친놈처럼 쌩쌩 달리고 그랬으니 열광하지 않았을 수가... 자전거 자체가 근 10년사이 꽤 발전이 있었는데도 현역 최고의 클라이머인 퀸타나의 알프듀에즈 기록이 저 위치라는 점만 봐도 그렇죠.

그래서 제목을 저렇게 지었습니다. 제가 고안해낸 건 아니고, 위에 링크했던 영상의 댓글에서 따왔습니다. 댓글들만 봐도 당시의 분위기를 비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의 마무리는 그 시절 선수들의 활약상...영상 하나를 링크하면서 끝맺을까 합니다. 90년대 얼마나 약물이 맹위를 떨쳤는지, 그리고 그때의 엄청난 기록상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는지, 왜 지금은 사이클 인기가 그때에 비해 시들한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20년 전조차 사이클 대회에서 헬멧이 의무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PS. 2018년 EPO는 야구에까지 진출합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포수 웰링턴 카스티요가 도핑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는데, 적발된 약이 EPO... 야구 사이트에서는 그렇게 이야기가 많지 않았는데 저 약이 뭔지 아는 사람들은 경악을 한..



5
  • 1994년 경기 댓글이 명작이네요, Fast as a FERRARI 보면서 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면서 과연 지금은 깨끗할까? 하는 생각이...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41 6
14625 의료/건강SOOD 양치법 + 큐라덴 리뷰 3 + 오레오 24/04/26 116 0
14624 일상/생각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4 kaestro 24/04/26 308 1
14623 방송/연예요즘 우리나라 조용한 날이 없네요 5 + 니코니꺼니 24/04/26 570 0
14622 IT/컴퓨터5년후 2029년의 애플과 구글 1 + 아침커피 24/04/25 335 0
14621 기타[불판] 민희진 기자회견 63 + 치킨마요 24/04/25 1638 0
14620 음악[팝송] 테일러 스위프트 새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김치찌개 24/04/24 131 1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590 17
14618 일상/생각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했고, 이젠 아닙니다 18 kaestro 24/04/24 1121 17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0 과학상자 24/04/23 810 9
14616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676 14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1401 8
14614 IT/컴퓨터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2 kaestro 24/04/22 349 1
14613 음악[팝송] 밴슨 분 새 앨범 "Fireworks & Rollerblades" 김치찌개 24/04/22 114 0
14612 게임전투로 극복한 rpg의 한계 - 유니콘 오버로드 리뷰(2) 4 kaestro 24/04/21 334 0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2 joel 24/04/20 1232 30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33 홍당무 24/04/20 1562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87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30 1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5 kogang2001 24/04/19 391 8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365 10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552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822 12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266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88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