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6/02 22:55:43수정됨
Name   메존일각
Subject   결혼식의 추억
결혼식 전날 저녁, 친구들이 전야제랍시고 모 대학가 호프집에 모였습니다. 다들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즐겼지요. 그렇게 한 두시간쯤 지났을까, 예비 신부로부터 처가댁에서 신랑을 맞으러 친척 어르신들이 모이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재밌게 놀라 얘기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지요.

다음날. 오후 1시 결혼식이라 아침 일찍부터 헤어샵에서 머리며 옷이며 몇 시간씩 세팅하고 오전 11시 반쯤 양가 부모님, 신부와 함께 식장에 도착했습니다. 정오가 되니 친구 몇 녀석이 오네요. 다들 표정에서 피곤함이 묻어났습니다. 어제 어쨌는지 물으니 거의 아침 6시까지 술을 마셨답니다. 웃으며 "적당히 마시지 그랬냐." 핀잔을 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정작 사회를 봐줄 친구가 연락도 없이 안 옵니다. 느낌이 이상하여 전화를 했으나 역시 받지를 않더군요. 그때가 식 30분 전이었습니다.

이쯤 되니 머리 속이 하~~얘졌습니다. 식 사회자를 서둘러 찾아야 했지만 식장도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대체자를 못 구하지요. 하객들을 맞아야 할 신랑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사무실을 비롯해서 전화도 걸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바빴습니다.

그러다 한 친구가 달려와 녀석과 연락이 되었다 합니다. 날새기로 술 마시느라 골아 떨어져 못 일어났던 거고, 부랴부랴 출발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때가 식 20분 전이었을까. 녀석 집이 식장에서 멀지 않으니 아슬아슬 오겠지 싶었습니다.

식 시작 5분 전. 도무지 들어온단 소식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신부와 함께 준비 공간에 들어가야 하는 판이었죠. 옆 친구가 전화를 해보니 식장 진입로 부근의 차량 정체현상이 엄청나서 차가 들어오질 못한다는 암울한 얘기만 들려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결혼식 며칠 전 사회자 대본을 애드립까지 포함하여 미리 써뒀던 터였습니다. 뭔 일이 있을지 몰라 집에서 대본 출력까지 다 해왔고요.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했던 건 아니었고 그냥 불안하니까 하나라도 더 준비 해두자는 마인드였죠.

즉시 축의금을 받는 사촌 동생에게 다가가 대뜸 대본을 건넸습니다. "동생아, 미안한데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무조건 이대로만 읽어줘." 왜 사촌동생이었냐면 다른 친구들은 행색이 엉망이었거든요. 동생은 불안한 표정으로 식장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식은 진행되었습니다. 동생이 더듬더듬하면서도 잘 진행해 주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할 건 해야 되니까 신부 몰래 준비한 축가를 부르고 신부는 당황하고(...) 아버지께서 하객들께 한 말씀 하셔야겠다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시고 아무튼 기념촬영까지 식이 끝났습니다. 그때까지 친구는 오지 않았고요.

바삐 한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을 마친 후 식사 장소로 나와보니 문제의 그 친구가 도착해 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알람을 맞춰놓고 잤는데 곤히 잠들어 듣지 못했고 친구 어머님도 (친구가 얘기를 안 하니) 그냥 알람이 울리나보다 하여 안 깨우셨다는 겁니다.

친구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 쌩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결혼식 때 두고보세. 내가 무조건 사회 맡을 테니 아무도 탐내지 말고."
다들 웃고 난리가 났지요.

... 그런데! 그때가 언젠데! 그 친구놈이 여태 결혼을 안 합니다!
사귀는 사람도 없고 이대로 가다간 평생 안 할 것 같습니다.
복수를 해야 하는데. 으득! ㅠㅠ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6-17 12:2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2
  • 아아 복수의 끝은 어디인가
  •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87 기타당연한 육아는 없답니다 16 밀크티티 16/10/20 6508 22
320 일상/생각면접으로 학부신입생 뽑은 이야기 47 기아트윈스 16/12/10 7577 22
325 일상/생각지가 잘못해 놓고 왜 나한테 화를 내? 42 tannenbaum 16/12/18 6742 22
372 의료/건강우울은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38 깊은잠 17/02/22 8500 22
421 정치/사회무지개 깃발. 61 tannenbaum 17/04/28 6921 22
530 음악노래에는 삶의 냄새가 너무 쉽게 깃들어. 12 틸트 17/10/17 7082 22
548 문화/예술남자. 꿈. 노오력. 10 알료사 17/11/18 8422 22
554 일상/생각삶의 무게... 12 사나남편 17/11/29 5301 22
564 일상/생각이상하게도 슬리퍼를 살 수가 없다 21 소라게 17/12/21 7241 22
650 문학오늘 너무 슬픔 4 아침 18/06/21 6447 22
754 일상/생각짧은 세상 구경 8 烏鳳 18/12/30 5362 22
813 일상/생각결혼식의 추억 20 메존일각 19/06/02 5473 22
888 일상/생각4C - 글을 쓸 때 이것만은 기억해 두자 21 호타루 19/11/15 6948 22
918 일상/생각처음 느낀 늙음 3 행복한사람 20/02/03 4918 22
942 정치/사회[데이빋 런시만] 코로나바이러스는 권력의 본성을 드러냈다. 10 기아트윈스 20/04/02 5960 22
997 요리/음식대단할거 없는 이탤리안 흉내내기. 15 legrand 20/08/16 5008 22
1031 체육/스포츠손기정평화마라톤 첫풀코스 도전기 12 오디너리안 20/11/17 3891 22
1038 역사두 번째 기회를 주는 방탄복 6 트린 20/12/11 4641 22
1064 문학지난 두달동안 읽은 책들 간단리뷰 5 샨르우르파 21/02/28 5118 22
1081 의료/건강COVID-19 백신 접종 19 세상의빛 21/04/17 4914 22
1150 일상/생각벨기에 맥주 오프모임에 참석하지 못해서 하는 벨기에 맥주 셀프시음회(어?) 10 세리엔즈 21/12/08 3919 22
1167 일상/생각내 고향 서울엔 11 사이시옷 22/02/14 3802 22
1180 일상/생각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3편) 12 化神 22/03/25 4191 22
1183 일상/생각농촌생활) 3월 중순 - 4월 초 18 천하대장군 22/04/08 3394 22
1239 정치/사회한국 수도권-지방격차의 의외의 면모들 45 카르스 22/09/20 5827 22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