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10/03 06:06:02수정됨
Name   메존일각
Subject   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상-
* 본 글은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며칠 전 타임라인에서 인하대 얘기가 나와 삘 받아서 썼습니다. 분량이 길어진 탓에 상, 하로 분리합니다.
*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는 모두 웹에서 검색한 것들입니다.


1. [조선의 개항 및 극심한 혼란 속에서]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으로 일컬어지는 불평등조약,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을 맺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은 1883년, 제물포(현재의 인천)가 일본의 강요에 의해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강제 개항되었습니다.

조일수호조규 당시의 모습

제물포에는 각국 영사관과 조계가 들어섰습니다. 일본 조계가 최초로 설정되었고, 청국조계와 (서양) 각국조계가 뒤를 이어 형성되었습니다. 개항장을 총괄하는 인천해관과 감리서도 설치되었습니다. 개항과 더불어 외래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들자, 인천의 사회와 문화는 급격히 변화되어 갔습니다. 1900년대 초반까지 인천은 전국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곳이 조선 최대의 무역항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청국과 일본은 한반도 내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세력다툼을 벌였습니다. 서구 열강 또한 이권 개입 경쟁에 뛰어들며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등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여 사회적 혼란도 가중되었습니다.

러일전쟁의 시발이 된 제물포해전. 일제는 선전포고 없이 포격을 개시하였다.

1899년 심한 가뭄과 홍수로 큰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화되었고, 1901년에도 전국적으로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신축 대흉년) 이런 와중에 일본은 한국에서 쌀과 곡물들을 대량으로 반출해 감으로써 양곡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고종 황제는 1898년 청국 및 1901년 안남(베트남)에서 쌀을 수입하였고, 1901년 7월 양곡의 국외반출을 금지하였습니다.

하와이 이민은 한국의 빈곤의 경제적 요인 외에도 부패와 혼란으로 치달은 불안정한 정세를 벗어나려던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한인의 하와이 이민 사업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회가 주한미국공사관 서기 알렌(Horace. N. Allen)에게 부탁을 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2. [하와이 이민의 배경]
하와이에서는 19세기 중반 무렵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설탕 수요는 증가했으나 미국 남부에서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기후 조건상 하와이가 주목받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하와이의 주된 농장물은 커피였는데, 1835년경 사탕수수가 커피를 대신하는 재배지로써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하와이 경제는 대규모적이고 노동집약적인 농장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사탕수수의 초기 농장 노동력은 하와이 및 태평양 여러 섬의 원주민이었습니다. 그들의 노동력은 신통치 않았으나 처음에는 설탕의 수요가 크지 않아 생산에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설탕 수요가 크게 늘게 되면서 농장주들은 새로운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대안으로써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국인 이민 금지법 풍자화

중국인들은 비교적 온순하였으나 점차 도시로 이동하여 저임금을 바탕으로 미국 상인들과 경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인 및 아시아인들에게 관대하지 않았던 미국은 1882년 중국인을 배척하는 ‘중국인 이민 금지법(Chinese Exclusion Act)’을 통과시켜 더 이상 중국인을 고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국인을 대체하여 빠르게 증가하던 일본인 이민자는 중국인보다 자존심이 강했고, 수를 바탕으로 파업 등 조직적인 노동 운동을 전개합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분포를 보면, 총 42,242명 중 일본인은 31,029명으로 73.5%, 중국인은 3,928명으로 9.3%였을 정도입니다. 농장주들은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일본의 국력은 허약한 청국에 비해 강대했기 때문에 일본인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하와이 경제는 5개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쥐고 있었는데, 그들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하와이 왕조를 전복합니다. 1893년에는 돌(Sanford B. Dole)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하와이 공화국’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은 하와이 백인들을 위협하였고 일본 정부도 정치적이고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려 하자, 하와이 백인들은 미국과의 병합만이 하와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1898년 하와이는 미국과 병합하게 됩니다.

하와이 공화국 대통령 돌과 그의 각료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장주들은 일본인의 이주를 억제할 대안을 찾게 됩니다. 당초에는 중국인들을 다시 데려올 생각도 하였지만, 미국 본토의 ‘중국인 이민 금지법’이 걸림돌이 되자 드디어 ‘착하고 온순하며, 인내심이 강하고 부지런한 민족’으로서 한국인들이 거론되기 시작합니다.


3. [알렌의 고종 설득]
한편, 한반도에는 앞서 설명한 주한미국공사관 서기이자 선교사였던 알렌이 있었습니다. 그는 1884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1905년까지 21년간 한국에서 체류했던 인물입니다. 고종의 주치의로 발탁되어 황실과 인연이 깊었고, 조선의 정치 문제에도 적잖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던 알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인물이었다.

특히 ‘을미사변’ 이후 알렌은 주도면밀한 계획을 통해 일제의 민감한 감시를 피하여 고종과 세자를 안전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킵니다. 다들 잘 아시는 ‘아관파천’입니다. 이로 인해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 알렌은 조미 관계에서 핵심적 중재자로 역할을 하였는데, 1897년 알렌이 미국 공사로 임명된 데에는 당시 오하이오 주지사이자 친구였던 내쉬(G. K. Nash)의 추천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1900년경 러시아 공사관 모습

1902년 3월 31일 고종을 알현한 알렌은 한인의 하와이 이민과 관련하여 고종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알렌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공사가 되도록 힘써준 친구 내쉬에게 빚을 갚을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고종은 알렌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한인을 하와이로 이민 보내는 것은 미국의 관심을 끌어 대한제국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고, 알렌이 당시 위대한 중국인들이 가지 못하는 곳을 한인들은 갈 수 있다는 명목으로 고종의 긍지심을 유발했던 것도 주효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1902년(광무 6년) 11월, 미국인 데쉴러(David. W. Deshler)가 [외국에 고용되는 대한제국의 노동자들 총괄을 미국 시민인 데쉴러에게 부여함]이라는 인증서를 받게 됩니다. 한인의 하와이 이민 사업권을 따낸 데쉴러는 내쉬의 양아들이었습니다. 데쉴러는 알렌의 추천을 받고서 고종으로부터 하와이 이민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입니다.

데슬러의 모습


4. [첫 이민자를 모집하라!]
이제 여권 발급 등 이민 업무를 담당할 기관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동안 조선 및 대한제국에서는 한인이 해외로 허락 없이 국경을 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고 백성이 외국으로 이민한다는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기구가 없었습니다. 고종의 승인 직후인 1902년 11월 16일 궁내부 산하기구로 [유민원(綏民院, Office of Emigration Service)*]이 설치되었고 초대 총재로 [민영환*]이 임명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외무부의 여권 업무와 해외개발공사의 기능을 합한 것 같은 기구입니다. 이 유민원은 설립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1903년 10월에 폐지됩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민영환 사진

* ‘수민원’이 아닌 ‘유민원’인 이유는, ‘綏’는 본래 ‘편안할 수’로 읽지만 당시 같은 이름의 기관이 있어 ‘깃발늘어질 유’로 읽었다고 합니다. 인천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도 '유민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윤치호 선생의 영문일지에 '유민원'이라 표기된 것을 근거로 한 것 같습니다.
* 민영환(閔泳煥, 1861.08.07.~ 1905.11.30.)은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조선 말기의 관료입니다. 을사늑약 이후 자결한 애국지사이기도 합니다.

대한제국의 유민원 총재가 발행한 집조(여권)을 받고 떠난 하와이행 이민자들을 우리 이민사에서는 첫 번째 이민으로 여깁니다. 정부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첫 번째 인력 송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최초의 미국 입국은 아닙니다. 1899년부터 1902년 사이에 하와이 및 미국의 입국자는 168명에 달하는데, 그들은 정치적 목적의 방문자거나 신문물을 배우기 위한 학생, 상인 등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집조. 1902년(광무6)에 발급된 것이다.

이민자 모집은 데쉴러가 설립한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회사는 본사를 제물포에 두고서, 서울을 비롯해 부산, 원산, 목포, 진남포 등 전국 개항장에 지사를 설치하여 대대적으로 이민모집에 들어갑니다.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고 항구와 기차역, 시장 등에 모집공고를 붙이며 직원들이 홍보를 하였다고 하는데 초기에는 별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고향을 버리고 낯선 땅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을 떠난다는 것은 불효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와이 이민자 모집공고


5. [미지의 땅 하와이로...]
이런 우여곡절 끝에 121명의 인원이 모집되었습니다. 이들은 ‘상투를 자르고 한복을 벗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채’ 1902년 12월 22일 지금의 인천 중구 내항인 제물포에서 [일본우선주식회사*]의 겐카이마루(玄海丸)호에 승선하여 일본 나가사키 항으로 떠나게 됩니다. 12월 24일 나가사키항으로 도착한 이민 희망자들은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와 예방 접종을 받습니다. 이 신체검사에서 19명이 탈락하게 되어 102명(통역 2명 포함)이 갤릭(S.S. Gaelic)호에 승선하여 하와이로 도해하게 됩니다.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인천의 해운업을 독점하였다. 
건물은 1880년대 말께 건립된 것이다.

*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는 미쓰비시 상사의 원류가 되는 기업으로 현재는 아트플랫폼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 군부의 사령부로도 이용되었습니다.

102명에 대한 거주지는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 9명, 서울 7명, 경기도(과천, 파주, 남양) 3명, 나머지(목포, 전주, 경산, 미기재 등) 6명이었습니다. 현재의 인천지역 거주자가 전체의 84%에 달하는 86명으로 대다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제물포의 감리교인 내리교회(현재 인천 동인천역 인근) 담임목사였던 존스(George H. Johnes)가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한 덕분이었습니다. 하와이를 가나안 땅에 비유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비전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었고, 전체 인원 중 50여 명은 내리교회 교인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테면 '한국판 디아스포라(Diaspora)'였던 셈입니다.

인천 내리교회 복원 모습

이 102명의 연령은 14세 이하 남자 16명, 여자 11명이었고, 29세 이하 남자 22명, 여자 12명이었습니다. 39세 이하 남자 30명, 여자 8명이었으며, 49세 이하 남자 2명 여자 1명이었습니다.

나가사키항에서 호롤룰루항으로 향한 갤릭호

최초의 이민자 102명은 1903년 1월 13일 새벽, 호놀룰루 항에 도착합니다. 호놀룰루에서 입국을 위해 보건 당국의 검역을 거치게 되는데 질병자 16명이 탈락하고 최종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토록 엄격한 검사를 거쳤던 이유는 한인의 건강을 걱정해줘서가 아니고 사탕수수 노동이 무척 힘들었기 때문에 고된 노동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노동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인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의 모습. 고되고 또 고되었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출항한 이민자는 1902년 12월 22일 121명을 시작으로 1905년 8월 8일까지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었습니다.(구체적인 수는 연구가 지속되며 조금씩 늘어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앞으로도 더 늘어날 수 있겠죠.) 12개 지역에 불과했던 초기 이민자는 1903년 3월 3일의 제2진 이민자가 되어선 28개 지역으로 늘어났고, 1904년 2월 8일 도착자는 73개 지역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하와이 이민자는 1905년에 접어들며 그 수에 탄력이 붙게 되나, 일본인의 하와이 이민과 상충을 막으려던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1905년 4월부터 전면적인 금지령이 내려집니다.

['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하-'편( https://redtea.kr/?b=3&n=9762 )으로 넘어감]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0-15 11:2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9
  • 아침부터 이런 정성글을!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17 정치/사회군사법원은 왜 군의 입맛에 맞게 돌아가는가. 8 烏鳳 17/04/23 6913 17
922 일상/생각군대 친구 이야기 3 化神 20/02/15 5230 17
495 기타국제법이 헌법보다 위에 있을까? 8 烏鳳 17/08/16 6815 12
582 과학국뽕론 44 기아트윈스 18/01/25 7929 36
413 꿀팁/강좌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세요! 34 열대어 17/04/16 7534 15
260 체육/스포츠국내 축구 이야기들 8 별비 16/09/02 6777 5
872 역사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하- 10 메존일각 19/10/03 6267 17
871 역사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상- 메존일각 19/10/03 6090 19
760 정치/사회국가유공자등록거부처분취소 소송의 경험 3 제로스 19/01/18 5601 19
1325 정치/사회구척장신 호랑이 포수 장군의 일생 3 당근매니아 23/09/05 2623 16
1154 일상/생각구박이는 2021년에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62 구박이 21/12/23 5303 71
394 일상/생각구두통 메고 집 나간 이야기 16 소라게 17/03/22 4774 18
925 기타교육심리학의 20가지 주요 원리 11~20 16 호라타래 20/02/20 5755 20
475 일상/생각괜찮아. 스로틀은 살아 있으니까. 3 틸트 17/07/19 5553 16
684 여행관심 못 받는 유럽의 변방 아닌 변방 - 에스토니아 6 호타루 18/08/15 8311 16
819 과학과학적 연구의 동기부여는 시대를 어떻게 대변하는가? 30 다시갑시다 19/06/18 6607 37
130 철학/종교과학의 역사로 읽어보는 형이상학의 구성과 해체 30 뤼야 15/12/13 8609 5
1295 문학과격한 영리함, 「그랜드 피날레」 - 아베 가즈시게 6 심해냉장고 23/04/24 2792 16
784 일상/생각과거 카풀 드라이버 경험 11 행복한고독 19/03/24 6090 14
966 일상/생각공부하다 심심해 쓰는 은행원의 넋두리 썰. 14 710. 20/06/06 6027 32
1024 정치/사회공격적 현실주의자 Stephen M. Walt 교수가 바이든을 공개 지지하다. 6 열린음악회 20/10/29 4695 13
288 일상/생각골목길을 걷다가 20 마르코폴로 16/10/21 7097 5
661 의료/건강고혈압약의 사태 추이와 성분명 처방의 미래 28 Zel 18/07/10 6926 21
712 일상/생각고해성사 19 새벽하늘 18/10/12 5459 46
472 일상/생각고시낭인이라 욕하지마라. 17 tannenbaum 17/07/14 6924 26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