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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18 00:33:46수정됨 |
Name | 호라타래 |
Subject | 섹슈얼리티 시리즈 (7) - 마이 리틀 섹시 포니 |
Bailey, J., & Harvey, B. (2019). ‘That pony is real sexy’: My Little Pony fans, sexual abjection, and the politics of masculinity online. Sexualities, 22(3), 325–342. https://doi.org/10.1177/1363460717731932 요약 https://www.youtube.com/watch?v=OUKj92gY-Bs My Top 5 Favorite My little Pony Songs From Friendship is Magic 마이리틀포니(My little pony; MLP)는 미국 완구회사 해즈브로의 브랜드에요. 완구로 시작해서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미디어 믹스를 통해 브랜드를 확립했지요. 마이리틀포니는 여아를 타겟으로 한 브랜드지만, 브로니(bronies)라 불리는 성인 남성 팬들도 많아요. 대중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브로니의 내러티브는 [우정은 마법(friendship is magic)]으로 대표되는 마이리틀포니 시리즈의 가치체계와 연결되는 경우가 다수지만, 일부 팬들은 4chan 게시판에서 마이리틀포니 캐릭터들을 성적으로 소비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했어요. 연구자들은 게시판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성적인 욕망을 둘러싸고 공유된(communal)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을 조사했어요. 이 남성 팬들은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정상적이고 이성애적인 욕망의 외부에 위치시켰고, 여성화된 조랑말을 향해 공유된 섹슈얼리티는 이 남성들을 비체(abject)로 만들어요.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공유하고 규제하면서, 이 남성들은 남성성 실패(masculine failure)라는 감각을 공유하고, 진보적인 젠더 변화에 적대적인 정치를 지지하는 담론을 형성해요. 따라서 저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집합적으로 형성된 성적 욕망이 반동적인(reactionary) 젠더 정치 하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들어가며 마이리틀포니는 암컷 조랑말들의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이에요. 따라서 여아를 대상으로 만든 이 애니메이션에 남성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해석하려는 경우 성적이거나 젠더적인 함의와 선을 그으려는 형태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포니들의 동료애가 전역 군인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이 군인들이 브로니가 되었다는 것처럼이요. 두드러지게 '여성적인' 콘텐츠에 남성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정상적인 남성성의 전형을 위반하기에 일탈적인 섹슈얼리티로 비춰지거나, 혹은 사회에서 낙인찍히는 페티시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았거든요. 하지만 상기한 서사는 오프라인과 공공적인 공간에서만 유효해요. 성적인 비순응성은 공적인 공간에서 처벌받고는 하니까요. 온라인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익명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쉬운 온라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는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요. 저자들은 4chan 사이트의 MLP 게시판을 눈팅(lurking)했어요. 그 결과로 브로니 팬덤 중 일부를 이루는 이 온라인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안티페미니즘 담론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정리했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집단적 성적 수치감(collective sexual shame)이 여성의 성적 파워와 남성의 부당한 희생(victimization)이라는 광범위한 담론과 연결되는 가능성을 입증했어요.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이성애(Hegemonic masculinity and heterosexuality) 이전까지 연작에서 정리했듯이 젠더와 권력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젠더는 정체성과 정체성 사이 관계로 구성된 권력의 장이지요. 때문에 [어떻게 남성이 자신들의 구조적인 지위나 정체성의 결과로서, 물질적인 신체와 문화적인 이상 양쪽 모두에서 서로 다양한 수준의 힘을 부여받는가]는 중요한 연구주제여요. 젠더는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신체적 능력이 복잡하게 교차하기에 언제나 다층적이에요. 말하자면, 남성은 다른 남성들과 그리고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각기 다른 이익과 불이익을 경험해요. 권력의 장 내에서 헤게모니적인 남성성은 중심에 위치해요. 이 상상 속의 인물은 남성성이 대변하는 바람직한 가치를 표현하고, 그 존재 자체가 가부장적 지배를 정당화해요. 이 남성성을 구현한(embody) 남성은 물질적 성취를, 그렇지 못한 남성은 처벌을 받아요. 때문에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이 남성들을 상처입힘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가부장제에 종사(investment) 하지요.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언제나 특정한 맥락에서 구성되요. 젠더든, 인종이든, 심지어 서브컬쳐든 남성성은 부분적으로 '남자다운 행동manhoods acts' 혹은 헤게모닉적인 남성성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을 통해 구성되요. 이전 연작에서 젠더하기(doning gender)을 짚었던 것을 떠올려보셔요. 젠더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 형성되요. 또한 남자다운 행동은, '남자라면 해서는 안 되는' 부정적인 모습을 피하는 걸 가리키기도 해요. 이 부정적인 모습을 비체(abject)라 부릅니다. 할페린(Halperin, 2009)의 정의에 따르자면 "낙인을 피하기 위해 부정되어야 하는 자아의 더러운 부분 an unclean part of the self that must be denied in order to escape stigma"지요. 앞서 언급했던 헤게모닉한 남성성 모습은 주체(subject)이지요. 크레스테바는(Kristeva, 1982:7) 주체가 비체를 혐오하면서 타자에 대항하는 방어적 입장을 취한다고 짚습니다. 남성성의 비체로는 여성성, 감정성, 불완전한 이성애성 등이 있지요. 섹슈얼리티는 비체 남성성(abject masculinity)를 구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요. 남성들은 가정, 공교육, 생애 전체에 걸친 직장 환경 속에서 이성애를 강요받고, 이성애를 행위성/역량 개념과 얽힌 성숙을 향한 경로로 경험해요. 이성애적 욕망을 가리키는 증거는 남자다움의 발전을 상징하는 걸로 비추어지지요. 예를 들어, 아버지들은 어린이의 섹스 소비를 금지하면서도 동시에 소년의 포르노그라피 소비를 적합하다고 인식해요. 이성애적 정력을 보여주는데 실패한 남자들, 이를테면 '너드nerd/범생이'들은 자신들이 다른 분야에서 앞섬에도 불구하고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는 걸 발견하지요. 또한 남성들은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기를 기대받아요. 이성애에서 벗어난 욕망은 음지로 숨어야 하고, 무의식적이고/이해할 수 없는 걸로 그려져요. 규범적인 이성애성을 실연하는 것(performing)은 비체의 지위를 피하기 위해 핵심적이여요. 물론 일탈적 섹슈얼리티가 남성성이 비체로부터 위협받는 유일한 길은 아니지요. 크레스테바의 주장을 따르자면,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위협하는 그 무엇도 비체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선행연구들은 규범적인 섹슈얼리티를 보존하는 것이 비체의 지위를 피하기 위한 핵심에 있다고 지적해요. 소년들은 농담과 모욕을 통해 'fag'라는 지위를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벗어나려고 해요. 이 fag는 실패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언어 표현이고요. 또래 집단은 이성애적 남성성을 실연하는가 아닌가를 면밀히 살펴요. 누가 야한 말을 더 많이 아나 경쟁하는 영국 학생들이 (Dalley-Trim, 2017) 좋은 예이지요. 몇몇 학자들은 호모포비비아가 남성성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몇몇 학자들은 남성성이 문화적으로 좀 더 유연해지기는 했지만 이성애가 지닌 특권이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공동체는 남성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매개해요. 성적이고 낭만적인 행동들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 부여를 하면서 집합적인 성적 정체성을 조형하지요. 예를 들어, 금욕적인 기독교인은 스스로를 성적으로 활발한 동료들에 비해 더 남성적이라 위치지어요. 자기통제력과, 성적인 충동에 저항하는 능력이 있다는 측면에서요. 픽업 아티스트들의 온라인 공동체는 게임과 같은 '유혹' 전략을 형성하는데, 이들의 전략은 구성원들의 남성성을 자기통제와 여성의 대상화라는 요소로 재구성하지요. 온라인 공동체는 남성성 실패에 더해 낙인찍히는 경험을 한 섹슈얼리티들에게 특히 중요해요. 상대적으로 익명화 되어 있고 유연한 온라인 공간은 섹슈얼리티의 '어두운 측면'이나, 주류 사회에서 낙인 찍히는 욕망을 탐색할 기회를 제공하지요. 낙인찍힌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에게, 온라인 플래폼은 경험을 공유하고, 분투하며, 그 과정에서 집합적인 정체성을 형성할 독특한 방식을 제시해요. 예를 들어, 온라인 수간(zoophile) 포럼의 구성원들은 밖에서는 쉽사리 드러낼 수 없는 자신들의 낙인찍힌 섹슈얼리티를 일종의 플랫폼으로 활용하여, 정치적 헌신, 윤리적 관점, 공공의 행동 방침을 포함하는 집합적인 자존감을 형성했지요 (Kavanaugh and Maratea, 2016). 온라인 커뮤니티는 성적 낙인을 둘러싼 정치가 발전하는 중요한 장소가 될 수 있어요. /mlp/ 소개 /mlp/는 영어권에서 가장 큰 이미지 보드 사이트인 4chan의 한 커뮤니티입니다. 이미지보드는 이미지 공유와 토론을 목표로 하는 사이트이지요. 사이트는 프로필을 형성하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가 없어요. /mlp/ 게시판 이용자들은 서로를 anon이라 부르지요. /mlp/는 외부인을 공격하고 소외시키는 적대적인 문화로 악명높아요. 4chan 사이트는 여성에게 적대적인 문화를 공유하고, 사이트 이용자들끼리는 서로를 fag라는 표현을 붙여서 표현하고는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프라인에서의 fag라는 용어에는 호모포비아적 함의가 담겨있지만, 4chan에서는 호모포비아적 색채가 훨씬 옅어졌지요. 정확한 대응은 아니겠다만, 한국으로 따지자면 ㅁㅁ충, XX충 같은 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방법론 및 자료 온라인 에스노그라피입니다. 게시판을 지속적으로 눈팅하면서 문화를 익히고, 직접적인 분석에는 댓글이 10개 이상 달린 207개의 쓰레드를 분석했어요. 이 쓰레드에는 최소 12개에서 최대 500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더 있지만, 이론 설명에서 시간을 많이 썼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 본문 중 일부 '난 그들을 향해 다그닥다그닥 거릴 수 있어요': /mlp/ 내에서 실패한 남성성을 주장하기 (‘I can clop to that’: Asserting sexual failure on /mlp/) 남성성의 실연은 특권적인 젠더 그룹에 속한다는 함의를 지니지요. 반대로 /mlp/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실패한 남성성을 글로 적어 공유하여, 자신들을 젠더 특권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로 구성하는 공간이에요. 이 실패는 포니 캐릭터들을 향한 낭만적이고 성적인 끌림과, 현실 여성에 대한 좌절과 양가감정의 형태를 띠어요. /mlp/ 유저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남성적 이성애의 지배적 이해 속에서 정상화 하기 보다는, '정상적인' 이성애적 관계를 달성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들을 비체(abject)로 자리매김했어요. 성적이고 낭만적인 환상을 표현하고 충족하는 것은 /mlp/를 구성하는 핵심이에요. 정기적으로 에로틱하고 낭만적인 픽션들이 올라오고, 사람들은 'writefag'들이 이야기를 완성할 것을 요구하지요. 포니는 성적인 대상입니다. 가끔 외설적인 색채가 덜한 글이 올라오더라도 포니는 성적 욕망과 행위의 대상으로 묘사되지요. 비인간 캐릭터, 그것도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캐릭터를 성적으로 매력적으로 묘사하면서, /mlp/는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섹슈얼리티의 경계 내에서 부정적인 쪽에 놓이게 되요. /mlp/의 anon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지닌 낙인찍힌/불편한 특성을 명백하게 알고 있어요. "만화 속 포니들한테 처음 매력을 느낀다고 깨달았을 때 님을 반응은 어땠음? What was your reaction when you first realized you were attracted to an animated pony?"라는 질문을 제기한 쓰레드에, anon들은 양가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무서웠고, 스스로한테 실망했었지 I was creeped out, and disappointed in myself." "이상하고 걱정되고... 나한테서 비롯된 게 아닌 것 같았어 Strange and worried. It kinda came out of nowhere for me." "진짜 믿을 수 없었어. 내가 만화 캐릭터에 빠져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거든 Disbelieving really... never thought I could get a crush on a cartoon character." 위에 묘사된 불편한 감정들은 /mlp/가 공유하는 성적인 문화가 비체의 지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요. 비체는 언제나 주체를 매료시키고, 역겹게 하는 '매혹적인 시작'을 자극하지요(Kristeva, 1982: 2). 더하여 이 '빠져든다'는 표현은 포니에게 끌리는 감정이 성적이면서 동시에 낭만적이라는 점을 보여줘요. 포니는 성적인 대상임과 동시에 이상적인 낭만적 배우자로 소중히 간직되요. 상술한 쓰레드에서 anon들은 다음과 같은 감정을 밝혀요, "나는 언제나 레인보우 대쉬가 좋았지만... 이 감정은 몇몇 이유들 때문에 더 강력해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멈출 수 없지. 그녀가 터프한 소녀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고, 그 페르소나는 그녀가 조금 부끄러워하는 스스로의 부드러운 측면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좋아... 그녀는 여전히 강한 사람이고, 자신을 지키는데 문제가 없지. 또한 두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 죽을 것만 같아. I always liked [Rainbow Dash], but.. . those feelings started getting stronger for some reason. And it just wouldn’t stop... I like the fact that she has this tough girl persona that’s hiding a softer side to her that she’s a little ashamed of... she’s still a very strong person, and has no problem standing up for herself. Also her eyes are to die for." 낭만적인 감정이 더해지면서 성적인 부끄러움은 낭만적인 부끄러움까지 확장되어요. 자신이 일탈적인 성적 대상을 욕망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고 불가능한 배우자를 욕망하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배우자는 '와이푸 waifu'라는 용어로 표현되요. 일본어 wife에서 빌려온 표현으로, 선호하는 가상의 여성을 가리키지요. anon들에게 waifu는 특별한 성적 끌림을 일으키는 포니를 말해요. 용례를 들자면 "그럼, /mlp/, 너네 waifu는 누구냐? 난 비닐 스크래치 So, /mlp/, who’s your waifu? Mine’s Vinyl Scratch"라고 물으면, "탁월한 선택이야. 그 포니 정말 죽여주지 Excellent choice, that pony is real sexy"라고 답하고, "난 그 포니를 향해 다그닥다그닥 (자위행위) 할 수도 있어 I can clop [masturbate] to that."라고 하는 식이지요. '말발굽질 clopping"은 포니라는 캐릭터와 연관되는 의성어임과 동시에, 자위 행위를 표현하는 은어지요. 그렇지만 waifu를 향한 열정은 이들의 매력 뿐만아니라 비현실성을 향한 것이기도 해요. waifu들은 소망스럽지만, 언제나 손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어요. 한 anon은 다음과 같은 성찰을 적었어요. "니들은 우리 waifus가 현실에 없다는 사실이 애석하지 않아?... 예: 넌 트와일라잇 스파크를 절대로 팔에 안을 수 없어. 넌 추운 겨울 날에 그녀의 따스함을 절대 지켜줄 수 없어. 넌 너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어 [D]o you get wistful over the fact that they [our waifus] are not real?... Example: You will never hold Twilight Sparkle in your arms. You will never keep her warm during the chilly winter months. You will never tell her you love her." 이러한 염원은 anon들이 지닌 외로움과 낭만적 소외를 증명해요. anon들은 집단적으로 자신들을 여성과의 관계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표상하고, 낭만적 실패를 빈번하게 불평해요. 예를 들어, 발렌타인 데이날의 몇몇 논의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외로운 저녁을 위로했어요. "우울하게 딸이나 치고, 내 waifu는 현실이 아니니 울고, 소파에 앉아서, 슬픈 영화나 보고... 매년 하던 것처럼 그리하지 Depressed fap [masturbation], cry because she [my waifu] isn’t real, sit on my couch, watch a sad movie or six.. . just like I do every year." 낭만적 관계에서 반복된 실패는 종종 anon들이 스스로를 이성애적 낭만적 경제에서 이탈한 것으로 틀짓게 만들어요. 이러한 이탈은 '너드 같은' 남성성의 지표지요. 사실 이러한 이탈의 감각은 이성애적 실패에 자발적인 색채를 씌우기도 해요. 자신들의 외로움을 좌절된 욕망 대신 적극적 거부로 틀짓는 anon들이 그러하지요. 이러한 거부는 커뮤니티 전체에 흐르는, 자신들의 여자친구, 아내, 섹스 상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anon들을 향한 적대감으로 나타나요. "이 게시판의 누군가 중 현실세계에서 동반자가 있는 인간들은 죽어야 해 Anyone on this board who cares about 3DPD [real life] companionship should die" 따라서, /mlp/의 평균적인 게시자들을 나타내는 담론적 표상은 '실패한 남성'이에요. 이성애 경제에 참여하지 않는, 못하는 남성이지요.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이성애적 경제의 구성에 반기를 들고 있더라도, 그 현존은 인정해요. 다음과 같은 글이 이를 보여주지요. "우리가 어떤 멋진 취미를 가지게 되고, 포니랑 하루종일 섹스하는 걸 생각하지 않게 될 때, 끔찍한 리얼충이 되는 거고 게시판을 나가야 해. 이 게시판에 알맞기 위해서는 삶이라고는 없는 변태새끼들이여야 하잖아. When we say that we have some nice hobbies and don’t think about fucking ponies all day, we are the hated normalfags and should leave the board. Basically we need to be perverted fucks with no life just to fit in." '니가 다시 본다는 걸 걔들한테 들키지 마': 비체적인 남성성을 게시판에만 담아두기 (‘Make sure they don’t see you watching it again’: Containing abject masculinity) 게시판 밖의, 오프라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규율을 집합적으로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저작권을 고려하여 생략합니다. '그들은 성적인 좌절이나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르지': 정치화되는 비체 (‘They don’t know what sexual frustration or loneliness are’: Politicized abjection) /mlp/ 게시판 유저들이 스스로를 비체로 자리매김하는 담론적인 위치짓기는, 현대적인 페미니즘으로 간주되는 것들과 대립하는 정치적인 서사를 발전시키는 자원이 됩니다. 페미니즘이 남성의 권력이 - 특히 섹슈얼리티 영역 속에서 - 현존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mlp/의 anon들은 자신들의 남성성을 자신들이 결여하고 있는 성적인 파트너 그리고 성적인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봐요. 더하여, 이들은 종종 여성이 이성애적 관계와 자존감에 쉽게 접근한다고 인지하지요. /mlp/의 anon들은 사회적 세계를 여성의 특권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한 anon은 여성이 남성보다 섹스 파트너를 쉽게 구한다고 주장했고, 나머지는 이에 동의했어요. "사실이야. 여자로 태어난다는 건 문자 그대로 40세까지는 편하게 산다는거지. 공짜 술, 공짜 섹스, 공짜 관심. 여자들은 성적인 좌절이나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를 걸 true. being born a girl... is literal easymode for the first 40 years. Free drinks, free fucks, free attention. [Women] don’t even know what sexual frustration or loneliness are." 이 anon의 눈에 여성은 단지 자신들의 젠더 덕분에 다양한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고, 그 혜택은 특히 /mlp/의 anon들이 접근 불가능하다 느끼는 성적이고 사회적인 관심이지요. 여성은 따라서 특권을 지니는 것으로 표상되요. 최소한 사회적/성적 상호작용 속에서는요. anon들은 종종 남성성을 향한 사회적 기대 때문에 생기는 긴장을 눈치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 이러한 긴장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라봐요. 예를 들어, 한 anon은 그가 자신의 내향성과 사회적으로 기대받는 외향성 사이에서 경험한 고생을 기술해요. "난 가까운 사람들에게 정말로 친절하고 친근해.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거리를 두고 내향적이 되지. 나는 내가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바랬었어. 사람들은 조용한 여자를 좋아하잖아. 하지만 난 남자고, 이 빌어먹을 사회는 남자가 위대한 리더이거나, 변혁을 이끌어내거나, 무언가 제공하기를 바라지. 남성 역할 엿이나 먹으라 그래. 페미니즘 덕분에 이 모든 노력들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잖아. I’m really friendly and nice towards close people, but very distant and introverted to strangers. I wish I was a girl.. . people like quiet girls. But I’m a man, and this shit society expects me to be a great mover and leader and provider.. . fuck the male role. don’t even get any rewards for all that struggle anymore thanks to feminism." 페미니즘은 남성성으로부터 그 혜택은 벗겨내고, 그 제약은 그대로 유지하는 걸로 그려져요. Anon들은 페미니즘을 현대 남성성이 이중 제약이 된 원인으로 바라보지요. 그들의 관점에서 남성은 헤게모닉한 이상의 성취와 실패 모두에서 동시에 처벌받아요. 이런 인식은 anon의 성적인 곤경으로 확장되요. 한 anon이 마이리틀포니의 무대인 이퀘스트리아를 배경으로 쓴 소설에서는 가상의 여성인 Femanon(anon의 여성형)이 스파이크(포니 캐릭터)를 남성적 섹슈얼리티를 드러낸다는 이유로 괴롭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Femanon: 만약 여자애가 널 좋아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녀가 내리는 모든 결정을 지지해주어야 해 Spike: 그런데 Femanon, Rarity는 가끔씩 끔찍한 결정을 내려요... 저는 친구이자 잠재적인 배우자로서 제가 걱정을 해주어야 한다고 느껴요. Femanon: 이 구역질 나는 남자 돼지 새끼가! 우정을 가장해서 그녀의 바지 사이로 들어가고자 하는 건 강간보다도 더 나빠! 니가 실제로 그녀를 강간하지 않는 한, 강간은 강간보다 더 나빠... 넌 실X이고, 그게 니 문제야! 섹스하려면 여자한테 거짓말치고 속여야 하는 실x 루저 새끼 (Femanon이 발을 쿵쿵거리고 Spike는 울음을 참는다) Spike: Anon, 내가 뭘해야 해요? Anon: 넌 내 세계 여성에게 조언을 구하는 실수를 범했어, 그게 전부야. Spike: 모두 다 저래요? Anon: 페미니즘 이후? 대다수가! Femanon: If you want a girl to like you, first you have to support every choice she makes. Spike: But Femanon, Rarity sometimes makes terrible choices... I feel as a friend and potential partner I should voice concern. Femanon: You disgusting male pig! Using friendship as a guise to get into her pants is worse than rape! Unless you actually rape her than rape is worse than rape.. . You have a small dick, that’s your problem! You’re a small dicked, bitter virgin loser who needs to lie and deceive women to get his way! (Femanon stomps away as Spike tries not to cry) Spike: A-Anon, what did I do? Anon: You made the mistake of asking a girl from my world for advice, that’s what. Spike: Are they all like that? Anon: After feminism? Pretty much. 위 이야기는 /mlp/내 anon들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세세히 그려내요. 여성에 대한 사소한 거역을 강간과 손쉽게 비교하는 것, 여자는 잘못된 일을 범하지 않는다는 믿음, 남자는 성적인 약탈자이자 성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이중 구속 등이요. 이 anon은 이야기의 끝에서 페미니즘 정치를 파멸적인 여성이자 것이자, 새된 목소리로 떠들어대면서 남자를 혼자두지 않는 비판가로 묘사해요. 다른 anon은 이 이야기에 "이 짜증나는 이야기를 여기까지 끌고 오지 말자. 현실에서 이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니까. 페미니즘 없는 포니 랜드로 탈출할 수는 없나? Let’s not bring such unpleasantness here shall we. It’s bad enough talking to these ideologues in real life. Can’t we escape to the land of equine fornication without them" 라는 댓글을 달았고요. 이 댓글은 페미니즘을 "현실 공간"에 팽배한 비판으로 그려내고, 낙인찍힌 성이 사회적 비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해요. 따라서, 비체로서의 /mlp/ 남성성이 집합적으로 표상되는 형태는 페미니즘 거부와 연결되요. 많은 anon들은 그들 스스로를, 더 일반적으로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고 - 특히 섹슈얼리티에서 - 바라봐요. Anon들은 남성이 사회적 특권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단지 잘못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남성을 다시금 희생시킨다고 생각해요. 이 마지막 인식은 페미니즘 입장의 비판을 옹졸하고, 인색하고, 독설에 가득찼다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강화되요. 페미니스트들은 /mlp/ 유저들의 남성성을 비체로 만드는 수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걸로 인식되고요. 따라서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젠더화 된 수치(shame)는 온라인 익명 공간을 통해 반페미니즘 정치를 지지하는 공동의 불이익 인식을 생산해요. 성적 낙인감은 /mlp/ anon들의 불이익 감각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해요. 이 불이익 감각은 남성의 삶을 조형하는 광범위한 물질적 조건에 의해 지지받아요. 연구자들은 '위험에 처한 남성 engendered man'이라는 서사가, 가부장적 권위와 혜택을 의문으로 몰아넣은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응답이라 주장해요 (Stein, 2005). 경제가 더 안정적으로 변하면서 자식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경험한 성취로부터 봉쇄되었어요. 많은 남성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성적인, 사회적인, 경제적인 기대를 달성하기가 불가능해요 (Kimmel, 2013). /mlp/ 게시판에서 공유되는 경험은 성적인 낙인감과 사회적 소외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물질적인 불이익 감각을 반영해요. 예를 들어, /mlp/ 유저 개인의 직업이나 교육 수준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anon들은 자신들에게 성취감을 주는 직업이나 교육적 기회가 적었다고 말해요. Anon들이 서로를 미래를 물은 한 쓰레드는 이를 잘 보여줘요. "학위를 받았지만 완전 쓸모없어(음악)... 돌아가서 무언가를 해서, 직업을 구하는 걸 돕기 위한 금융 지원을 받을 수 없어. 그러니... 난 25살인데도 부모님 집에 있지. 그렇지만 자살도 안 하고 있지. 난 얼마나 상황이 더 나빠질지 보는 데 매료되었지 I got a degree but it’s completely worthless (music).. . I can’t get any financial support to go back and do something that would actually get me a job, so I’m... still in my parents’ house at 25. I won’t kill myself, though. I’m fascinated to see how it gets worse" 이 anon은 그의 경제적 실패를 실존적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자살을 암시해요. 다른 anon들도 "미래가 없어. 바닥 밑에 지하실 있지. 모아둔 돈으로 더 이상 공과금과 카드값을 낼 수 없으면, 옥상 가서 뛰어내리려고 ‘I have no future. Shit hit the fan. When I can’t pay my bills anymore with what I have saved up, I’m just going to jump off the roof of my building."라고 말해요. 집합적으로, /mlp/의 이 anon들은 세계를 기회가 부재한 공간으로 그려내요. 미래는 극도로 허약하고 불확실하지요. 경제적 특권이 아니라 전반적인 불이익이 /mlp/ 유저들이 서로 공유하는 지배적인 경험이에요. 이 경험이 남성의 하락하는 지위라는 집합적 감각을 구성하고요. 이 불이익 감각은 /mlp/ 내 공통적인 성적 수치감이 만들어 낸 분노를 강화하고, 안티페미니즘 정치를 위한 담론적 지지를 제공해요. 따라서, /mlp/는 그간 연구가 입증해 온, 위기에 처한 남성이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동시에 경제적 공포를 성적이고 사회적인 공포와 혼합해요. 결론 결론은 언제나 생략! 저자들은 자신들이 확인한 성적 실패와 반동적 정치의 연계가 /mlp/ 게시판에만 국한되는 양상은 아니리라고 예측해요. 섹슈얼리티가 반페미니즘 캠페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촉구하고요. 개인적 의견 비체(abject) 등을 활용한 이론적 깊이와는 별개로, 논문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인터넷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담론들을 반영해요. 그런 면에서 꽤나 기시감이 많이 드는 내용이었어요. 인터넷 성별갈등 둘러보다보면 나오는 내용인데? 싶은 생각이 많이 들지요. 반동적(reacitionary)라는 용어나, 안티페미니즘 정치로 논의를 이어가는 흐름에서 눈치 채셨듯이, 저자들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기저에 깔고 /mlp/ 게시판 이용자들의 문화를 관찰했다 느껴요.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혹자는 게시판 이용자들의 의견에 반감을 가지실 거예요. 혹자는 게시판 이용자들의 의견을 해석하는 논문 저자들의 입장에 반감을 지니실 거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이 /mlp/ 게시판 이용자들의 의견을 쉽사리 해석하지 않은 채 거리감을 두면서 세세히 밝혀나가는 모습은 따라가볼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논문 내용에 논쟁적인 지점이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좀 더 세세하게 정리했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논문들도 더 많이 밝혔고요. 저작권 걱정 때문에 2장을 통째로 제거했는데, 이 내용도 꽤나 흥미로우니 원문을 살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제가 공감했던 지점은 1) 남성 정체성을 감싸는 사회적 조건이 과거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성의 이상(주체; subject)은 쉽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점 2) 젠더는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신체적 능력이 복잡하게 교차하기에 언제나 다층적이며, 남성은 다른 남성들과 그리고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각기 다른 이익과 불이익을 경험한다는 점 정도네요. 아쉬웠던 점은, 이 논문은 /mlp/ 특유의 맥락을 좀 더 깊이 잡아내기 보다는, 다른 남초 온라인 게시판을 살펴보더라도 나올 수 있는 주제를 뽑아냈다는 점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마이 리틀 포니 캐릭터들에 성적이고 낭만적인 애착을 느끼는 심리적 기제가, 그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섹슈얼리티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 등이 더 궁금했거든요. 논문에서 이를 일부 다루고 있지만 약간 부족한 느낌이여요. 방법론을 둘러싼 고민거리도 몇 가지 있지만 그건 여기서 다룰 내용은 아닌 듯합니다. // 섹슈얼리티 관련 논문을 뽑으면서 세웠던 목표는 섹슈얼리티 내 다양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던 거였어요. 여성 피해자 / 남성 가해자로 손쉽게 환원되는 도식이나, 성매매와 관련된 주제들은 좀 피하고자 했고요. 초기 계획으로는 수간을 마지막으로 끊고, 거기에 성교육 관련 논문을 추가할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성매매/성착취 관련된 섹슈얼리티 논문도 추가하는 것이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할 듯해요. 또 지금까지 게시판에 언급한 논의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상대적으로 덜 드러냈던 듯하여 이 점도 강화하고자 하고요. 일단 수간을 다룬 논문을 마무리하고 다른 논문들로 돌아오겠습니당. 수간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포르노그라피적인 시선과는 많이 다를 거예요. 저자들이 인용한 논문 중 이 글에서도 명시한 논문은 Dalley-Trim L (2007) The boys present... hegemonic masculinity: A performance of multiple acts. Gender and Education 19(2): 199–217. Halperin D (2009) What Do Gay Men Want? An Essay on Sex, Risk, and Subjectivity.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Kavanaugh P and Maratea RJ (2016) Identity, resistance, and moderation in an online community of zoosexuals. Sexualities 19(1/2): 3–24. Kimmel M (2013) Angry White Men: American Masculinity at the End of an Era. New York: Nation Books. Kristeva J (1982) Powers ofHorror: An Essay on Abjection, (trans. LS Roudiez).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Stein A (2005) Make room for daddy: Anxious masculinity and emergent homophobias in neopatriarchal politics. Gender & Society 19(5): 601–620. 입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9-01 01:5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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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성애라는 맥락이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어서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 1 같은 느낌이 강해졌죠 ㅠ_ㅠ 개인적으로는 그 점이 좀 아쉬워요. (주변화 된 섹슈얼리티 구성원들의 집합적인 규율 형성과정을 분석하는 2장을 제가 빼먹은 탓도 있지만요)
반대로 영어권의 /mlp/ 사이트와, 한국 어드메의 온라인 남초 사이트의 담론이 닮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생각해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공급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 물론 일부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재창조해내겠지만 - 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거든요. 본문에서 ... 더 보기
반대로 영어권의 /mlp/ 사이트와, 한국 어드메의 온라인 남초 사이트의 담론이 닮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생각해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공급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 물론 일부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재창조해내겠지만 - 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거든요. 본문에서 ... 더 보기
포니성애라는 맥락이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어서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 1 같은 느낌이 강해졌죠 ㅠ_ㅠ 개인적으로는 그 점이 좀 아쉬워요. (주변화 된 섹슈얼리티 구성원들의 집합적인 규율 형성과정을 분석하는 2장을 제가 빼먹은 탓도 있지만요)
반대로 영어권의 /mlp/ 사이트와, 한국 어드메의 온라인 남초 사이트의 담론이 닮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생각해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공급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 물론 일부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재창조해내겠지만 - 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거든요. 본문에서 짚었던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남성성의 이상을 성취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남성성 실패)가 대표적인 배경이겠지요. 그러니 남성학의 실천적 과제는 남성성의 재구성과 성공적인 모델링에 있지 않겠는가 싶어요. 페미니즘이 여성학에서 시작해 인식론적/존재론적 다양성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가며 축적한 담론적 자원을 끌어쓸 수도 있을 거고요.
페미니즘 이론의 전통에 따라 포지셔널리티를 강조하자면, 제 정체성을 구성하는 몇몇 조건(30대 남성)은 본문에서 드러난 anon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어유. 결과적으로 내린 결론이나 모델링은 다르다 할지라도, 본문에서 드러나는 anon들의 삶/감정 편린들은 제 체화된 경험이나 주변 남자사람들의 체화된 경험과 맞닿는 지점이 있거든요. 아무리 제가 저의 체화된 경험에 거리감을 두고 메타인지를 동원해 살아간다 하더라도, 저 또한 제가 선택하지 않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내재화 한 감정/무의식/상징적 질서를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ㅎㅎ 이제는 그걸 딱히 부정적으로 느끼지도 않고요. 반대로 그런 관점에서 여성 동무들의 목소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요.
그러니 본문의 남성 동무들을 거부는 하시되, 너무 미워하시는 말아주세요 (찡긋)
반대로 영어권의 /mlp/ 사이트와, 한국 어드메의 온라인 남초 사이트의 담론이 닮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생각해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공급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 물론 일부는 안티페미니즘 담론이 재창조해내겠지만 - 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거든요. 본문에서 짚었던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남성성의 이상을 성취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남성성 실패)가 대표적인 배경이겠지요. 그러니 남성학의 실천적 과제는 남성성의 재구성과 성공적인 모델링에 있지 않겠는가 싶어요. 페미니즘이 여성학에서 시작해 인식론적/존재론적 다양성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가며 축적한 담론적 자원을 끌어쓸 수도 있을 거고요.
페미니즘 이론의 전통에 따라 포지셔널리티를 강조하자면, 제 정체성을 구성하는 몇몇 조건(30대 남성)은 본문에서 드러난 anon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어유. 결과적으로 내린 결론이나 모델링은 다르다 할지라도, 본문에서 드러나는 anon들의 삶/감정 편린들은 제 체화된 경험이나 주변 남자사람들의 체화된 경험과 맞닿는 지점이 있거든요. 아무리 제가 저의 체화된 경험에 거리감을 두고 메타인지를 동원해 살아간다 하더라도, 저 또한 제가 선택하지 않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내재화 한 감정/무의식/상징적 질서를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ㅎㅎ 이제는 그걸 딱히 부정적으로 느끼지도 않고요. 반대로 그런 관점에서 여성 동무들의 목소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요.
그러니 본문의 남성 동무들을 거부는 하시되, 너무 미워하시는 말아주세요 (찡긋)
흥미로운 관찰이군요. 저자의 눈에 비치는 모 사이트의 '비체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페미니즘.' 윗댓글 말마따나 특정 성향을 띠는 사이트의 매우 뻔한 모습이죠.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고.
중요한 건 저기서 A가 보는 대상으로서의 B였던 사람들이 (더 중요한 건 '비체들'과 '페미니스트' 양쪽 모두 논문 속에서 각 개인에겐 관찰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단지 저자가 본 대상이냐, 저자가 본 대상이 본 대상이냐의 차이일 뿐) 벌어진 현상 속 이미지와,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공통점 혹은 괴리를 받아들이고 고쳐... 더 보기
중요한 건 저기서 A가 보는 대상으로서의 B였던 사람들이 (더 중요한 건 '비체들'과 '페미니스트' 양쪽 모두 논문 속에서 각 개인에겐 관찰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단지 저자가 본 대상이냐, 저자가 본 대상이 본 대상이냐의 차이일 뿐) 벌어진 현상 속 이미지와,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공통점 혹은 괴리를 받아들이고 고쳐... 더 보기
흥미로운 관찰이군요. 저자의 눈에 비치는 모 사이트의 '비체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페미니즘.' 윗댓글 말마따나 특정 성향을 띠는 사이트의 매우 뻔한 모습이죠.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고.
중요한 건 저기서 A가 보는 대상으로서의 B였던 사람들이 (더 중요한 건 '비체들'과 '페미니스트' 양쪽 모두 논문 속에서 각 개인에겐 관찰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단지 저자가 본 대상이냐, 저자가 본 대상이 본 대상이냐의 차이일 뿐) 벌어진 현상 속 이미지와,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공통점 혹은 괴리를 받아들이고 고쳐 나갈 의지가 있느냐인데.
하긴 그럴 의지가 지금 당장 있었으면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쌈박질을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겠지요. "틀렸어. 나는 너희들이 보는 것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아 물론 너희는 내가 본 딱 그대로 개자식이지." 선에서 요약 가능한 시시한 소리에 주어 목적어만 슬쩍슬쩍 바꿔서 떠들지도 않을 거고요. 뭐 시간이 약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남 눈에 지금 B가 어떻게 비치냐 + B는 꼬라지가 실제로 어떠냐 + 왜 그러냐를 생각해볼 때 적당하게 참고할 만한 정성적 분석 틀 정도로 쓸모가 있어 뵙니다. 잘 씁시다. 소개해준 분께는 감사를.
중요한 건 저기서 A가 보는 대상으로서의 B였던 사람들이 (더 중요한 건 '비체들'과 '페미니스트' 양쪽 모두 논문 속에서 각 개인에겐 관찰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단지 저자가 본 대상이냐, 저자가 본 대상이 본 대상이냐의 차이일 뿐) 벌어진 현상 속 이미지와,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공통점 혹은 괴리를 받아들이고 고쳐 나갈 의지가 있느냐인데.
하긴 그럴 의지가 지금 당장 있었으면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쌈박질을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겠지요. "틀렸어. 나는 너희들이 보는 것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아 물론 너희는 내가 본 딱 그대로 개자식이지." 선에서 요약 가능한 시시한 소리에 주어 목적어만 슬쩍슬쩍 바꿔서 떠들지도 않을 거고요. 뭐 시간이 약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남 눈에 지금 B가 어떻게 비치냐 + B는 꼬라지가 실제로 어떠냐 + 왜 그러냐를 생각해볼 때 적당하게 참고할 만한 정성적 분석 틀 정도로 쓸모가 있어 뵙니다. 잘 씁시다. 소개해준 분께는 감사를.
넵 ㅎㅎ 하지만 저자는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비체, 구성적 외부, 안티페미니즘 정치 등 이론적 렌즈를 활용했고 이를 명시했지요(저자 -> anon). 그 점에서 사회 속 담론장에서 체화한 전의식적/무의식적 렌즈를 활용하는(혹은 이 렌즈를 길러가고 있는) anon들과 다르고요 (anon -> 페미니즘).
똑같은 관찰이지만 어떠한 렌즈를 가지고 바라보는가, 혹은 자신이 사용하는 렌즈의 한계를 의식하는가에 따라 무엇을 바라보는지도 달라지고, 자신의 눈에 드러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하는가도 달라져요. 이런 맥락화와 상대화의 기술이 바보왕님이 다른 댓글에서부터 종종 주장하시고, 지금 댓글에서도... 더 보기
똑같은 관찰이지만 어떠한 렌즈를 가지고 바라보는가, 혹은 자신이 사용하는 렌즈의 한계를 의식하는가에 따라 무엇을 바라보는지도 달라지고, 자신의 눈에 드러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하는가도 달라져요. 이런 맥락화와 상대화의 기술이 바보왕님이 다른 댓글에서부터 종종 주장하시고, 지금 댓글에서도... 더 보기
넵 ㅎㅎ 하지만 저자는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비체, 구성적 외부, 안티페미니즘 정치 등 이론적 렌즈를 활용했고 이를 명시했지요(저자 -> anon). 그 점에서 사회 속 담론장에서 체화한 전의식적/무의식적 렌즈를 활용하는(혹은 이 렌즈를 길러가고 있는) anon들과 다르고요 (anon -> 페미니즘).
똑같은 관찰이지만 어떠한 렌즈를 가지고 바라보는가, 혹은 자신이 사용하는 렌즈의 한계를 의식하는가에 따라 무엇을 바라보는지도 달라지고, 자신의 눈에 드러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하는가도 달라져요. 이런 맥락화와 상대화의 기술이 바보왕님이 다른 댓글에서부터 종종 주장하시고, 지금 댓글에서도 말씀하시는 [단정하지 않는 태도]와 연결되고요. 인지와 윤리 사이의 연결은 긴밀하고, 윤리는 종종 폭력적 단정과 연결됩니다. 계속해서 관심 가지시는 주제이신 듯하니 WG Perry의 Cognitive and Ethical Growth: The Making of Meaning를 읽어보시면 좋을 듯해요.(http://will.tip.dhappy.org/paper/William%20Perry/Cognitive%20and%20Ethical%20Growth:%20The%20Making%20of%20Meaning/)
위의 문장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저자들의 관점 또한 저자들 자신이 끌고 온 이론적 맥락 속에서만 유효하고 그것이 /mlp/의 모두를 설명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유통되기에 그 관찰이 우리가 일상에서 활용하는 관점을 넘어 학문적 분석틀로 기능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는 있지만유.
별개로 저는 3번째 문단에서 말씀하셨던 [시시한 소리에 주어 목적어만 슬쩍슬쩍 바꿔서] 떠드는 양태를 CMC(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라는 배경이 아직 대면환경만큼 풍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니터 너머의 상대방에 대한 무감각', 다대 다수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의 증폭 등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편이에요.
사람이 특정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드러내는 문화는 변화해요. 시간이 약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에 반쯤 동의하는데, 시간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기는 할 거예요. 인터넷 초창기에 서로가 보이던 의사소통 문화와, 지금 서로가 보이는 의사소통 문화가 다르듯이요 ㅋ_ㅋ
앗 너무 수다스러웠군요. 바보왕님이 지향하는 바에 동의하는 편이기에 혓바닥을 좀 길게 늘여뜨려보았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똑같은 관찰이지만 어떠한 렌즈를 가지고 바라보는가, 혹은 자신이 사용하는 렌즈의 한계를 의식하는가에 따라 무엇을 바라보는지도 달라지고, 자신의 눈에 드러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하는가도 달라져요. 이런 맥락화와 상대화의 기술이 바보왕님이 다른 댓글에서부터 종종 주장하시고, 지금 댓글에서도 말씀하시는 [단정하지 않는 태도]와 연결되고요. 인지와 윤리 사이의 연결은 긴밀하고, 윤리는 종종 폭력적 단정과 연결됩니다. 계속해서 관심 가지시는 주제이신 듯하니 WG Perry의 Cognitive and Ethical Growth: The Making of Meaning를 읽어보시면 좋을 듯해요.(http://will.tip.dhappy.org/paper/William%20Perry/Cognitive%20and%20Ethical%20Growth:%20The%20Making%20of%20Meaning/)
위의 문장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저자들의 관점 또한 저자들 자신이 끌고 온 이론적 맥락 속에서만 유효하고 그것이 /mlp/의 모두를 설명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유통되기에 그 관찰이 우리가 일상에서 활용하는 관점을 넘어 학문적 분석틀로 기능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는 있지만유.
별개로 저는 3번째 문단에서 말씀하셨던 [시시한 소리에 주어 목적어만 슬쩍슬쩍 바꿔서] 떠드는 양태를 CMC(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라는 배경이 아직 대면환경만큼 풍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니터 너머의 상대방에 대한 무감각', 다대 다수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의 증폭 등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편이에요.
사람이 특정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드러내는 문화는 변화해요. 시간이 약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에 반쯤 동의하는데, 시간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기는 할 거예요. 인터넷 초창기에 서로가 보이던 의사소통 문화와, 지금 서로가 보이는 의사소통 문화가 다르듯이요 ㅋ_ㅋ
앗 너무 수다스러웠군요. 바보왕님이 지향하는 바에 동의하는 편이기에 혓바닥을 좀 길게 늘여뜨려보았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저런 게시판을 규범적 판단 없이 분석적 관점에서만 보는 건 정말 고역일 것 같아요.
실제 마이리틀포니가 아니라 원작을 모티브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재창조한 대상에 대한 애정을 보인다는 점에서 '포니 성애'라기보다 그냥 판타지적 성욕(혹은 관계욕)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유명 영화/TV쇼를 패러디한 포르노나 동인지 문화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게시판에서 서로를 fag라고 부르는 건 재미있네요. 예전에 DC에서도 서로 게이들아, 부르곤 했거든요.
가부장제에서 가부장적 지위를 성취할 수 없는 남성들이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와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자조적 자기 규정이 '고자되기'를 선택하는 거군요.
실제 마이리틀포니가 아니라 원작을 모티브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재창조한 대상에 대한 애정을 보인다는 점에서 '포니 성애'라기보다 그냥 판타지적 성욕(혹은 관계욕)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유명 영화/TV쇼를 패러디한 포르노나 동인지 문화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게시판에서 서로를 fag라고 부르는 건 재미있네요. 예전에 DC에서도 서로 게이들아, 부르곤 했거든요.
가부장제에서 가부장적 지위를 성취할 수 없는 남성들이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와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자조적 자기 규정이 '고자되기'를 선택하는 거군요.
저는 대부분의 상황을 규범적 판단 없이 분석적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익숙해지면 이게 편하기도 해요. 분석적 관점이라고 해서 뭐가 더 우월하고 그런 건 아니다만 적어도 스스로가 지니는 감정에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훈련은 가능하거든요. 괴로울 때 가끔씩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게시판은 직접 들어가서 보시는 걸 추천해요 ㅋ_ㅋ 구글에서 [4chan mlp]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위에 바보왕님께 달았듯이 - 제 기억이 맞다면 늘쩡님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 본문 내용 또한 ... 더 보기
게시판은 직접 들어가서 보시는 걸 추천해요 ㅋ_ㅋ 구글에서 [4chan mlp]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위에 바보왕님께 달았듯이 - 제 기억이 맞다면 늘쩡님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 본문 내용 또한 ... 더 보기
저는 대부분의 상황을 규범적 판단 없이 분석적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익숙해지면 이게 편하기도 해요. 분석적 관점이라고 해서 뭐가 더 우월하고 그런 건 아니다만 적어도 스스로가 지니는 감정에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훈련은 가능하거든요. 괴로울 때 가끔씩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게시판은 직접 들어가서 보시는 걸 추천해요 ㅋ_ㅋ 구글에서 [4chan mlp]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위에 바보왕님께 달았듯이 - 제 기억이 맞다면 늘쩡님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 본문 내용 또한 저자가 뽑아낸 한 측면에 불과한 걸요. 저는 판타지적 성욕/관계욕이 왜 하필 포니를 대상으로 했는가?가 궁금했지만 논문은 다른 곳을 겨냥했으니 뭐 ㅠㅠㅠㅠㅠ
fag를 어떻게 번역할지는 고민되더라고요. '게이야;;;'하는 한국 온라인의 용법과 그대로 일치할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4chan 내에 intimate familiarity를 확보한 게 아니라 주저되더라고요. 그러니 [가부장제에서 가부장적 지위를 성취할 수 없는 남성들이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와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자조적 자기 규정이 '고자되기'를 선택하는 거군요.]라는 늘쩡님의 평에 동의도 부정도 할 수 없습니당
논의가 생산적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 온라인에서 서로가 '게이야;;'라고 부르는 맥락과 함의에 주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시포요.
게시판은 직접 들어가서 보시는 걸 추천해요 ㅋ_ㅋ 구글에서 [4chan mlp]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위에 바보왕님께 달았듯이 - 제 기억이 맞다면 늘쩡님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 본문 내용 또한 저자가 뽑아낸 한 측면에 불과한 걸요. 저는 판타지적 성욕/관계욕이 왜 하필 포니를 대상으로 했는가?가 궁금했지만 논문은 다른 곳을 겨냥했으니 뭐 ㅠㅠㅠㅠㅠ
fag를 어떻게 번역할지는 고민되더라고요. '게이야;;;'하는 한국 온라인의 용법과 그대로 일치할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4chan 내에 intimate familiarity를 확보한 게 아니라 주저되더라고요. 그러니 [가부장제에서 가부장적 지위를 성취할 수 없는 남성들이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와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자조적 자기 규정이 '고자되기'를 선택하는 거군요.]라는 늘쩡님의 평에 동의도 부정도 할 수 없습니당
논의가 생산적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 온라인에서 서로가 '게이야;;'라고 부르는 맥락과 함의에 주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시포요.
잘 읽었습니다. 포니가 워낙 충격적인 대상이라 그렇지, 우리나라의 온라인 커뮤니티로 옮기면 <프리큐어>나 <러브라이브>, <아이돌마스터>의 매니아들과 비교해봄직한 것 같습니다.
비슷한 정서의 한국 커뮤니티를 생각해보면 그보다는 이성과의 matching에 있어서의 불균등한 결과물,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인 좌절감이 중요한 주제로 유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디시나 그와 비슷한 커뮤니티에서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모니터에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여캐를 띄워놓고 케익을 자르는 사진이 주기적으... 더 보기
비슷한 정서의 한국 커뮤니티를 생각해보면 그보다는 이성과의 matching에 있어서의 불균등한 결과물,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인 좌절감이 중요한 주제로 유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디시나 그와 비슷한 커뮤니티에서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모니터에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여캐를 띄워놓고 케익을 자르는 사진이 주기적으... 더 보기
잘 읽었습니다. 포니가 워낙 충격적인 대상이라 그렇지, 우리나라의 온라인 커뮤니티로 옮기면 <프리큐어>나 <러브라이브>, <아이돌마스터>의 매니아들과 비교해봄직한 것 같습니다.
비슷한 정서의 한국 커뮤니티를 생각해보면 그보다는 이성과의 matching에 있어서의 불균등한 결과물,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인 좌절감이 중요한 주제로 유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디시나 그와 비슷한 커뮤니티에서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모니터에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여캐를 띄워놓고 케익을 자르는 사진이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것에서 본문에 소개된 것들과 비슷한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지와는 별개로, 역시나 자유연애에 따른 이성과의 자유로운 matching이 일부 남성 계층에 있어서는 광범위한 성적 좌절감을 유발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3대욕구 중 하나가 성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특정한 부류가 집단적으로 성적인 좌절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관심을 요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런 '모쏠아다'들의 좌절감이 반드시 성관계에 관한 것만은 아니고, 인간관계나 우정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적 요소도 중요할 것입니다.) 물론 '모쏠아다(특히 그중에서도 남성)'는 사회에서 역겨운 존재들로 여겨지고 있지만..
홍차넷에서도 제가 기회가 될 때마다 언급하려고 하는 대목인데, 결국에는 현대사회가 다수의 인간을 도시로 끌어모으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속의 인간관계는 무척이나 고립적으로 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인간관계를 갖은 의무로부터 해방시킨 자유주의적인 현대사회의 분위기 역시 역으로 모든 개인에게 매 순간 스스로의 관계망 속에서의 가치, 혹은 매력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억압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타고난 매력이 없어서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try를 해야 하는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좌절감을 느끼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반대로 여성들의 대쉬를 받거나, '썸'을 즐기면서 사는 남성들의 입장은 다르겠죠.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입장도 각기 자신들이 이성과의 matching market에서의 위치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고...)
결국에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위치가 아닌 시선을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데이트폭력이나 성희롱을 여성들의 과장이나 과민반응으로 치부하는 일부 남성들의 자기중심적 시선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것만큼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체에 걸러진 밑바닥의 남성집단에 대해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 역시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서가 없었는데, 평소 관심이 있는 주제였었고 기회가 되면 더 언급해보고 싶습니다.
비슷한 정서의 한국 커뮤니티를 생각해보면 그보다는 이성과의 matching에 있어서의 불균등한 결과물,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인 좌절감이 중요한 주제로 유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디시나 그와 비슷한 커뮤니티에서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모니터에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여캐를 띄워놓고 케익을 자르는 사진이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것에서 본문에 소개된 것들과 비슷한 향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지와는 별개로, 역시나 자유연애에 따른 이성과의 자유로운 matching이 일부 남성 계층에 있어서는 광범위한 성적 좌절감을 유발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3대욕구 중 하나가 성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특정한 부류가 집단적으로 성적인 좌절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관심을 요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런 '모쏠아다'들의 좌절감이 반드시 성관계에 관한 것만은 아니고, 인간관계나 우정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적 요소도 중요할 것입니다.) 물론 '모쏠아다(특히 그중에서도 남성)'는 사회에서 역겨운 존재들로 여겨지고 있지만..
홍차넷에서도 제가 기회가 될 때마다 언급하려고 하는 대목인데, 결국에는 현대사회가 다수의 인간을 도시로 끌어모으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속의 인간관계는 무척이나 고립적으로 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인간관계를 갖은 의무로부터 해방시킨 자유주의적인 현대사회의 분위기 역시 역으로 모든 개인에게 매 순간 스스로의 관계망 속에서의 가치, 혹은 매력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억압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타고난 매력이 없어서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try를 해야 하는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좌절감을 느끼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반대로 여성들의 대쉬를 받거나, '썸'을 즐기면서 사는 남성들의 입장은 다르겠죠.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입장도 각기 자신들이 이성과의 matching market에서의 위치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고...)
결국에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위치가 아닌 시선을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데이트폭력이나 성희롱을 여성들의 과장이나 과민반응으로 치부하는 일부 남성들의 자기중심적 시선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것만큼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체에 걸러진 밑바닥의 남성집단에 대해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 역시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서가 없었는데, 평소 관심이 있는 주제였었고 기회가 되면 더 언급해보고 싶습니다.
게시판 들어가서 보면 포니들이 참 이쁘기는 해요. 글로만 들으면 충격적일수도 있겠지만, 막상 캐릭터들 보면 납득이 갑니다 ㅋ_ㅋ 포니시리즈를 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friendship is magic라는 구호는 제 롤 티어를 두 단계는 올려준 에너지입니당. 탑/정글에서 싸움나도 프렌드쉽 이즈 매직이라고 외치면 분위기가 기적처럼 풀리는 매직!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위에 자공진님께 달았던 내용이 제 포지션이기는 해요. 이그니타우스님과 거의 일치하는 포지션이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른 점은 친밀하고 낭만적이고 성적인 관계에... 더 보기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위에 자공진님께 달았던 내용이 제 포지션이기는 해요. 이그니타우스님과 거의 일치하는 포지션이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른 점은 친밀하고 낭만적이고 성적인 관계에... 더 보기
게시판 들어가서 보면 포니들이 참 이쁘기는 해요. 글로만 들으면 충격적일수도 있겠지만, 막상 캐릭터들 보면 납득이 갑니다 ㅋ_ㅋ 포니시리즈를 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friendship is magic라는 구호는 제 롤 티어를 두 단계는 올려준 에너지입니당. 탑/정글에서 싸움나도 프렌드쉽 이즈 매직이라고 외치면 분위기가 기적처럼 풀리는 매직!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위에 자공진님께 달았던 내용이 제 포지션이기는 해요. 이그니타우스님과 거의 일치하는 포지션이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른 점은 친밀하고 낭만적이고 성적인 관계에서 좌절감을 느끼는 건 남성만이 아니라는 면이에요. 여초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을 살펴보다보면 여성 동무들도 남성들만큼이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하더라고요.
(아래부터는 공부를 많이하지 않은 뇌피셜에 가까운 내용입니당)
다만 성별끼리 서로를 향해 활용하는 인상관리 전략에서 여성들이 상징적으로라도 낮은 위세를 점하는 걸 (실제 본인이 어떤 감정과 상황에 놓여있는가와는 별개로) 피하는 게 다수지 않나 싶어요. 솔로여도 제니의 노래처럼 빛이 나는 solo인 거고, 헤어진 상대는 다 똥차인거고, 찌질한 남자들이 매일 나를 귀찮게 하는 거고요. 상기한 담론들은 극단적인 축에 속하지만,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글들만 잘 살펴보더라도 편린을 엿볼 수 있어요. 그것이 다 꾸며낸 얘기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폐쇄적이더라도 결국은 공개되어 있는 타임라인 속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신감 있게 유통되는 것 자체가 상기한 ideal들이 여성성을 구성하는 담론이자 여성성을 이루는 주체-비체의 관계 속에서 주체에 속한다는 걸 보여주지 않나 싶거든요. 복잡하게 얘기했지만 남자들에게 꿀려보이는 게 정말정말 좀 그런 거예요. 그건 여성성의 구성적 외부에 있는거고요. 그러니 우리 남성 동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성 동무들도 좌절하고 어려움을 느끼지만, '남성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성을 구성하는 주요 담론 중 하나일지라도 모든 여성들이 1차원적으로 이러한 담론에 지배받는다고 말하면 너무 상대방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거라 생각해요. 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남성성/여성성(혹은 양 쪽에서 모두에서 구성적 외부로 자리매김한 젠더 퀴어)의 ideal과 맺는 관계는 엄청나게 다층적이고 복잡해요. 사회 속에서 복잡한 그물망들을 당기고 푸는 과정에서 때로는 찬사를 받기도, 때로는 조롱을 받기도, 혹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며 나름대로 연애게임의 규칙 혹은 이성을 대상으로 하는 인상관리의 방식을 확립해나가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도식이 우리의 행동과 감정을 조형하는 힘은 강력하고요.
이야기가 뱅뱅 돌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저는 본문에서 남성들의 성적/관계적 좌절감을 남성성의 비체를 끌고 들어와 해석한 것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어요. 또한 성공과 남성성을 긴밀하게 결부짓는 담론적 구성에 주목하면 왜 '모쏠아다 남성'들을 사회에서 더 비체로 만드는지, 심지어는 [왜 같은 남성들도 이들을 조롱하는지]를 설명하는 한 흐름이 되지 않나 싶어요. 이전 연작에서 언급했던 호모히스테리아와, 본문의 이론적 설명에서 밝혔듯이 헤게모닉한 남성성에는 비체의 배격이 함께 하니까요.
자유주의적인 현대사회의 분위기가 매 순간 관계망 속에서 가치/매력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건 일견 동의도 가면서 의아한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막연하게 느끼기로는 현대사회는 개인을 기본 단위로 설정하기에 침해불가능한 권리를 바탕으로 서로를 조형하여 익명화 된 관계를 촉진하고, 한 순간 관계를 끊어버리면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도시적 조건이기 때문에 관계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도가 생각나는데... 억압적이라는 면은 어떤 뉘앙스인지 잘 와닿지가 않아유
저도 두서없이 쭉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생각을 가다듬다 보니 댓글 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ㅋㅋㅋㅋ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위에 자공진님께 달았던 내용이 제 포지션이기는 해요. 이그니타우스님과 거의 일치하는 포지션이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른 점은 친밀하고 낭만적이고 성적인 관계에서 좌절감을 느끼는 건 남성만이 아니라는 면이에요. 여초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을 살펴보다보면 여성 동무들도 남성들만큼이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하더라고요.
(아래부터는 공부를 많이하지 않은 뇌피셜에 가까운 내용입니당)
다만 성별끼리 서로를 향해 활용하는 인상관리 전략에서 여성들이 상징적으로라도 낮은 위세를 점하는 걸 (실제 본인이 어떤 감정과 상황에 놓여있는가와는 별개로) 피하는 게 다수지 않나 싶어요. 솔로여도 제니의 노래처럼 빛이 나는 solo인 거고, 헤어진 상대는 다 똥차인거고, 찌질한 남자들이 매일 나를 귀찮게 하는 거고요. 상기한 담론들은 극단적인 축에 속하지만,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글들만 잘 살펴보더라도 편린을 엿볼 수 있어요. 그것이 다 꾸며낸 얘기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폐쇄적이더라도 결국은 공개되어 있는 타임라인 속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신감 있게 유통되는 것 자체가 상기한 ideal들이 여성성을 구성하는 담론이자 여성성을 이루는 주체-비체의 관계 속에서 주체에 속한다는 걸 보여주지 않나 싶거든요. 복잡하게 얘기했지만 남자들에게 꿀려보이는 게 정말정말 좀 그런 거예요. 그건 여성성의 구성적 외부에 있는거고요. 그러니 우리 남성 동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성 동무들도 좌절하고 어려움을 느끼지만, '남성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성을 구성하는 주요 담론 중 하나일지라도 모든 여성들이 1차원적으로 이러한 담론에 지배받는다고 말하면 너무 상대방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거라 생각해요. 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남성성/여성성(혹은 양 쪽에서 모두에서 구성적 외부로 자리매김한 젠더 퀴어)의 ideal과 맺는 관계는 엄청나게 다층적이고 복잡해요. 사회 속에서 복잡한 그물망들을 당기고 푸는 과정에서 때로는 찬사를 받기도, 때로는 조롱을 받기도, 혹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며 나름대로 연애게임의 규칙 혹은 이성을 대상으로 하는 인상관리의 방식을 확립해나가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 도식이 우리의 행동과 감정을 조형하는 힘은 강력하고요.
이야기가 뱅뱅 돌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저는 본문에서 남성들의 성적/관계적 좌절감을 남성성의 비체를 끌고 들어와 해석한 것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어요. 또한 성공과 남성성을 긴밀하게 결부짓는 담론적 구성에 주목하면 왜 '모쏠아다 남성'들을 사회에서 더 비체로 만드는지, 심지어는 [왜 같은 남성들도 이들을 조롱하는지]를 설명하는 한 흐름이 되지 않나 싶어요. 이전 연작에서 언급했던 호모히스테리아와, 본문의 이론적 설명에서 밝혔듯이 헤게모닉한 남성성에는 비체의 배격이 함께 하니까요.
자유주의적인 현대사회의 분위기가 매 순간 관계망 속에서 가치/매력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건 일견 동의도 가면서 의아한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막연하게 느끼기로는 현대사회는 개인을 기본 단위로 설정하기에 침해불가능한 권리를 바탕으로 서로를 조형하여 익명화 된 관계를 촉진하고, 한 순간 관계를 끊어버리면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도시적 조건이기 때문에 관계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정도가 생각나는데... 억압적이라는 면은 어떤 뉘앙스인지 잘 와닿지가 않아유
저도 두서없이 쭉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생각을 가다듬다 보니 댓글 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ㅋㅋㅋㅋ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질문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리자면, 결국에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적인 인간관계(친구, 연인 등)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성립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싫으면 안 만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식의 낙관주의는 사실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상적으로야 나와 마음이 맞는 1명의 진실된 친구를 사귀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인기를 끄는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합니다. ... 더 보기
질문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리자면, 결국에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적인 인간관계(친구, 연인 등)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성립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싫으면 안 만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식의 낙관주의는 사실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상적으로야 나와 마음이 맞는 1명의 진실된 친구를 사귀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인기를 끄는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합니다. ... 더 보기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질문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리자면, 결국에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적인 인간관계(친구, 연인 등)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성립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싫으면 안 만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식의 낙관주의는 사실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상적으로야 나와 마음이 맞는 1명의 진실된 친구를 사귀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인기를 끄는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합니다. 실제로 이런 인기의 비대칭적 속성에 대해 임상심리학적으로 분석한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는 책이 작년에 소개되기도 했고, 일본의 교육학자가 저술한 <스쿨 카스트>라는 책은 학교에서의 인기와 서열의 관계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두 책은 모두 인기의 쏠림현상과 그에 따른 인기 없는 사람들이 소외되는 현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마음에 안 드는 상대와는 off-duty에 어울리지 않을 자유가 생긴 현대사회에서는 누군가가 모두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개별적인 상대에게 호감을 얻어 '승인'을 획득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승인을 얻지 못하면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죠. 물론 인간관계에 능숙한 사람들이야 자연스럽게 관계형성의 단계에서 상대의 호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매력이 없는 사람들은 노력해도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이성관계와 같이 기준이 엄격한 관계는 더더욱.. 이런 부분이 매력자본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심리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능동적 의지를 갖고 억압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pressure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을지.. 그런 의미에서 제가 처음에 말한 억압은 압박, 압력, 스트레스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신 anon들의 탄식은 이런 부분과도 접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두가 동시에 그 사람에게 "NO"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관계속에서 느끼는 내밀한 감정이 참 중요한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연하게 언급이 안되고 그냥 블랙박스로 퉁쳐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연구 소개해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질문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리자면, 결국에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적인 인간관계(친구, 연인 등)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성립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싫으면 안 만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식의 낙관주의는 사실 현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상적으로야 나와 마음이 맞는 1명의 진실된 친구를 사귀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인기를 끄는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합니다. 실제로 이런 인기의 비대칭적 속성에 대해 임상심리학적으로 분석한 <모두가 인기를 원한다>는 책이 작년에 소개되기도 했고, 일본의 교육학자가 저술한 <스쿨 카스트>라는 책은 학교에서의 인기와 서열의 관계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두 책은 모두 인기의 쏠림현상과 그에 따른 인기 없는 사람들이 소외되는 현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마음에 안 드는 상대와는 off-duty에 어울리지 않을 자유가 생긴 현대사회에서는 누군가가 모두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개별적인 상대에게 호감을 얻어 '승인'을 획득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승인을 얻지 못하면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죠. 물론 인간관계에 능숙한 사람들이야 자연스럽게 관계형성의 단계에서 상대의 호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매력이 없는 사람들은 노력해도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이성관계와 같이 기준이 엄격한 관계는 더더욱.. 이런 부분이 매력자본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심리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능동적 의지를 갖고 억압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pressure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을지.. 그런 의미에서 제가 처음에 말한 억압은 압박, 압력, 스트레스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신 anon들의 탄식은 이런 부분과도 접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두가 동시에 그 사람에게 "NO"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관계속에서 느끼는 내밀한 감정이 참 중요한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연하게 언급이 안되고 그냥 블랙박스로 퉁쳐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연구 소개해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압박, 압력, 스트레스라 표현해주시니 확 와닿네요. 스쿨 카스트라는 일본의 현상 관련해서는 오스까 에이지의 글 (https://redtea.kr/?b=3&n=10231)을 통해 접했었어요.
예전에 읽었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에서는 인정의 3요소 중 하나로 사랑을 두었었어요. 말씀하시는 친밀과 돌봄의 관계를 일컫는데, 권리의 문제를 따지고 든 호네트의 책에서는 '사랑은 권리화 할 수 없다'고 적더라고요. 여러 복잡한 내용들은 기... 더 보기
압박, 압력, 스트레스라 표현해주시니 확 와닿네요. 스쿨 카스트라는 일본의 현상 관련해서는 오스까 에이지의 글 (https://redtea.kr/?b=3&n=10231)을 통해 접했었어요.
예전에 읽었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에서는 인정의 3요소 중 하나로 사랑을 두었었어요. 말씀하시는 친밀과 돌봄의 관계를 일컫는데, 권리의 문제를 따지고 든 호네트의 책에서는 '사랑은 권리화 할 수 없다'고 적더라고요. 여러 복잡한 내용들은 기... 더 보기
답변 감사합니다.
압박, 압력, 스트레스라 표현해주시니 확 와닿네요. 스쿨 카스트라는 일본의 현상 관련해서는 오스까 에이지의 글 (https://redtea.kr/?b=3&n=10231)을 통해 접했었어요.
예전에 읽었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에서는 인정의 3요소 중 하나로 사랑을 두었었어요. 말씀하시는 친밀과 돌봄의 관계를 일컫는데, 권리의 문제를 따지고 든 호네트의 책에서는 '사랑은 권리화 할 수 없다'고 적더라고요. 여러 복잡한 내용들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직도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남아있어요.
'안 보면 그만인 자유'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작은 (혹은 '닫힌 사회') 사회 내에서도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한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배제될 수는 있어요. 모두가 동시로부터 버림을 받는 건 꼭 현대사회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는 아니라 생각해요. 오히려 현대사회임에도 불구하고 항존하는 가능성으로 보는 건 어떨까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그 부분의 욕망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 실제로 많은 영화에서 로봇과의 사랑을 주제로 다루듯이요 - 그리 된다면 또 이 '사랑' 사이에도 위계가 생겨버릴 것 같단 말이죠 ㅎㅎ 이거야 상상력의 차원이니 주제를 옮겨봐야겠네요.
애정관계를 포함하는 인간관계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면, 저는 스스로 돌아볼 때 저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다양하고, 또 많다 느끼는데, 반대로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잃어버리거나 떠나버리거나 혹은 제가 떠나온 사람의 수가 몇 배는 더 많아요. 그러면서 느낀 건데,
인간관계가 나 자신의 태도는 존재할 수 있지만, 정답이 존재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ㅎㅎ 특정한 시공간(학창시절, 군대시절)을 바탕으로 친교의 싹이 텃다 하더라도 이를 안정적인 관계로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시간, 공유하는 감정, 기억 등이 필요하며, 지속적으로 상상의 차원이든 실제의 차원이든 교류를 이어갈 필요가 있지요. 이 시간과 흐름 속에서 오해가 쌓일 수도 있고, 이해가 깊어질 수도 있고, 상대가 나는 모르는 사정 때문에 나를 피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마음이 불안정해서 타인을 피할 수도 있는 거고요. 관계에 참여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비슷한 수준으로 맞기란 쉽지 않아요. 그 수많은 변화 속에서 안정적인 인간관계가 불안정하게 되기도 하고, 불안정한 인간관계가 안정이 되기도 하지요. 그 과정 속에서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는 있지만 노력한다고 다 잘 되지는 않더라고요.
하지만 단기적인 관계(말씀하셨던 '인기')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깊은 관계에서는 말씀하셨던 '매력' (외모든, 화술이든, 높은 지위든)이 끼치는 영향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자신해요. 내가 상대의 요구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그냥 둘 필요가 있더라도), 내 요구를 얼마나 충족할 수 있는가라는 장기적인 호혜성이 더 크지 않나 싶어요.
결론적으로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마음이기는 해요 ㅋ_ㅋ 다만 낙관주의라기보다는 타인을 위한 짚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이 복잡한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관계의 가닥을 잡아나갈 수 있는 실마리라 믿는 것에 가깝네요. 내가 매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지기이해나 자기현시는 안타깝게도 인간관계에서 치명적이에요. 그 이해나 현시마저도 진공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리라는 점에서 조악한 해결책이기는 하네요 쩝
예전에 사랑을 학교에서 교육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https://redtea.kr/?b=3&n=9912)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고민했던 지점과 연결되는데, 아직 크게 생각이 진전되지는 못했어요 ㅋㅋㅋㅋ
압박, 압력, 스트레스라 표현해주시니 확 와닿네요. 스쿨 카스트라는 일본의 현상 관련해서는 오스까 에이지의 글 (https://redtea.kr/?b=3&n=10231)을 통해 접했었어요.
예전에 읽었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에서는 인정의 3요소 중 하나로 사랑을 두었었어요. 말씀하시는 친밀과 돌봄의 관계를 일컫는데, 권리의 문제를 따지고 든 호네트의 책에서는 '사랑은 권리화 할 수 없다'고 적더라고요. 여러 복잡한 내용들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직도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남아있어요.
'안 보면 그만인 자유'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작은 (혹은 '닫힌 사회') 사회 내에서도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한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배제될 수는 있어요. 모두가 동시로부터 버림을 받는 건 꼭 현대사회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는 아니라 생각해요. 오히려 현대사회임에도 불구하고 항존하는 가능성으로 보는 건 어떨까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그 부분의 욕망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 실제로 많은 영화에서 로봇과의 사랑을 주제로 다루듯이요 - 그리 된다면 또 이 '사랑' 사이에도 위계가 생겨버릴 것 같단 말이죠 ㅎㅎ 이거야 상상력의 차원이니 주제를 옮겨봐야겠네요.
애정관계를 포함하는 인간관계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면, 저는 스스로 돌아볼 때 저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다양하고, 또 많다 느끼는데, 반대로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잃어버리거나 떠나버리거나 혹은 제가 떠나온 사람의 수가 몇 배는 더 많아요. 그러면서 느낀 건데,
인간관계가 나 자신의 태도는 존재할 수 있지만, 정답이 존재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ㅎㅎ 특정한 시공간(학창시절, 군대시절)을 바탕으로 친교의 싹이 텃다 하더라도 이를 안정적인 관계로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시간, 공유하는 감정, 기억 등이 필요하며, 지속적으로 상상의 차원이든 실제의 차원이든 교류를 이어갈 필요가 있지요. 이 시간과 흐름 속에서 오해가 쌓일 수도 있고, 이해가 깊어질 수도 있고, 상대가 나는 모르는 사정 때문에 나를 피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마음이 불안정해서 타인을 피할 수도 있는 거고요. 관계에 참여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비슷한 수준으로 맞기란 쉽지 않아요. 그 수많은 변화 속에서 안정적인 인간관계가 불안정하게 되기도 하고, 불안정한 인간관계가 안정이 되기도 하지요. 그 과정 속에서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는 있지만 노력한다고 다 잘 되지는 않더라고요.
하지만 단기적인 관계(말씀하셨던 '인기')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깊은 관계에서는 말씀하셨던 '매력' (외모든, 화술이든, 높은 지위든)이 끼치는 영향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자신해요. 내가 상대의 요구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그냥 둘 필요가 있더라도), 내 요구를 얼마나 충족할 수 있는가라는 장기적인 호혜성이 더 크지 않나 싶어요.
결론적으로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마음이기는 해요 ㅋ_ㅋ 다만 낙관주의라기보다는 타인을 위한 짚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이 복잡한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관계의 가닥을 잡아나갈 수 있는 실마리라 믿는 것에 가깝네요. 내가 매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지기이해나 자기현시는 안타깝게도 인간관계에서 치명적이에요. 그 이해나 현시마저도 진공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리라는 점에서 조악한 해결책이기는 하네요 쩝
예전에 사랑을 학교에서 교육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https://redtea.kr/?b=3&n=9912)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고민했던 지점과 연결되는데, 아직 크게 생각이 진전되지는 못했어요 ㅋㅋㅋㅋ
흠..사실 저는 "좌절하고 어려움을 느끼지만, '이성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것'"은
전통적으로는 오히려 여성이 아닌 남성이 더 많이 보이는 경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런것 같은데, 좌절과 어려움을 '본인을 노출시키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속에서,
그 중에서도 이성이 별로 없다 생각할 남초커뮤에서 주로 그런 좌절과 어려움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요?
저는 남성이 여성보다 상황에 맞아 구별되는 롤플레잉에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인터넷 공간속의 자신의 롤을 현실의 자신과 분리해서
자신의 약점을 더 드러낼 수도 있고, 더 공격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전통적으로는 오히려 여성이 아닌 남성이 더 많이 보이는 경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런것 같은데, 좌절과 어려움을 '본인을 노출시키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속에서,
그 중에서도 이성이 별로 없다 생각할 남초커뮤에서 주로 그런 좌절과 어려움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요?
저는 남성이 여성보다 상황에 맞아 구별되는 롤플레잉에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인터넷 공간속의 자신의 롤을 현실의 자신과 분리해서
자신의 약점을 더 드러낼 수도 있고, 더 공격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전반적인 어려움이나 좌절, 힘듦을 억압하는 쪽이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는 사악군님 의견에 동의해요. 애초에 이 또한 남성성의 이상을 구성하는 오래된 요소이기도 하고, 남성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누적시켰던 지점이기도 하니까요. 그 점에 있어서는 120% 공감하고,
제가 짚고자 했던 지점은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표현에 응축된 정서였어요.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을 때 나름대로 찾았던 설명이 저거였어요. 그것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혹은 성별이 혼합된 집단에서의 자기현시 전략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요.
하... 더 보기
제가 짚고자 했던 지점은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표현에 응축된 정서였어요.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을 때 나름대로 찾았던 설명이 저거였어요. 그것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혹은 성별이 혼합된 집단에서의 자기현시 전략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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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반적인 어려움이나 좌절, 힘듦을 억압하는 쪽이 남성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는 사악군님 의견에 동의해요. 애초에 이 또한 남성성의 이상을 구성하는 오래된 요소이기도 하고, 남성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누적시켰던 지점이기도 하니까요. 그 점에 있어서는 120% 공감하고,
제가 짚고자 했던 지점은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표현에 응축된 정서였어요.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을 때 나름대로 찾았던 설명이 저거였어요. 그것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혹은 성별이 혼합된 집단에서의 자기현시 전략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요.
하지만 의사소통 스타일에서의 남녀 차이 + 동성집단이냐 혼성집단이냐 +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등은 아직 논문을 자주 보지 못한 부분이라 괄호 열고 뇌피셜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흑흑... 전공 따라가기도 허덕거리고 있어요. 저 또한 여초 온라인 사이트보다는 남초 온라인 사이트의 담론을 더 많이 접하기에 생긴 bias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성비 구성에 따른 담론 스타일의 변화가 갑자기 궁금하네요.
마지막에 언급해주신 부분은 생각할 부분이 큰 듯해요. 온라인 내 자기현시 방식에서 젠더 차이가 존재하는지는 나중에 찾아봐야겠네요. 그 차이에 따라 온라인 에스노그라피에서 방법론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더 생겨날 수도 있을테니까요.
제가 짚고자 했던 지점은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표현에 응축된 정서였어요.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을 때 나름대로 찾았던 설명이 저거였어요. 그것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혹은 성별이 혼합된 집단에서의 자기현시 전략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요.
하지만 의사소통 스타일에서의 남녀 차이 + 동성집단이냐 혼성집단이냐 +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등은 아직 논문을 자주 보지 못한 부분이라 괄호 열고 뇌피셜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흑흑... 전공 따라가기도 허덕거리고 있어요. 저 또한 여초 온라인 사이트보다는 남초 온라인 사이트의 담론을 더 많이 접하기에 생긴 bias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성비 구성에 따른 담론 스타일의 변화가 갑자기 궁금하네요.
마지막에 언급해주신 부분은 생각할 부분이 큰 듯해요. 온라인 내 자기현시 방식에서 젠더 차이가 존재하는지는 나중에 찾아봐야겠네요. 그 차이에 따라 온라인 에스노그라피에서 방법론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더 생겨날 수도 있을테니까요.
아앗 제 댓글도 그냥 뇌피셜일 뿐인걸요.. 반박하려는게 아니라 이야기해보려는 것뿐이었습니다. 항상 신선한 읽을거리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
호라태님 글 올라오면 언제나 즐거워요! 항상 집에 숨겨둔 아이스크림을 혼자 먹는 느낌이거든요! 디씨 갤에서 낄낄대며 보던 포니성애자들을 이렇게 보니 더 재밌네요!
남성 섹슈얼리티의 좌절/이성애 경험의 좌절이 온라인 공간에서 안티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은 서구 미디어의 Incel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요.
홍차넷에서도 소개된 유튜브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참 잘 설명이 된 영상이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fD2briZ6fB0
저도 제 자신을 구성하는 몇가지 조건으로 인해서 본문의 남성과 같은 경우를 체화된 경험으로서 접해보기도 했고 분석적 ... 더 보기
홍차넷에서도 소개된 유튜브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참 잘 설명이 된 영상이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fD2briZ6fB0
Incels | ContraPoints
저도 제 자신을 구성하는 몇가지 조건으로 인해서 본문의 남성과 같은 경우를 체화된 경험으로서 접해보기도 했고 분석적 ... 더 보기
남성 섹슈얼리티의 좌절/이성애 경험의 좌절이 온라인 공간에서 안티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은 서구 미디어의 Incel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요.
홍차넷에서도 소개된 유튜브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참 잘 설명이 된 영상이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fD2briZ6fB0
저도 제 자신을 구성하는 몇가지 조건으로 인해서 본문의 남성과 같은 경우를 체화된 경험으로서 접해보기도 했고 분석적 틀과 함께 거리두어 읽어보기도 했습니다만,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잉...
비체 감각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본문 남성동무와 같은 경우를 마이너리티 정체성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기도해요. 이그나티우스님의 댓글에서도 설명되는 얘기처럼, 성적 매력/남성성등은 어찌보면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할당된 '자본'처럼 볼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이러한 매력 자본을 가지지 못한 본문 남성동무와 같은 경우들은 구조적 부조리함을 느끼며 인터넷 공간에서 정체성 정치 비스무리하게 움직이고 있구요. 그러나 한편으로 본문 남성동무들이 자신들의 성적 경험의 좌절을 마치 ascribed status의 하나처럼 이해할 수 있느냐는 또다른 문제 같기도 해요.
궁금한건 소위 학계에서 본문 남성동무들과 같은 경우를 하나의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보냐 아니면 반동/차별적인 앵똘래랑스로서 그저 사회악 취급이냐 하는 건데요, 링크한 유튜브 영상을 포함한 서구의 담론들은 대게가 전자와 후자가 섞인 형태로 나타나는 듯 싶은데 우리나라에 수입된 인셀 담론은 후자쪽의 의견을 많이 본 것 같네요.
홍차넷에서도 소개된 유튜브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참 잘 설명이 된 영상이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fD2briZ6fB0
Incels | ContraPoints
저도 제 자신을 구성하는 몇가지 조건으로 인해서 본문의 남성과 같은 경우를 체화된 경험으로서 접해보기도 했고 분석적 틀과 함께 거리두어 읽어보기도 했습니다만,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잉...
비체 감각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본문 남성동무와 같은 경우를 마이너리티 정체성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기도해요. 이그나티우스님의 댓글에서도 설명되는 얘기처럼, 성적 매력/남성성등은 어찌보면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할당된 '자본'처럼 볼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이러한 매력 자본을 가지지 못한 본문 남성동무와 같은 경우들은 구조적 부조리함을 느끼며 인터넷 공간에서 정체성 정치 비스무리하게 움직이고 있구요. 그러나 한편으로 본문 남성동무들이 자신들의 성적 경험의 좌절을 마치 ascribed status의 하나처럼 이해할 수 있느냐는 또다른 문제 같기도 해요.
궁금한건 소위 학계에서 본문 남성동무들과 같은 경우를 하나의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보냐 아니면 반동/차별적인 앵똘래랑스로서 그저 사회악 취급이냐 하는 건데요, 링크한 유튜브 영상을 포함한 서구의 담론들은 대게가 전자와 후자가 섞인 형태로 나타나는 듯 싶은데 우리나라에 수입된 인셀 담론은 후자쪽의 의견을 많이 본 것 같네요.
남성 섹슈얼리티의 좌절/이성애 경험의 좌절이 온라인 공간에서 안티 페미니즘 정치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좌절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가를 더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 같아요. 이게 여성들이 지각하는 친밀감/애정 욕구의 좌절과는 성격이 다르지 않을까 싶거든요. 제가 여성이 아니니 여성들의 감각이나 문화적 논리를 피부로 느끼기는 힘드네요ㅠ
본문에서는 섹슈얼리티 내 비체 감각을 들어 남성성 실패가 심화되는 이야기를 했지만, 댓글에서 다들 '이거 온라인 남초 사이트 이야기인데?'라고 얘기했듯이 남성성 위기는 /mlp/를 넘어 글로벌한 의제가 아닐까 싶어요. 본문에서는 그 배경으로 경제구조 안정화와 저성장... 더 보기
본문에서는 섹슈얼리티 내 비체 감각을 들어 남성성 실패가 심화되는 이야기를 했지만, 댓글에서 다들 '이거 온라인 남초 사이트 이야기인데?'라고 얘기했듯이 남성성 위기는 /mlp/를 넘어 글로벌한 의제가 아닐까 싶어요. 본문에서는 그 배경으로 경제구조 안정화와 저성장... 더 보기
남성 섹슈얼리티의 좌절/이성애 경험의 좌절이 온라인 공간에서 안티 페미니즘 정치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좌절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가를 더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 같아요. 이게 여성들이 지각하는 친밀감/애정 욕구의 좌절과는 성격이 다르지 않을까 싶거든요. 제가 여성이 아니니 여성들의 감각이나 문화적 논리를 피부로 느끼기는 힘드네요ㅠ
본문에서는 섹슈얼리티 내 비체 감각을 들어 남성성 실패가 심화되는 이야기를 했지만, 댓글에서 다들 '이거 온라인 남초 사이트 이야기인데?'라고 얘기했듯이 남성성 위기는 /mlp/를 넘어 글로벌한 의제가 아닐까 싶어요. 본문에서는 그 배경으로 경제구조 안정화와 저성장에 따른 계층이동 가능성의 하락을 짚는 듯하고요.
남성들은 사회적/경제적 성취와 애정/성적인 관계에서의 성취를 여성들보다 훨씬 긴밀히 결부지어 이해하지 않나 싶어요. 이것들이 하나로 묶여서 '남성성'을 구성하는 것이고요. 여성동무들은 왜 남성동무들이 그렇게 성취에 목숨을 거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는 경우도 있던데, 그 바닥에는 자신이 남성성에서 실패하면 애정관계에서 버림 받으리라는 두려움도 깔려있을 거예요. 그 감정에는 사회역사적인 배경 근거가 깔려있을테니 (그리고 저는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분명 생물학적 배경도 있을테니) 일부는 여성 상대방의 서사에도 들어맞겠다만, 일부는 그저 남성 측에서 애정관계에서의 실패를 '매끄럽게'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담론적 자원에 불과하기도 하겠지요.
예를 들어 제가 이전 연애에서 헤어진 후 도달했던 해답은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권태였어요. 하지만 도달하기 전 해석의 자원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이나, 주변 남자 어른들에게 물어봤을 때 공통적으로 '니가 돈이 없어서'라는 해석을 하더라고요. 남성들의 경우에는 경제적 자원의 문제를 1순위로 꼽고, 여성의 경우에는 그 외 다른 이유들도 제시했지만 경제적 자원의 문제 또한 중요하게 제시했었지요. 사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니 누구의 결론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5-60대 층에서 남녀관계의 파국을 해석하는 주요 서사로 경제문제를 들었다는 점은 생각해 볼만한 지점일 거예요.
혼인시장의 경제학적 거래 분석, 진화심리학적 설명 등이 그 본래 학문적 범위와 맥락을 벗어나 무분별하고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저변에는 이러한 남성들의 문화적 논리나 메타포가 있겠쥬 ㅠ_ㅠ (반대로 래디컬 페미니즘이 마찬가지로 무분별하고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저변에도 여성들의 문화적 논리와 메타포가 있을 거고요). 뭐 실제로 이러한 설명들이 전혀 설명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당장 보건사회연구소 2019년 조사 결과 (https://www.kihasa.re.kr/web/publication/research/view.do?menuId=44&tid=71&bid=12&division=001&ano=2528) 에서도 청년 신혼 부부 간 남 > 녀 경제력 격차는 상당히 존재했더라고요. 동시에 통계청 사회조사 내 2018년 가사분담 관련 자료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SSFA122R&vw_cd=MT_ZTITLE&list_id=101_D211&seqNo=&lang_mode=ko&language=kor&obj_var_id=&itm_id=&conn_path=MT_ZTITLE)는 여전히 가사노동 내에서 여성의 분담률이 높다는 것도 보여줘요.
사회는 분명 변화하지만, 운동가들이 내비치는 이상의 밝기 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지는 않나 싶어요. 물론 제가 위에서 언급했던 혼인/이성 관계의 배열(arrangement; 구조라고 그러면 너무 고정된 느낌이라 전 배열이라는 표현을 선호해요. 프랑스어로는 아장스망이라고도 하고) 또한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한 순간일 뿐이니 결국은 변화하게 되겠지요.
소위 학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지난 학기에 공부했던 자료 중 Social Justice Education 이야기나, Critical Race Theory, Critical Feminism 같이 비판, 사회정의 등을 전면에 내건 학술 자료들은 본문 남성동무들을 마이너리티/소수자로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느꼈어요. 사회에 존재하는 권력구조를 비판하고 타파하고자 하는 시도는, 권력구조는 그대로 둔 채 사회집단만 갈아끼우자는 시도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회의적인 시선을 견지한채 진보를 추구하자고 얘기하고 있었고요.
당시에 읽었던 자료 중에서 인상 깊었던 건
Ladson-Billings, Gloria (2003). Racialized Discourses and Ethnic Epistemologies. In Norman K. Denzin and Yvonna S. Lincoln (Eds). The Landscape of Qualitative Research: Theories and Issues.(2nd Ed) (398-432). Thousand Oaks: Sage.
Griffiths, Morwenna (1998). Educational Research for Social Justice: Getting off the Fence. Buckingham: Open University Press
였어요.
본문에서는 섹슈얼리티 내 비체 감각을 들어 남성성 실패가 심화되는 이야기를 했지만, 댓글에서 다들 '이거 온라인 남초 사이트 이야기인데?'라고 얘기했듯이 남성성 위기는 /mlp/를 넘어 글로벌한 의제가 아닐까 싶어요. 본문에서는 그 배경으로 경제구조 안정화와 저성장에 따른 계층이동 가능성의 하락을 짚는 듯하고요.
남성들은 사회적/경제적 성취와 애정/성적인 관계에서의 성취를 여성들보다 훨씬 긴밀히 결부지어 이해하지 않나 싶어요. 이것들이 하나로 묶여서 '남성성'을 구성하는 것이고요. 여성동무들은 왜 남성동무들이 그렇게 성취에 목숨을 거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는 경우도 있던데, 그 바닥에는 자신이 남성성에서 실패하면 애정관계에서 버림 받으리라는 두려움도 깔려있을 거예요. 그 감정에는 사회역사적인 배경 근거가 깔려있을테니 (그리고 저는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분명 생물학적 배경도 있을테니) 일부는 여성 상대방의 서사에도 들어맞겠다만, 일부는 그저 남성 측에서 애정관계에서의 실패를 '매끄럽게' 설명하기 위해 동원하는 담론적 자원에 불과하기도 하겠지요.
예를 들어 제가 이전 연애에서 헤어진 후 도달했던 해답은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권태였어요. 하지만 도달하기 전 해석의 자원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이나, 주변 남자 어른들에게 물어봤을 때 공통적으로 '니가 돈이 없어서'라는 해석을 하더라고요. 남성들의 경우에는 경제적 자원의 문제를 1순위로 꼽고, 여성의 경우에는 그 외 다른 이유들도 제시했지만 경제적 자원의 문제 또한 중요하게 제시했었지요. 사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니 누구의 결론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5-60대 층에서 남녀관계의 파국을 해석하는 주요 서사로 경제문제를 들었다는 점은 생각해 볼만한 지점일 거예요.
혼인시장의 경제학적 거래 분석, 진화심리학적 설명 등이 그 본래 학문적 범위와 맥락을 벗어나 무분별하고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저변에는 이러한 남성들의 문화적 논리나 메타포가 있겠쥬 ㅠ_ㅠ (반대로 래디컬 페미니즘이 마찬가지로 무분별하고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저변에도 여성들의 문화적 논리와 메타포가 있을 거고요). 뭐 실제로 이러한 설명들이 전혀 설명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당장 보건사회연구소 2019년 조사 결과 (https://www.kihasa.re.kr/web/publication/research/view.do?menuId=44&tid=71&bid=12&division=001&ano=2528) 에서도 청년 신혼 부부 간 남 > 녀 경제력 격차는 상당히 존재했더라고요. 동시에 통계청 사회조사 내 2018년 가사분담 관련 자료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SSFA122R&vw_cd=MT_ZTITLE&list_id=101_D211&seqNo=&lang_mode=ko&language=kor&obj_var_id=&itm_id=&conn_path=MT_ZTITLE)는 여전히 가사노동 내에서 여성의 분담률이 높다는 것도 보여줘요.
사회는 분명 변화하지만, 운동가들이 내비치는 이상의 밝기 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지는 않나 싶어요. 물론 제가 위에서 언급했던 혼인/이성 관계의 배열(arrangement; 구조라고 그러면 너무 고정된 느낌이라 전 배열이라는 표현을 선호해요. 프랑스어로는 아장스망이라고도 하고) 또한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한 순간일 뿐이니 결국은 변화하게 되겠지요.
소위 학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지난 학기에 공부했던 자료 중 Social Justice Education 이야기나, Critical Race Theory, Critical Feminism 같이 비판, 사회정의 등을 전면에 내건 학술 자료들은 본문 남성동무들을 마이너리티/소수자로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느꼈어요. 사회에 존재하는 권력구조를 비판하고 타파하고자 하는 시도는, 권력구조는 그대로 둔 채 사회집단만 갈아끼우자는 시도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회의적인 시선을 견지한채 진보를 추구하자고 얘기하고 있었고요.
당시에 읽었던 자료 중에서 인상 깊었던 건
Ladson-Billings, Gloria (2003). Racialized Discourses and Ethnic Epistemologies. In Norman K. Denzin and Yvonna S. Lincoln (Eds). The Landscape of Qualitative Research: Theories and Issues.(2nd Ed) (398-432). Thousand Oaks: Sage.
Griffiths, Morwenna (1998). Educational Research for Social Justice: Getting off the Fence. Buckingham: Open University Press
였어요.
귀여운 포니들에 대한 성적인 접근에 대한 해석을 기대했는데... 다들 이런 기대를 하다 실망하셨을 것 같아요. ㅎㅎ 이와 별개로 포니 덕후들과 프리큐어/아이돌마스터 같은 소위 반짝반짝 미소녀물 좋아하는 덕후들의 사회적 위치가 비교될 만한 것인가 하는 것도 재미있는 주제인 것 같아요. 포니는 빼박 동물 캐릭터라 여기에 성욕을 느낀다고 하면 수간/ 변태로 낙인찍히기 좋지만 반짝반짝한 여성향 변신 소녀물을 좋아하는 것도 어딘가 떳떳하지 못한 취급을 받는 것 같더라구요. 매니악한 애니 덕후까지 가지 않더라도 초등학교 시절 은근히 많은 남학생들이 천사소녀 네티나 마법소녀들을 흠모했지만 열심히 모른 척 했던 것도 그렇구요. 현실의 섹시하고 성숙한 이미지의 여성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것과 샤랄라한 마법소녀를 욕망하는 것의 차이란 무엇인가..
루빈이라는 학자가 제안한 ‘‘charmed circle’’ of sexual morality 라는 관점이 있어요(https://medium.com/@andrewcard/cruising-the-charmed-circle-down-the-hierarchy-feb72cc2e48e). 섹슈얼리티는 도덕을 기반으로 한 좋은 섹스와, 나쁜 섹스로 구분되고는 해요. 마법소녀들을 ... 더 보기
루빈이라는 학자가 제안한 ‘‘charmed circle’’ of sexual morality 라는 관점이 있어요(https://medium.com/@andrewcard/cruising-the-charmed-circle-down-the-hierarchy-feb72cc2e48e). 섹슈얼리티는 도덕을 기반으로 한 좋은 섹스와, 나쁜 섹스로 구분되고는 해요. 마법소녀들을 좋아하는 남성은 실제 vs 애니메이션 + 성인 vs 아동 + 같은 세대 vs 다른 세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람직한 섹슈얼리티의 외부에 있지요.
외부들 간의 지위 경쟁이 어떻게 될런지는 모르겠네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지, 사회 다수가 각자의 위치를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는 실증조사가 더 필요할 영역일 듯해요. 포니가 인간 - 동물 간의 경계를 넘는 걸로 보인다면, 마법소녀는 (성인이 마법소녀를 좋아하는 경우) 성인 - 미성인 간의 경계를 넘는 걸로 보이거든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후자가 더 저항감이 크지 않을까 싶네요.
외부들 간의 지위 경쟁이 어떻게 될런지는 모르겠네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지, 사회 다수가 각자의 위치를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는 실증조사가 더 필요할 영역일 듯해요. 포니가 인간 - 동물 간의 경계를 넘는 걸로 보인다면, 마법소녀는 (성인이 마법소녀를 좋아하는 경우) 성인 - 미성인 간의 경계를 넘는 걸로 보이거든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후자가 더 저항감이 크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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