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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1/23 13:29:52수정됨
Name   작고 둥근 좋은 날
Subject   은밀한 통역
대학에 입학했던 해에, 그러니까 2002년에, 미군기지의 사고로 사람이 죽었다. 보다 정확히는, 대학에 입학하기 한 해 전에 어느 미군기지에서 작업을 하던 사람이 감전 사고를 당했고, 대학에 입학하고 난 해에 그는 죽었다. 물론 사람은 매년 죽으며 어디에서나 죽는다. 그런 죽음 중에 이 죽음이 특별히 기억나는 이유는,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본 집회가 이와 관련된 '주한미군 규탄 교내 집회'였기 때문이다. 입학식 날이었나 그 다음 날이었나, 흐릿하고 멍청한, 고등학생적인 얼굴로 교내 집회를 구경하고 있다가 어느 모르는 누나에게 번호를 따인 기억이 난다. 이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으로 이어질 뻔 했다 : 애국의 한길만큼이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의 길이 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쉽게도 혹은 다행히도 그 커다란 사랑은 이어지지 않았다. 우국충정의 거대한 연정을 품고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나도 소시민이라.

사람이 죽는 건 역시 슬픈 일이다. 사람의 죽음이 고작 보상금 60만원에 퉁쳐지는 것도 슬픈 일이다. 노동자가 작업 도중에 사망한다는 것, 혹은 자국민이 외국 군대의 작업을 외주로 수행하다가 사망했다는 건 슬픈 일이며 동시에 화가 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슬픔 혹은 분노와 별 상관 없이 2002년은 흘러갔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태어났다. 생명 탄생의 기준을 정자와 난자의 수정으로 둔다면, 2002년의 여름이란 그야말로 탄생의 계절, 우주의 가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웃기고 즐겁고 멍청하고 유쾌하고 부끄럽고 우울한 일들이 쉴새없이 스쳐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대학 시절이 흘러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훈련소였다. 잠깐 정신이 들고 나서 바로 다시 정신이 사라졌다. 훈련소란 그런 곳이고 시설대란 그런 곳이다. 전봇대를 세우고 신축 건물의 오폐수 처리시설을 매립하고 배관을 정비하고 산을 깎는 일이란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통은.

병장쯤 되어 다시 정신이 들었다. 그런 어느 일요일 점심쯤이었다. 당직실에서 방송이 나온다. XXX병장, XXX병장, 지금 바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당직실로 오십시오. 당직실에 가니 급한 일이 발생했다고 대대 본부로 내려오란다. 내려가보니 일요일 오후답지 않게 본부에는 꽤 많은 간부들이 출근해 있었다. 오늘 단체로 시간외수당 땡기는 날인가, 그럴 거면 행정계 막내를 부르지 왜 나를 부르나, 생각하는 동안 김소위가 말했다. '야, 너 통역좀 해라.' 주말을 빼앗긴 보통의 병장이 그러하듯 나는 살짝 짜증섞인 농담을 했다. '그런건 통역병 시키십쇼.' 윤중위가 굉장히 굳은 얼굴로 답했다. 야. 일 터졌으니까 아가리 닥치고 대기해. 그리고 문 잠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의자에 앉아 쭈그러져 있었다. 밥 먹었냐? 안먹었으면 햄버거나 먹어, 하고 윤중위가 햄버거를 건낸다. 굿, 끼니는 제때 먹어야지. 햄버거를 우물우물 씹으며 간부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요약하면 이런 거였다. 기지 내 미군 지역에서 시설공사를 하던 중에, 누군가의 실수로 (혹은 신의 섭리로) 작업 현장의 전기가 제대로 차단되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죽었다. 하여 미군 시설대와 접촉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여, 영어가 필요하다. 상위 부대에 통역병을 요청할 수는 없다. 은밀한 통역이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근데 대대에 영어 하는 애가 있네, Profit.

나는 햄버거를 다 먹고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었고 나는 그걸 수습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로군. 이거 참. 대학에 입학하던 해의 주한미군 규탄 집회가 떠올랐다. 뭐 대충 그런 상황인가보군. 하.

하지만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간부들이 정신없이 한국어 전화를 몇 통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나오고, 전화를 하고, 전화를 돌리고, 그걸 몇 번 반복하고 나서 내게 말했다. '내무실 가서 쉬어. 고생했다. 오늘 일 다른데 말하지 말고.' 내가 고생한 건 없, 지는 않다. 병장의 일요일 오후란 숨쉬는 것만으로도 고생이니. 나의 고생과 상관 없이 일은 어떻게 적당히 잘 해결 된 모양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죽음이 적당히 잘 해결된다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신문에 난 것도 아니고 집회가 있던 것도 아니니 어떻게 적당히 잘 해결되었을 것이다. 적당한 보상금이라거나, 적당한 책임 소재의 은폐라거나, 나를 그야말로 스쳐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이름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아무튼 적당히 잘 해결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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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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