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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7/14 20:57:18수정됨 |
Name | DX루카포드 |
Subject | 백선엽을 위한 변명 |
** 사실 이 글은 예~전에 썼던 겁니다. 그런데 뜯어고치기가 귀찮아져서 방치해놨다가 그냥 올립니다. 무슨 공이 있고 무슨 과가 있는지 간도특설대에 지원한건지 백선엽이 독립군을 때려잡았는지 한번 따져보자 해서 찾아봤습니다. // 백선엽은 그의 간도특설대 경력으로 '독립군 때려잡던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간도특설대는 자원병으로 '독립군 때려잡는 일을 자원한 적극적 친일파'라는 비난이 많죠. 제가 역사에 해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백선엽이라는 이름도 pgr에서 눈시님 전쟁사 읽으면서 처음봤어요. 625에서 공이 컸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죠. 하지만 아랫글에서 논쟁하면서 위키 잠깐 찾아본 것으로도 과연 백선엽의 공과가 과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나 싶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공은 크고 과는 그리 크지 않다고 봅니다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가 크다는 분이 많더군요. 그래서 어떤 과가 있기에 그렇게 과가 크다는 것인가, 간도특설대의 행적을 보았습니다. 당장 백선엽은 자원병도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살펴보니 그렇다면 백선엽에게 간도특설대의 악행- 특히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는 부분에 많은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은 부분은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짧은 수준에서 사실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틀린 부분이나 더 아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가르침을 주십시요. 저는 '백선엽의 공은 크고 과는 작다'는 답을 정해놓고 있는게 아닙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면 공과가 비슷하다, 과가 크고 공은 작다 라고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겠죠. 백선엽이 뭘했냐 미군이 다한거지라는 이야기를 많이 보았습니다. 사실 저도 625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던 인상은 그정도였죠.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니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과는 크고 공은 적다'라고 말하려면 어떤 공이 있는지는 알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625때 장군이었다는 것만 알고서도 그 공이 어느정도의 공인지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백선엽의 공에 대해서는 제가 백선엽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글을 링크하지요. 이 글만이 아니라 6.25.전쟁사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고, 조금더 검색하시면 우리나라 역사 전쟁사를 정말 흥미있게 볼 수 있는 연재글들입니다. 요즘은 연재가 뜸하셔서 아쉬울 따름이지요. https://pgr21.com/?b=8&n=38971 눈시님의 전쟁사는 정말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이 글들을 놓치면 인생의 손해입니다. 백선엽의 공은 이쪽에서 많이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간도특설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겠습니다. 주된 내용은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의 간도특설대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틀린 내용이나 더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실 분들은 댓글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1. 자원여부 우선 '간도특설대에 자원했다'라는 부분부터 보겠습니다. 간도특설대는 조선 독립군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 대표적 조직인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1938. 설립되었습니다. 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진 만주국군 소속으로, 예니체리와 같은 피정복민족을 이용한 부대의 일환이었죠. 각 일본에 전향한 러시아인, 몽골인으로 이루어진 부대와 같이 편제된 조선인 부대였습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 패망까지 7기에 걸쳐 병사를 징모하였는데, 전원이 지원병인 것은 1, 2기 뿐으로, 3기부터는 만주국 전체에서 징병제가 실시됨에 따라 병사는 대다수가 징집병으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2기 자원병은 1940. 1. 모집하였고,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1943. 2. 부임합니다. 사실 자원병은 '병사'로 자원한 자들이고, 백선엽과 같은 만주군 장교들은 애초에 '간도특설대'에 별도로 지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임이 되는 것이죠. 이를 '만주군의 군관학교 입대'는 자원한 것이므로 '간도특설대에 자원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만주군관학교에 입대한 것 자체가 적극적 친일이라고 이야기해야지, 간도특설대에 자원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2. 간도특설대의 악행과 이력 간도특설대의 악행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간도특설대는 일반적인 일제 징용부대가 아니라 소위 독립군 때려잡던 친일파 자원병 부대이고, 그 행위가 실로 악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악랄한 행위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지요. * 1939년 5월 특설부대는 일본수비대를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림 속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체포를 하고 보니 산나물을 뜯는 부근 마을의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염천 대대장과 산천 중대장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버렸다.[4] 1939년 7월 1일 특설부대는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고, 도문 일본군 수비대와 협동 작전을 하여 천보산을 토벌했다. 교전 중 항일연군 전사 한 명이 희생되었는데 특설부대는 특설부대의 충혼비에 제를 지내기 위해 항일연군 전사자의 배를 가르고 간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메고 가던 민부가 허기를 달래려고 통조림인 줄로 알고 훔쳐서 먹다가 생고기인지라 버렸다고 한다.[4] 1941년 겨울 특설부대의 3개 중대는 원부시 대대장의 지휘 아래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에 대한 토벌을 진행, 제2중대와 기포중대의 3명 대원이 변복한 항일군 2명을 체포하였다. 하나는 제1중대의 취사반에서 잡일을 하게 하고, 하나는 기포련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는데, 취사반에 있던 사람이 도망을 한 것을 도목구에서 다시 붙잡아다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 시키고, 총부의 부관 옥량 중위가 군도로 머리를 베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4] 1941년 1월 특설부대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산림에서 항일연군 여전사 4명을 체포, 압송 도중 강간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였다.[5] 1942년 8월 특설부대 제1중대는 변의대를 조직하여 차조구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중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 두 사람이 양민증이 없다는 구실로 형벌을 감행한 후 체포하였다.[5] •1944년 음력 7월 27일, 특설부대는 현지경찰과 합동으로 미윈 현 황거좡에 가 ‘식량 징수’(실제로는 식량강탈)를 하며 21명의 백성을 체포했다. 그중 한 농회 주임은 한달 동안 구금된 뒤 살해됐다. •1944년 9월, 특설부대가 스샤 진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몽골 기병과 연합해 팔로군을 토벌 했으며, 쌍방 교전중 특설부대가 참패 했다. 특설부대는 돌아오는 길에 스샤 진 서쪽 20리 되는 부락에서 농가 20호에 불을 지르는 보복을 했다. 또 두명의 백성을 붙잡아 일본인 소노모토 유이치가 군도로 찔러 죽였다. •1944년 11월 5일 화이러우현 다슈이위(현재 베이징시 소속)에 주둔하던 만주군이 현성에 가 식량 운반을 하던 도중 팔로군의 습격을 받아 트럭 한 대가 소각되고 만주군이 몇 명 죽자, 만주군과 특설대 합동으로 일대를 토벌. 특설대는 현장 부근 마을에서 백성 두 명을 쏴죽이고 세명을 다치게 해 불구로 만들었다. 같은 날, 이들은 또 두명의 팔로군 제대 군인도 붙잡아 총으로 쏴 죽였다. -- 위 기록들은 '친일인명사전의 기록'이 위키백과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들입니다. 병사까지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기에 충분할만큼 악랄하고 끔찍한 만행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고, 관내방면 석갑진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36차례의 토벌을 수행하여 103명을 살해하였으며, 62명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1942.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악명에 걸맞는 '독립군 때려잡는' 끔찍한 행위들인데 반해, 1944.이후의 행적에서는 독립군이나 항일연군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팔로군'이 등장하지요. 그 이유는, 간도특설대는 [1943. 12. 열하성(러허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간도특설대의 악랄한 진압끝에 1941.을 전후하여 간도지역의 독립군 조직은 거의 궤멸되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주 토벌대상이었던 동북항일연군 또한 1941. 와해되어 1942 완전히 소멸하였고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남방전선으로 일본군이 대거 이동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만주국의 군대와 경찰병력을 열하성으로 이동하였고, 그 때 간도특설대도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나무위키는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특설대 역시 기존의 독립군 토벌에 특화된 특수공작대 성격에서 소모품인 알보병으로 변화하게 되었는데, 1944년 철석부대 산하로 들어간 것이 그 상징적인 사건이다. 철석부대라는 것은 물론 만주의 국훈인 “철석신념, 철석기율, 철석훈련”에서 따온 명칭으로 1만5,6천의 보병, 기병, 전차 합동의 전투 부대로 만주군 내에서도 ‘만족, 몽골, 조선, 일본인’ 혼성 부대로 전공이 있는 우수부대에서 선발, 충당하여 중국의 정규군인 팔로군과의 전투에만 전념하였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1943. 2. 부임]하였습니다. 간도특설대에 부임하기 전에는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죠. 백선엽은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하였습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간도지역 항일 무장운동 소원해진 때여서 '조선 독립군'과 교전해보진 못했고 대신 러허성으로 이동하여 공산당 팔로군과 전투에 종사하였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죠. 이에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간도특설대로서 조선인을 토벌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반성이 없고 말이 앞뒤가 안맞는다고 하는데, 회고록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앞에서 살폈지만 만주의 항일독립연군은 1941.경 이미 와해되어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간도특설대에는 1943. 2.에, 만주군관학교는 1941. 12. 30.졸업한 백선엽이 임관후 독립군 토벌 경험이 많지는 않을테죠. 그러나 그런데도 독립군 토벌에 대한 서술이 나옵니다. 시기적으로 안맞는데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런 서술이 나온 배경은, 백선엽은 군관학교 시절 실습명목으로 조선인 독립군 토벌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백선엽이 나온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비적토벌'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을했다고 합니다. 즉 백선엽이 1941. 12. 30.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2년제 군관학교인 점을 보면 1940. 경 만주군관학교 생활을 시작하였으므로 그 시기에 실습명목의 비적토벌, '독립군 토벌'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목은 '백선엽을 위한 변명'이지만, 자료를 따라가보니 백선엽이 독립군을 토벌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죠. 저는 백선엽을 위해 자료나 사실을 왜곡하여 변명해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행한 행위만큼 비난받기를 바랄뿐입니다. 백선엽은 [만주국육군군관생도로서 독립군을 토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악명높은 간도특설대의 행위들은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부임하기 전이나 임관하기 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939-1941기간의 대토벌작전 시기에 말이죠. 이런 행위들의 책임을 백선엽에게 씌우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한 일은 열하성으로 이동하여 팔로군과 싸운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시기적으로 거의 와해되었다지만 부임한 2월~아예 이동한 12월 사이 기간에 소수의 잔존 독립군 토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수는 있지요. 그렇다한들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는 한창 전투가 치열하던 39~41년 시기에 몰려있었고 백선엽 장군은 그 때 없었으니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를 모두 뒤집어 씌우는 건 부당하며, 백선엽이 남긴 기록들은 객관적인 기록들과 상호모순없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 댓글에서 나눈 이야기를 통해 결말 부분을 조금 추가, 수정하였습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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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본문의 ... 더 보기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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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본문의 이 부분 어디서 가져오신건가요?
괄호친 간도특설대라고 되어있는 부분은 말씀하신 나무위키가 참고하고 있는 자료나, 혹은 다른 한겨레 기사에서는 [우리들이]라고 쓰여있거든요. 그리고 중략표시를 넣은 부분도 나무위키가 출처로하는 자료하고도 다르고요. 어차피 원어로 된 책이 일본어이기도 해서 원문을 참조해야 가장 정확한 걸테니 다른 출처에서 다르게 인용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걍 자서전만 따른다고 했을 때 본문대로면 간도특설대로서 조선인 독립군 게릴라를 잡지 않았다는 중의적 해석도 충분히 가능한 문체인데, 다른 곳에서 인용하는 글로만 보면 간도특설대로서 조선인 독립군 게릴라를 잡았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거든요. 역사적 상황으로 봤을 때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책을 좀 자극적으로 팔기 위해 자서전에서 거짓말을 한 거라고 볼 수 있고요.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53417.html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본문의 이 부분 어디서 가져오신건가요?
괄호친 간도특설대라고 되어있는 부분은 말씀하신 나무위키가 참고하고 있는 자료나, 혹은 다른 한겨레 기사에서는 [우리들이]라고 쓰여있거든요. 그리고 중략표시를 넣은 부분도 나무위키가 출처로하는 자료하고도 다르고요. 어차피 원어로 된 책이 일본어이기도 해서 원문을 참조해야 가장 정확한 걸테니 다른 출처에서 다르게 인용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걍 자서전만 따른다고 했을 때 본문대로면 간도특설대로서 조선인 독립군 게릴라를 잡지 않았다는 중의적 해석도 충분히 가능한 문체인데, 다른 곳에서 인용하는 글로만 보면 간도특설대로서 조선인 독립군 게릴라를 잡았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거든요. 역사적 상황으로 봤을 때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책을 좀 자극적으로 팔기 위해 자서전에서 거짓말을 한 거라고 볼 수 있고요.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53417.html
제가 이 글을 쓸때 긁어온 것은 나무위키와 위키백과 둘뿐입니다. (각 위키의 링크포함) 나무위키에 '우리들이'라고 되어있다면 제가 인용한 것은 위키백과의 기재일 겁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으므로 자신이 부임하기 전 간도특설대의 게릴라 추격을 '우리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거의 와해되었다지만 부임한 2월~아예 이동한 12월 사이 기간에 소수의 잔존 독립군 토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요. 요컨대 백선엽의 진술들은 상호모순없이 양립할 수 있지요.
세간에 알려진 끔찍한 간도특설대의 악행들은 주로 자원병으로 구성된 1, 2기 백선엽 부임 이전에 집중되어 확인되고요.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으므로 자신이 부임하기 전 간도특설대의 게릴라 추격을 '우리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거의 와해되었다지만 부임한 2월~아예 이동한 12월 사이 기간에 소수의 잔존 독립군 토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요. 요컨대 백선엽의 진술들은 상호모순없이 양립할 수 있지요.
세간에 알려진 끔찍한 간도특설대의 악행들은 주로 자원병으로 구성된 1, 2기 백선엽 부임 이전에 집중되어 확인되고요.
위키백과에는 간도특설대라고 되어있긴 하네요.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더 보기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더 보기
위키백과에는 간도특설대라고 되어있긴 하네요.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출처가 되는 위키백과의 바로 다음 문장에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했다고 써있는데... 자료를 좀 너무 선택적으로 읽고 본문에서 제시하신게 아닌가 싶네요. 정황상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힘들었다면, 그냥 자서전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결론내리는 게 가장 깔끔하지 않나요?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출처가 되는 위키백과의 바로 다음 문장에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했다고 써있는데... 자료를 좀 너무 선택적으로 읽고 본문에서 제시하신게 아닌가 싶네요. 정황상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힘들었다면, 그냥 자서전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결론내리는 게 가장 깔끔하지 않나요?
ㅋㅋ... 사실 제가 하고싶었던 말이 '한 2월~아예 이동한 12월 사이 기간에 소수의 잔존 독립군 토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요'였는데 먼저 해주시네요.
전 자서전이 멀쩡히 존재하는 이상 저 부분의 서술이 완전 거짓이거나, 아니면 사악군님처럼 복무하기도전의 간도특설대를 '우리들이'라고 했다고 해석하지 않는 이상(이렇게 해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만 이건 너무 한쪽에만 유리하게 해주는 해석이죠 좀 무리수라고 보고, 사실 이쯤되면 걍 거짓말이죠.) 가장 아다리가 맞는 건 저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럼 본문은 [만주국육군군관생도로서 독립군을 토벌]했을 수도 있고, [간도특설대로서 소수의 독립군토벌을 잠깐동안 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도가 맞는 결론이지 않을까 싶어요.
전 자서전이 멀쩡히 존재하는 이상 저 부분의 서술이 완전 거짓이거나, 아니면 사악군님처럼 복무하기도전의 간도특설대를 '우리들이'라고 했다고 해석하지 않는 이상(이렇게 해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만 이건 너무 한쪽에만 유리하게 해주는 해석이죠 좀 무리수라고 보고, 사실 이쯤되면 걍 거짓말이죠.) 가장 아다리가 맞는 건 저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럼 본문은 [만주국육군군관생도로서 독립군을 토벌]했을 수도 있고, [간도특설대로서 소수의 독립군토벌을 잠깐동안 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도가 맞는 결론이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그게 한쪽에 유리한 해석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언어습관이죠.
전후 태어난 일본인들 중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처럼 일제의 행위를 우리라 이야기하기도 하죠. 소속감을 느끼는 우리를 이야기할 때 '그때 나는 없었지만' 이란 구별표시를 굳이 하지 않는건 평이한 표현입니다. 너 독립군 때려잡았지 ㅡ 나 부임했을 때는 거의 없었다와 간도특설대의 토벌행위를 우리들의 토벌행위라고 표현하는 건 양립가능한 해석이고 그리 한쪽에만 유리하게 해석한건 아니라고 봐요. 백선엽이 대단히 반성을 했다 같은 얘기가 아니라 이사람이 남긴 기록들은 대체로 정보를 왜곡하거나 숨긴 서술이 없고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을 피하지도 않았거든요.
전후 태어난 일본인들 중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처럼 일제의 행위를 우리라 이야기하기도 하죠. 소속감을 느끼는 우리를 이야기할 때 '그때 나는 없었지만' 이란 구별표시를 굳이 하지 않는건 평이한 표현입니다. 너 독립군 때려잡았지 ㅡ 나 부임했을 때는 거의 없었다와 간도특설대의 토벌행위를 우리들의 토벌행위라고 표현하는 건 양립가능한 해석이고 그리 한쪽에만 유리하게 해석한건 아니라고 봐요. 백선엽이 대단히 반성을 했다 같은 얘기가 아니라 이사람이 남긴 기록들은 대체로 정보를 왜곡하거나 숨긴 서술이 없고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을 피하지도 않았거든요.
네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해석해주면 백선엽 장군에게 유리하다는거죠. 그리고 이건 밀리터리 마니아들을 위해 '대게릴라전'이 뭔지를 설명하고 일종의 자랑하는 책이에요. 일본 독자를 대상으로 자기가 있기도 전의 부대 전과를 자기가 한거처럼 말했다는 건 설령 언어습관이라고 해도 거짓말이라 비난받기 충분하지 않나요? 제가 대테러부대 들어갔다와서 대테러부대에 엄청난 소속감느꼈다고 쳐도 ㅋㅋ... 대테러작전사~ 일본의 대테러는 왜 실패했나~ 같은 책에서 에서 제가 부임하기도 전 부대가 한 일을 '우리가' ... 더 보기
네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해석해주면 백선엽 장군에게 유리하다는거죠. 그리고 이건 밀리터리 마니아들을 위해 '대게릴라전'이 뭔지를 설명하고 일종의 자랑하는 책이에요. 일본 독자를 대상으로 자기가 있기도 전의 부대 전과를 자기가 한거처럼 말했다는 건 설령 언어습관이라고 해도 거짓말이라 비난받기 충분하지 않나요? 제가 대테러부대 들어갔다와서 대테러부대에 엄청난 소속감느꼈다고 쳐도 ㅋㅋ... 대테러작전사~ 일본의 대테러는 왜 실패했나~ 같은 책에서 에서 제가 부임하기도 전 부대가 한 일을 '우리가' 했다고 묘사해버리면 거짓말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꺼같아서요.
그리고 또 말하게 되지만, 43년 2월에 부임해서 44년 열하성으로 이동하기 전까지의 기간은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 잔존세력 토벌활동을 하기에 충분할 시기인데 왜 본문에 이걸 고려안했는지도 의문스러웠고요.
그리고 또 말하게 되지만, 43년 2월에 부임해서 44년 열하성으로 이동하기 전까지의 기간은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 잔존세력 토벌활동을 하기에 충분할 시기인데 왜 본문에 이걸 고려안했는지도 의문스러웠고요.
본문에 써 있는데요.. 그 기간에 잔존세력이 거의 없었다는게 본문내용입니다.
동북항일연군은 1941. 와해되어
1942 완전히 소멸하였고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습니다.
39년 10월~41년 봄이 대규모 독립군토벌작전시기이고 42년에 이미 완전 와해, 43년부터는 하는 일이 없다시피하니 그해말 아예 이동하게 된 것이죠.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 더 보기
동북항일연군은 1941. 와해되어
1942 완전히 소멸하였고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습니다.
39년 10월~41년 봄이 대규모 독립군토벌작전시기이고 42년에 이미 완전 와해, 43년부터는 하는 일이 없다시피하니 그해말 아예 이동하게 된 것이죠.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 더 보기
본문에 써 있는데요.. 그 기간에 잔존세력이 거의 없었다는게 본문내용입니다.
동북항일연군은 1941. 와해되어
1942 완전히 소멸하였고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습니다.
39년 10월~41년 봄이 대규모 독립군토벌작전시기이고 42년에 이미 완전 와해, 43년부터는 하는 일이 없다시피하니 그해말 아예 이동하게 된 것이죠.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이 문장과도 맥락이 맞고요.
동북항일연군은 1941. 와해되어
1942 완전히 소멸하였고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습니다.
39년 10월~41년 봄이 대규모 독립군토벌작전시기이고 42년에 이미 완전 와해, 43년부터는 하는 일이 없다시피하니 그해말 아예 이동하게 된 것이죠.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이 문장과도 맥락이 맞고요.
방금 댓글로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본인도 말씀하신 부분 아닌가요? 43년 초두에도 '거의 봉쇄되어'있다고 표현했으니 소수는 있었다는 거고요. 그 소수중에 독립을 위한 조선인 게릴라가 있었고 그걸 토벌한 경험을 말했나보죠. 충분히 고려할 가능성같은데 그 기간에 잡을 수 있는 조선인 게릴라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인가요?
제가 차마 43년도에 독립군이 정말 아예 없었는지 사료까지 찾아볼 능력은 없어서 검색해봤더니
백선엽 장군의 죽음으로 그놈의 43년을 꼭 집어 역사학자와 한 인터뷰를 가져와 볼께요.
https://www.youtube.com/watch?v=vGl5UL2eDxU
(4분 56초 경입니다.)
인터뷰어:고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로 있었던 43년 무렵에는 만주지역의 항일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토벌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중... 더 보기
백선엽 장군의 죽음으로 그놈의 43년을 꼭 집어 역사학자와 한 인터뷰를 가져와 볼께요.
https://www.youtube.com/watch?v=vGl5UL2eDxU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백선엽 장군의 빛과 그림자 - 심용환 (역사학자, MBC라디오 타박타박 세계자 진행자)
(4분 56초 경입니다.)
인터뷰어:고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로 있었던 43년 무렵에는 만주지역의 항일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토벌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중... 더 보기
제가 차마 43년도에 독립군이 정말 아예 없었는지 사료까지 찾아볼 능력은 없어서 검색해봤더니
백선엽 장군의 죽음으로 그놈의 43년을 꼭 집어 역사학자와 한 인터뷰를 가져와 볼께요.
https://www.youtube.com/watch?v=vGl5UL2eDxU
(4분 56초 경입니다.)
인터뷰어:고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로 있었던 43년 무렵에는 만주지역의 항일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토벌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중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이 부분은 어떻습니까
심용환:이 부분은 아주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43년이면 45년에 일본이 패망을 하니까 사실은 중국에 있는 중국인을 중심으로 하지만 한인들도 포함되어서 항일 무장항쟁이 굉장히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때였고, 43년 이면 만주 일대 에서는 뭐 이제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항일 세력들, 민족주의 계열의 소수이긴 하지만 항일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죠.그리고 굳이 43년이란 말을 자꾸 하는 이유는 40년대 초반에 저항이 강했고 후반으로 갈 수록 세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이건 어쨌건 정확한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와 엮어본다면, 중국 공산당 계열 게릴라를 잡으려 했다가 독립군을 잡은 걸 말한 걸 수도 있고, 또 조선의용군이 43년부터 팔로군의 지휘를 받았고, 그 외의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의 자원을 받았으니 팔로군을 잡으면서 조선인들을 잡은 경험을 서술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백선엽 장군의 죽음으로 그놈의 43년을 꼭 집어 역사학자와 한 인터뷰를 가져와 볼께요.
https://www.youtube.com/watch?v=vGl5UL2eDxU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백선엽 장군의 빛과 그림자 - 심용환 (역사학자, MBC라디오 타박타박 세계자 진행자)
(4분 56초 경입니다.)
인터뷰어:고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로 있었던 43년 무렵에는 만주지역의 항일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토벌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중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이 부분은 어떻습니까
심용환:이 부분은 아주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43년이면 45년에 일본이 패망을 하니까 사실은 중국에 있는 중국인을 중심으로 하지만 한인들도 포함되어서 항일 무장항쟁이 굉장히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때였고, 43년 이면 만주 일대 에서는 뭐 이제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항일 세력들, 민족주의 계열의 소수이긴 하지만 항일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죠.그리고 굳이 43년이란 말을 자꾸 하는 이유는 40년대 초반에 저항이 강했고 후반으로 갈 수록 세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이건 어쨌건 정확한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와 엮어본다면, 중국 공산당 계열 게릴라를 잡으려 했다가 독립군을 잡은 걸 말한 걸 수도 있고, 또 조선의용군이 43년부터 팔로군의 지휘를 받았고, 그 외의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의 자원을 받았으니 팔로군을 잡으면서 조선인들을 잡은 경험을 서술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정확한 역사왜곡이라는 건 백선엽의 진술에 배치되는 내용이 아니라 43년에는 항일세력이 없었고 토벌행위가 없어서 중한 문제가 아니라는 부분이 역사왜곡이라는 거죠. 43년에도 간도특설대가 활동하던 지역에 항일세력이 있었다고 저 분은 주장하는 거고요. 주 세력은 공산당이었으나 민족주의 계열도 있었다는 건데 사실이라면 43년에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서 항일 독립군을 잡았을 수 있는거지요? 그리고 44년 팔로군과 싸우던 시기에도 그 안에서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조선인들을 죽였을 수도 있는거고요.
전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가 한창 전투가... 더 보기
전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가 한창 전투가... 더 보기
정확한 역사왜곡이라는 건 백선엽의 진술에 배치되는 내용이 아니라 43년에는 항일세력이 없었고 토벌행위가 없어서 중한 문제가 아니라는 부분이 역사왜곡이라는 거죠. 43년에도 간도특설대가 활동하던 지역에 항일세력이 있었다고 저 분은 주장하는 거고요. 주 세력은 공산당이었으나 민족주의 계열도 있었다는 건데 사실이라면 43년에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서 항일 독립군을 잡았을 수 있는거지요? 그리고 44년 팔로군과 싸우던 시기에도 그 안에서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조선인들을 죽였을 수도 있는거고요.
전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가 한창 전투가 치열하던 39~41년 시기에 몰려있었고 백선엽 장군은 그 때 없었으니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를 모두 뒤집어 씌우는 건 부당하다에 반박하는 게 아니에요. 43년 말에 부대가 이동했다에 반박하는 것도 아니고요. 자서전에 쓴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라는 부분이 '백선엽은 [만주국육군군관생도로서 독립군을 토벌]하였습니다.'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거죠.
그리고 39~41년은 꽤 격렬하던 시기였으니 잔학행위를 격하게 했고 잔당토벌시기에는 민심도 관리해야하고 해서 안했을 수도 있지만, 그 시기에 신나게 잔학행위를 벌여온 사람들이 여전히 43년도에도 부임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43년에도 소소하게 있던거 아니냐는 의심 역시 할 만 하지 않나요?
39년 간도특설대에 부임해서 붙잡힌 여전사들 강간하려던 인물은 43년 중에도 여전히 복무중이었는걸요. 이건 정말 추측의 영역이니까 함부로 뒤집어 씌울 수는 없는 혐의긴 하지만, 아니라고 확실히 부정해줄 수도 없는 문제인거 같은데.. 필리핀 독립전쟁에서 미군은 전쟁 첫날에서 부터 학살을 자행했는데, 공식적으로 보고된 학살기록은 얼마 되지 않아요. 싼타아나에서 발랑기가까지 손에 꼽죠. 그러나 공식기록이 저러니 그 도중에 잔학행위는 없었을꺼야라고 친절하게 추측해주는 역사학자는 전 본적이 없어요. 오명이 있는 부대에서 인적구성 크게 안바뀌고 있었으니 나쁜 짓을 했을꺼야라는 의심이 오히려 합리적이죠. 사실 지금 우린 나무위키에 적혀있는 8개 자료만 가지고 얘기하고 있으니 원본 사료에는 백선엽 장군이 있던 43년에 벌어진 잔학행위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ㄷㄷ..
전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가 한창 전투가 치열하던 39~41년 시기에 몰려있었고 백선엽 장군은 그 때 없었으니 간도특설대의 잔학행위를 모두 뒤집어 씌우는 건 부당하다에 반박하는 게 아니에요. 43년 말에 부대가 이동했다에 반박하는 것도 아니고요. 자서전에 쓴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라는 부분이 '백선엽은 [만주국육군군관생도로서 독립군을 토벌]하였습니다.'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거죠.
그리고 39~41년은 꽤 격렬하던 시기였으니 잔학행위를 격하게 했고 잔당토벌시기에는 민심도 관리해야하고 해서 안했을 수도 있지만, 그 시기에 신나게 잔학행위를 벌여온 사람들이 여전히 43년도에도 부임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43년에도 소소하게 있던거 아니냐는 의심 역시 할 만 하지 않나요?
39년 간도특설대에 부임해서 붙잡힌 여전사들 강간하려던 인물은 43년 중에도 여전히 복무중이었는걸요. 이건 정말 추측의 영역이니까 함부로 뒤집어 씌울 수는 없는 혐의긴 하지만, 아니라고 확실히 부정해줄 수도 없는 문제인거 같은데.. 필리핀 독립전쟁에서 미군은 전쟁 첫날에서 부터 학살을 자행했는데, 공식적으로 보고된 학살기록은 얼마 되지 않아요. 싼타아나에서 발랑기가까지 손에 꼽죠. 그러나 공식기록이 저러니 그 도중에 잔학행위는 없었을꺼야라고 친절하게 추측해주는 역사학자는 전 본적이 없어요. 오명이 있는 부대에서 인적구성 크게 안바뀌고 있었으니 나쁜 짓을 했을꺼야라는 의심이 오히려 합리적이죠. 사실 지금 우린 나무위키에 적혀있는 8개 자료만 가지고 얘기하고 있으니 원본 사료에는 백선엽 장군이 있던 43년에 벌어진 잔학행위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ㄷㄷ..
사실 나무위키 역사 서술은 레퍼런스가 부실한 경우가 많아서 백선엽 관련 논문들만 보자면 간도에 있어서 죄를 부정하기 어렵죠 지원이나 학살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말 정도라
'종족'이 아니라 '민족'이 적확한 어휘겠지요. 일본인도 Homo sapiens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라고 배웠는지 어땠는지는 죽은 백선엽에게 물어볼 수 없겠지만,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이 당시의 통념이나 주 교육내용을 배운대로 한 행동이라서 후대에 와서 왈가왈부하기 곤란한 문제는 아닙니다. 비슷한 시대를 산 사람 중에는 학창시절에 일본어로 된 교과서를 찢고 만주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6개월 동안 대륙을 건너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 선생 같은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주민을 든 비유는 많이 어색(... 더 보기
그리고 북한주민을 든 비유는 많이 어색(... 더 보기
'종족'이 아니라 '민족'이 적확한 어휘겠지요. 일본인도 Homo sapiens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라고 배웠는지 어땠는지는 죽은 백선엽에게 물어볼 수 없겠지만,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이 당시의 통념이나 주 교육내용을 배운대로 한 행동이라서 후대에 와서 왈가왈부하기 곤란한 문제는 아닙니다. 비슷한 시대를 산 사람 중에는 학창시절에 일본어로 된 교과서를 찢고 만주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6개월 동안 대륙을 건너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 선생 같은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주민을 든 비유는 많이 어색(語塞)하군요. 북한 주민 모두가 김씨 일가에 충성했는지 어땠는지도 모르겠고, 설령 그 삼대에 충성해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에 적대행위를 뚜렷이 한 것이 없다면 단죄해야 하나요? 천안함 폭침 주동자나 연평도 폭격 지시한 사람이면 모르겠지만요. 비시 정부하에 어렵게 살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다 단죄되었습니까?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만 처벌받았죠.
그리고 북한주민을 든 비유는 많이 어색(語塞)하군요. 북한 주민 모두가 김씨 일가에 충성했는지 어땠는지도 모르겠고, 설령 그 삼대에 충성해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에 적대행위를 뚜렷이 한 것이 없다면 단죄해야 하나요? 천안함 폭침 주동자나 연평도 폭격 지시한 사람이면 모르겠지만요. 비시 정부하에 어렵게 살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다 단죄되었습니까?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만 처벌받았죠.
백선엽의 공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일컬어지는 625 전쟁사 편찬을 지휘한 이가 백선엽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영웅화하기 위해 상당부분 날조되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354). 국방부에서 발간한 자료라고 무조건 믿을 것은 못되는 모양입니다.
'백선엽은 간도 특설대에 지원병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관련 증거서류를 다 확보했다.'
증거서류가 중요하겠죠. 지원병은 2기까지에 한하며 3기 이후에도 지원병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백선엽은 병이 아니라 장교였습니다.
본인도 백선엽의 회고록의 내용으로 백선엽을 비판하고 있죠.
' 6·25전쟁 초기 김홍일 장군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글자가 없어질 뻔했다. 이 역사가 아직까지 너무 묻혔다. 일본군 출신 백선엽 때문에 묻혔다. 국민들이 거의 모른다.'
백선엽의 저서에서 개전초기... 더 보기
증거서류가 중요하겠죠. 지원병은 2기까지에 한하며 3기 이후에도 지원병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백선엽은 병이 아니라 장교였습니다.
본인도 백선엽의 회고록의 내용으로 백선엽을 비판하고 있죠.
' 6·25전쟁 초기 김홍일 장군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글자가 없어질 뻔했다. 이 역사가 아직까지 너무 묻혔다. 일본군 출신 백선엽 때문에 묻혔다. 국민들이 거의 모른다.'
백선엽의 저서에서 개전초기... 더 보기
'백선엽은 간도 특설대에 지원병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관련 증거서류를 다 확보했다.'
증거서류가 중요하겠죠. 지원병은 2기까지에 한하며 3기 이후에도 지원병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백선엽은 병이 아니라 장교였습니다.
본인도 백선엽의 회고록의 내용으로 백선엽을 비판하고 있죠.
' 6·25전쟁 초기 김홍일 장군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글자가 없어질 뻔했다. 이 역사가 아직까지 너무 묻혔다. 일본군 출신 백선엽 때문에 묻혔다. 국민들이 거의 모른다.'
백선엽의 저서에서 개전초기 자신의 1사단이 흩어진 이후 다시 편제를 재편할 수 있었던게 김홍일 장군의 덕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른 자료에서 1사단이 지휘계통을 유지했다 라고 적는 내용도 있는데, 완전히 와해되었다가 김홍일이
다시 집결시켰다라고 적고 있는게 백선엽이에요.
개전초 백선엽이 무슨 파티에 나가있었다는데 교육파견을 나가있었습니다.
춘천의 김종오만 외박을 금지하고 3일을 버텼다는데 많이들 욕하는 백선엽 동생 백인엽이가 옹진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6월 24일 자정 경계령이 해제됐지만, 그는 여전히 외출 외박과 휴가를 통제했고요.
그런데 이 때 UN 한위에서 연대를 방문해 이를 문제삼았죠.
"38선상이 이렇게 평온한데 긴장감을 조성케 하는 것은 역효과만 날 뿐, 특별 경계태세를 취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렇게 해서 17연대의 비상조치는 해제됐지만, 그래도 전방에 있는 1, 3대대는 여전히 통제했습니다.
그리고 백선엽의 1사단도 기습을 당하고 바로 최전선 개성을 빼앗긴거지 의정부의 7사단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문산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의정부 7사단이 무너진 이후 28일 1사단도 무너진거죠.
그리고 솔까말 625 기습남침에서 개전초 최전방 사단들의 패퇴를 비난하기는 좀 민망하지 않습니까.
무슨 전쟁이 날 줄 알고 있는데 사단장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없을 때 기습을 당한건데요.
이 분이 한 이야기에서 백선엽 자신의 공을 날조했다는 얘기가 어디있습니까?
육탄10용사? 심일소령? 이게 백선엽의 공이고 백선엽을 영웅으로 만드는 이야기입니까?
낙동강에서 혼자 싸운것처럼 과장했다, 미군역할이 컸다
미군역할 컸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김홍일/김종오의 업적을 아는 사람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백선엽 업적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않나요?
제가 백선엽이 뭘 했는지 알게 되었을때는
김홍일/김종오의 업적도 함께 알게 되었는데 말이죠.
전쟁사 편찬과 관련해서, 625 전쟁 기록을 백선엽만큼 많이 남긴 장군이 없습니다.
백선엽을 이순신에 비유하는 이유의 상당부분은 백선엽이 남긴 기록이 많고 구체적이고 상세한 상황서술이 많아
절로 난중일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에요. 전쟁사 편찬에 적임자라고 할수밖에 없죠.
링크 기사의 내용에서 백선엽이 본인을 영웅화하기 위해 날조했다는 사실이 뭐가 있습니까?
백선엽이 625전쟁사 편찬을 지휘했다..그래서 그 편찬된 전쟁사에 날조된 사실이 뭐냐는거죠.
고작 나온게 육탄10용사인데, 그게 백선엽 1사단 소속이라고 백선엽 영웅화가 됩니까.
전쟁사에도 1사단이 초반에 깨져나간 이야기 다있고 대전차포가 전차를 파괴하지 못해
육탄공격을 펼친 것은 1사단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분은 심일소령과 육탄5용사의 육탄공격이 날조라고 했죠? 심일소령과 육탄5용사는 백선엽의 1사단이 아니라
본인이 영웅이라고 한 김종오 6사단이에요.
자기를 영웅화하려고 본인 1사단 장병들의 육탄공격을 날조하고 김홍일 김종오의 업적을 숨겼다더니
김종오를 영웅화하려고 김종오 6사단 장교의 육탄공격을 날조했던걸까요? 앞뒤가 안맞지 않습니까.
6사단이 잘싸우고 춘천에서 버텨낸 이야기는 백선엽이 편찬을 지휘했다는 전쟁사에 잘 나옵니다.
증거서류가 중요하겠죠. 지원병은 2기까지에 한하며 3기 이후에도 지원병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백선엽은 병이 아니라 장교였습니다.
본인도 백선엽의 회고록의 내용으로 백선엽을 비판하고 있죠.
' 6·25전쟁 초기 김홍일 장군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글자가 없어질 뻔했다. 이 역사가 아직까지 너무 묻혔다. 일본군 출신 백선엽 때문에 묻혔다. 국민들이 거의 모른다.'
백선엽의 저서에서 개전초기 자신의 1사단이 흩어진 이후 다시 편제를 재편할 수 있었던게 김홍일 장군의 덕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른 자료에서 1사단이 지휘계통을 유지했다 라고 적는 내용도 있는데, 완전히 와해되었다가 김홍일이
다시 집결시켰다라고 적고 있는게 백선엽이에요.
개전초 백선엽이 무슨 파티에 나가있었다는데 교육파견을 나가있었습니다.
춘천의 김종오만 외박을 금지하고 3일을 버텼다는데 많이들 욕하는 백선엽 동생 백인엽이가 옹진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6월 24일 자정 경계령이 해제됐지만, 그는 여전히 외출 외박과 휴가를 통제했고요.
그런데 이 때 UN 한위에서 연대를 방문해 이를 문제삼았죠.
"38선상이 이렇게 평온한데 긴장감을 조성케 하는 것은 역효과만 날 뿐, 특별 경계태세를 취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렇게 해서 17연대의 비상조치는 해제됐지만, 그래도 전방에 있는 1, 3대대는 여전히 통제했습니다.
그리고 백선엽의 1사단도 기습을 당하고 바로 최전선 개성을 빼앗긴거지 의정부의 7사단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문산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의정부 7사단이 무너진 이후 28일 1사단도 무너진거죠.
그리고 솔까말 625 기습남침에서 개전초 최전방 사단들의 패퇴를 비난하기는 좀 민망하지 않습니까.
무슨 전쟁이 날 줄 알고 있는데 사단장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없을 때 기습을 당한건데요.
이 분이 한 이야기에서 백선엽 자신의 공을 날조했다는 얘기가 어디있습니까?
육탄10용사? 심일소령? 이게 백선엽의 공이고 백선엽을 영웅으로 만드는 이야기입니까?
낙동강에서 혼자 싸운것처럼 과장했다, 미군역할이 컸다
미군역할 컸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김홍일/김종오의 업적을 아는 사람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백선엽 업적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않나요?
제가 백선엽이 뭘 했는지 알게 되었을때는
김홍일/김종오의 업적도 함께 알게 되었는데 말이죠.
전쟁사 편찬과 관련해서, 625 전쟁 기록을 백선엽만큼 많이 남긴 장군이 없습니다.
백선엽을 이순신에 비유하는 이유의 상당부분은 백선엽이 남긴 기록이 많고 구체적이고 상세한 상황서술이 많아
절로 난중일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에요. 전쟁사 편찬에 적임자라고 할수밖에 없죠.
링크 기사의 내용에서 백선엽이 본인을 영웅화하기 위해 날조했다는 사실이 뭐가 있습니까?
백선엽이 625전쟁사 편찬을 지휘했다..그래서 그 편찬된 전쟁사에 날조된 사실이 뭐냐는거죠.
고작 나온게 육탄10용사인데, 그게 백선엽 1사단 소속이라고 백선엽 영웅화가 됩니까.
전쟁사에도 1사단이 초반에 깨져나간 이야기 다있고 대전차포가 전차를 파괴하지 못해
육탄공격을 펼친 것은 1사단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분은 심일소령과 육탄5용사의 육탄공격이 날조라고 했죠? 심일소령과 육탄5용사는 백선엽의 1사단이 아니라
본인이 영웅이라고 한 김종오 6사단이에요.
자기를 영웅화하려고 본인 1사단 장병들의 육탄공격을 날조하고 김홍일 김종오의 업적을 숨겼다더니
김종오를 영웅화하려고 김종오 6사단 장교의 육탄공격을 날조했던걸까요? 앞뒤가 안맞지 않습니까.
6사단이 잘싸우고 춘천에서 버텨낸 이야기는 백선엽이 편찬을 지휘했다는 전쟁사에 잘 나옵니다.
여러분! 광복군 출신은 누구이며 일군 출신은 누구이고 또 만군 출신은 누굽니까? 다 같이 불행했던 우리 한국 국민들입니다. (중략) 광복군만이 훌륭하고 광복군만이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전국민이 몽땅 이 나라를 비우고 망명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중략) 선생님께서 만부득이한 사정도 아닌데 망명해서 독립운동하는 것만이 잘하는 일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 그 말씀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은 안에서 나라를 지킬 사람도 있어야... 더 보기
만약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전국민이 몽땅 이 나라를 비우고 망명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중략) 선생님께서 만부득이한 사정도 아닌데 망명해서 독립운동하는 것만이 잘하는 일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 그 말씀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은 안에서 나라를 지킬 사람도 있어야... 더 보기
여러분! 광복군 출신은 누구이며 일군 출신은 누구이고 또 만군 출신은 누굽니까? 다 같이 불행했던 우리 한국 국민들입니다. (중략) 광복군만이 훌륭하고 광복군만이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전국민이 몽땅 이 나라를 비우고 망명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중략) 선생님께서 만부득이한 사정도 아닌데 망명해서 독립운동하는 것만이 잘하는 일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 그 말씀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은 안에서 나라를 지킬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라 안에서 나라를 지키려고, 또는 조금 우직한 탓으로 부득이 망명도 못하고 왜놈들 압제하에서 신음하면서, 그래도 우리 풍습을 지키고 우리 말을 쓰면서 우리 바지 저고리를 입고 이 땅을 지켜 온 불쌍한 우리 동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독립이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라를 위해 망명을 하여 고생했던 분도 훌륭하지만 왜놈들의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나라를 지키느라 고생한 많은 동포들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합니다.
광복군이 이 나라의 군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복군은 정상적인 군사 교육을 이수할 수 없었던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일본 육사 출신들이 군사적 지식이 풍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과거를 묻는다면 일군 출신이 광복군 출신 앞에서 큰소리칠 형편은 못 됩니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은 그들이 일본 육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이 만약 언젠가는 조국이 해방될 것이다, 그 때는 내가 해방된 조국에 군인으로서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도 누구 못지 않은 훌륭한 애국자들입니다. (중략)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리 참모장이신 이응준 장군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전략) 일군이 패망하자 당시 만군에 복무하던 장교와 사관 후보생들, 그리고 일군에서 복무하던 장교와 사병 2백여 명이 장춘에 집결해서 그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거류민단 보안사령부를 조직했는데, 그 사령부에서는 그 일대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 동포들을 안전하게 호송해 주는 일 등의 뜻있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사령관이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정일권 대령이고 또 지금 우리 군대 안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중략) 동지들입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그들은 그 때 비록 몸은 만군에 속해 있었어도 정신은, 그 정신만은 한국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일군이 패망하자마자 위험을 무릎쓰고 우리 동포들을 그 무지막지한 원주민들의 행패로부터 보호하고 나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예로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방 당시에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계시다가 아깝게도 전범으로 처형된 홍사익 중장은 우리나라 민간인으로서는 유일한 일본군의 장성이었습니다. 일본 육사 26기생인 그 분은 순조로운 승진 끝에 한국인으로서는 더 바라볼 수 없는 중장에까지 진급했습니다.
1942년 가을, 그는 만주의 공주령에 있는 만주 교도학교 참모부장격인 부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일본 당국에서는 만주 땅에 살고 있는 수백만 한국 교포들에 대한 선무 공작이 목적이었지만 한국 교포들은 거꾸로 홍 장군을 옹립하고 일본에 대항하여 궐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 분은 창씨도 안 한 분이었습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일본 군부가 그를 필리핀 포로수용소로 전속시킨 거지요. (중략) 그 때 주위 사람들은 그분에게 일본군을 이탈해서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반대했습니다. 나는 이 말을 여러분도 잘 아는 언론인 김을한 동지한테서 직접 들었습니다. (중략) 홍 장군은 엄숙하게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이번에 가는 길이 죽는 길이라 하더라도 나는 가야 하오. 지금 조선 사람이 수십만 명이나 전쟁에 동원되어 있는데 최고 지위에 있는 내가 만약에 일본을 배신한다면 일본군에 끌려나온 장병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도 모두 보복을 받을 것이니 나 혼자만 생각하고 그런 경솔한 짓은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보면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결국은 전범으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여러분! 일신의 안전을 생각하고 그저 망명해서 독립군이 된 홍 장군이 위대합니까, 수십만 한국인의 보복을 걱정하고 사지로 부임한 홍 장군이 위대합니까?
겉만 광복군이면 무엇하고 겉이 일군이면 어떻고 만군이면 어떻습니까?
///
이 연설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박경석 장군이 영웅으로 꼽은 김홍일 장군입니다.
만약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전국민이 몽땅 이 나라를 비우고 망명했더라면 오늘날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중략) 선생님께서 만부득이한 사정도 아닌데 망명해서 독립운동하는 것만이 잘하는 일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 그 말씀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은 안에서 나라를 지킬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라 안에서 나라를 지키려고, 또는 조금 우직한 탓으로 부득이 망명도 못하고 왜놈들 압제하에서 신음하면서, 그래도 우리 풍습을 지키고 우리 말을 쓰면서 우리 바지 저고리를 입고 이 땅을 지켜 온 불쌍한 우리 동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독립이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나라를 위해 망명을 하여 고생했던 분도 훌륭하지만 왜놈들의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나라를 지키느라 고생한 많은 동포들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합니다.
광복군이 이 나라의 군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복군은 정상적인 군사 교육을 이수할 수 없었던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일본 육사 출신들이 군사적 지식이 풍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과거를 묻는다면 일군 출신이 광복군 출신 앞에서 큰소리칠 형편은 못 됩니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은 그들이 일본 육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이 만약 언젠가는 조국이 해방될 것이다, 그 때는 내가 해방된 조국에 군인으로서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도 누구 못지 않은 훌륭한 애국자들입니다. (중략)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리 참모장이신 이응준 장군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전략) 일군이 패망하자 당시 만군에 복무하던 장교와 사관 후보생들, 그리고 일군에서 복무하던 장교와 사병 2백여 명이 장춘에 집결해서 그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거류민단 보안사령부를 조직했는데, 그 사령부에서는 그 일대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 동포들을 안전하게 호송해 주는 일 등의 뜻있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사령관이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정일권 대령이고 또 지금 우리 군대 안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중략) 동지들입니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그들은 그 때 비록 몸은 만군에 속해 있었어도 정신은, 그 정신만은 한국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일군이 패망하자마자 위험을 무릎쓰고 우리 동포들을 그 무지막지한 원주민들의 행패로부터 보호하고 나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예로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방 당시에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계시다가 아깝게도 전범으로 처형된 홍사익 중장은 우리나라 민간인으로서는 유일한 일본군의 장성이었습니다. 일본 육사 26기생인 그 분은 순조로운 승진 끝에 한국인으로서는 더 바라볼 수 없는 중장에까지 진급했습니다.
1942년 가을, 그는 만주의 공주령에 있는 만주 교도학교 참모부장격인 부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일본 당국에서는 만주 땅에 살고 있는 수백만 한국 교포들에 대한 선무 공작이 목적이었지만 한국 교포들은 거꾸로 홍 장군을 옹립하고 일본에 대항하여 궐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 분은 창씨도 안 한 분이었습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일본 군부가 그를 필리핀 포로수용소로 전속시킨 거지요. (중략) 그 때 주위 사람들은 그분에게 일본군을 이탈해서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반대했습니다. 나는 이 말을 여러분도 잘 아는 언론인 김을한 동지한테서 직접 들었습니다. (중략) 홍 장군은 엄숙하게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이번에 가는 길이 죽는 길이라 하더라도 나는 가야 하오. 지금 조선 사람이 수십만 명이나 전쟁에 동원되어 있는데 최고 지위에 있는 내가 만약에 일본을 배신한다면 일본군에 끌려나온 장병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도 모두 보복을 받을 것이니 나 혼자만 생각하고 그런 경솔한 짓은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보면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결국은 전범으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여러분! 일신의 안전을 생각하고 그저 망명해서 독립군이 된 홍 장군이 위대합니까, 수십만 한국인의 보복을 걱정하고 사지로 부임한 홍 장군이 위대합니까?
겉만 광복군이면 무엇하고 겉이 일군이면 어떻고 만군이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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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설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박경석 장군이 영웅으로 꼽은 김홍일 장군입니다.
공과 과에 대해 많이 조사하셨네요. 음... 다음 한가지만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옆집 아저씨가 좋은 분입니다. 봉사도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공헌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어머니와 여동생을 겁탈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을 칼로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독립을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요. 사람들이 공과 과를 비교해보니 공이 더 크다, 과가 더 크다 말들이 많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의 공이 무엇이건 간에 그는 분명히 범죄자라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제대로 된 죗값도 치르지 않은 그 인간이 영웅대접 받으며 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할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건 제가 어리석기 때문일까요? 공을 많이 쌓으면 과오를 씻을 수 있는 건가요? 조두순이 봉사를 열심히 하면 나영이는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요?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강간, 살인에 대한 죄값은 응당 치러야 하고, 저는 그를 용서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게 아마 저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의 핵심일거라 생각합니다. 용서는 자발적이어야지, 강요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루카포드 님께서 백선엽이를 용서하시겠다면 그건 선생님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굳이 그를 위해 변명하고자 애쓸수록 대다수 국민들, 피해자의 가족들은(저희 조부께서는 독립운동중 고문을 받아 청력을 잃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를 느낄겁니다.
음... 제 글 기억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많은 부분을 더할 순 없을 거 같고, 다른 글 링크만 하나 더 걸겠습니다. 오히려 아래 링크 때문에 본무에 링크해 주신 글을 쓰게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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