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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5/21 21:59:16수정됨
Name   joel
Subject   스타1 테프전의 부등호 방향을 바꾼 경기.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 경기가 추천 목록에 떴길래 옛날 생각에 몇 자 적어봅니다. (근데 나 스타 안 본지 엄청 오래됐는데 어떻게 이걸 추천에 띄워준 거냐 유튜브...)

이 경기가 있기 이전, 04~05년 무렵에 프로토스들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최연성을 정공법으로 이길만한 프로토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죠. 물론 최연성이라고 무적은 아니고 프로토스가 아예 못 이겨본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최연성이 몰고 온 프로토스전의 혁명에 대항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 혁명이란 뭔가하면 급속한 물량 속도전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빠른 제2멀티 활성화였고요. 

스타라는 게임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자원을 더 빨리 먹고 싸우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처음 게임이 발매될 당시에는 모두가 본진자원으로 싸우는 게 당연했고 앞마당은 상황 봐서 늦게 먹는 것이었지만 어느 새 앞마당은 초반에 당연히 먹어야 하는 것이 되더니 급기야는 앞마당에 이은 제2멀티까지 빠르게 먹고 싸우는 것이 대세가 됩니다. 쉽게 말해 예전에 비해 200을 채우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것인데 이 변화를 주도한 사람이 최연성입니다. 헌데 프로토스는 이 물량의 속도전에서 테란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캐리어 때문이었죠. 

전통적으로 테프전은 초반에 프로토스가 드라군의 강력함으로 테란을 가둬놓고 팩토리와 게이트의 가격, 테크 차이를 이용해 중반까지 앞서가다가 테란이 중반 이후 탱크의 엄청난 인성비와 화력으로 따라가고, 그럼 프로토스는 그 때까지 벌어놓은 우위를 밑천으로 캐리어를 뽑아 싸웠죠. 비유하자면 테란은 최고 속도는 빠르나 엔진이 예열될 시간이 필요하고 가속력이 낮은 엔진을 달고 달리는데 프로토스는 가속이 빠르나 최고 속도가 낮은 엔진을 써서 달리다가 어느 시점에 오면 잠시 멈춰 서서 고출력 엔진으로 바꿔 달고 달리는 격이었죠. 

그런데 물량이 차오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테란의 병력이 프로토스 지상군을 압도하는 임계 시간은 확 당겨졌고 그만큼 캐리어를 전환할 시간이 줄어듭니다. 프로토스도 맞멀티를 먹고 싸울 수는 있으나 테란은 멀티 하나가 늘어나는 순간 팩토리가 늘어나고 병력이 폭발하는데 프로토스가 캐리어 테크를 올리고 캐리어를 뽑고 업그레이드를 하는 시간은 멀티 하나 더 먹는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거든요.

일찌감치 멀티를 먹고 업그레이드 잘 마친 테란 병력 앞에 질드라가 녹아나자 프로토스들은 더욱 더 캐리어에 매달렸고 급기야는 테란보다 멀티에서 앞서가야 한다는 원칙조차 포기하고 캐리어에 올인했습니다. 

그래서 04년 말쯤 가면 테란은 마음껏 멀티를 먹고 물량을 쏟아내는데 프로토스는 테란이 언제 치고나올까 전전긍긍하며 멀티견제도 안 하고 테란이 멀티를 하면 그제서야 멀티 따라가며 캐리어만 기다리는 광경이 숱하게 나왔습니다. 그렇게 캐리어가 겨우 두 기쯤 나와서 공1업 찍고 인터셉터를 채울 동안 테란은 12팩, 14팩에서 22업 골리앗을 부대단위로 쏟아내며 프로토스를 박살냈죠. 저프전에서 저그가 프로토스랑 똑같은 자원만 먹고 멀티 견제도 안 하며 울트라 나오기만 기다린다면 이길 수가 있을까요. (이 시기 테프전 프로토스의 약세에는 프로토스를 괴롭힌 FD 빌드의 영향도 있긴 하나 여기선 다루지 않겠습니다.)

최연성은 이런 방법으로 한 때 프로토스전 승률을 8할까지 찍었고 이건 점차 다른 테란들에게 전수되면서 테프전 밸런스를 급격히 무너뜨립니다. 이윤열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프로토스이자 당시 테란전 최강자였던 강민이 최연성만 만났다 하면 전진 게이트, 다크, 리버 올인 같은 날빌만 줄창 지르다 허구헌날 패했던 것, 박용욱이 최연성과의 결승에서 리버 올인 같은 날빌만 지르다가 패했던 것이 당시 테프전의 실태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이구요. 


이런 양상을 뒤집은 것이 박정석입니다. 이 경기에서 박정석이 보여준 해법은,

1. 캐리어는 포기한다. 

2. 테란의 느린 기동력을 붙들고 늘어져 지상군으로 멀티를 타격해야 한다. 

그러니까 정면대결 대신 지상군의 회전력과 기동력으로 테란을 이긴다는 건데 오늘날 보기엔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 저 때는 저걸 최연성 같은 최상위 테란을 상대로 성공시킨 프로토스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간단한 걸 다른 프로토스들이 생각을 못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이건 이거 나름대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랬습니다. 

1. 테란의 멀티를 타격하려 해도 소수 병력이 가봤자 발빠른 벌처가 몰려와 정리해버린다.
2. 그렇다고 다수를 동원하면 테란의 본대가 움직여 각개격파하면 끝이다. 
3. 혹은 테란이 멀티하나 내주는 셈 치고 본대로 치고 들어와 프로토스의 입구를 조여버리면 끝이다.

그래서 프로토스들은 캐리어가 나오기만 기다린 거죠. 캐리어가 있어야 정면 교전도 이길 수 있고 멀티 견제도 할 수 있었거든요. 위에 썼듯이 바로 그 캐리어가 프로토스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음에도 말이죠.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박정석이 보여준 구체적인 해법은 이랬습니다. 

전제 하나. 벌처 1부대의 호위를 받는 탱크 2부대보다 벌처 2부대의 호위를 받는 탱크 1부대가 더 강하다. 

전제 둘. 테란은 방어타워가 없고 탱크가 느리다. 벌처가 없으면 멀티를 지킬 수 없고 멀티가 없으면 벌처가 뿜어져나올 수 없다. 

따라서, 

1. 멀티 견제 병력은 반드시 상대가 벌처만으로 정리할 수 없는 다수 병력을 보낸다. 

2. 테란의 본대가 움직여 조이기를 시도하건, 멀티를 구원하러 오건 상관 없다. 테란의 멀티만 부수면 된다. 

3. 멀티를 부쉈다면 테란이 본대를 움직여 내 입구를 조여도 당황할 필요 없다. 벌처의 지속적인 공급이 없이는 테란도 전진할 수 없다. 

4. 벌처가 부족한 테란의 조이기는 충원병력과 아비터, 스톰, 셔틀 질럿을 활용한 탱크 갉아먹기로 충분히 수비가 가능하다. 

5. 4를 위해 반드시 빠른 멀티와 타 스타팅 지역의 게이트웨이 확보가 필요하다. 

6. 이렇게 멀티를 부수고 벌처의 충원만 악화시키면 그 후로는 소수 병력으로도 얼마든지 테란의 후방 타격이 가능하다. 

7. 여기까지 오면 테란은 뒷심부족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다. 

이 경기에서 박정석에게 집요한 멀티 테러를 당한 최연성은 처음에는 병력의 각개격파를 시도했지만 이윽고 이대로 끌려가면 못 이긴다는 생각에 본대를 끌고 프로토스의 본진과 멀티를 타격합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멀티들을 하나 하나 다 부수기에는 탱크의 발이 너무 느렸고 프로토스는 아비터로 탱크를 얼리고 셔틀에 태운 템플러의 스톰으로 탱크를 갉아먹으며 시간을 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꾸역꾸역 게이트웨이에서 쏟아져나오는 질드라 앞에 결국 패배를 하게 되죠. 

화력을 기동력과 회전력으로 막는다, 이 진리는 이후로도 흔들리지 않은 테프전의 기본 명제가 됩니다. 이후로 프로토스들이 캐리어를 아예 안 쓰게 된 건 아니었으나 분명 테프전의 중심은 지상군이었죠. 

하나의 이론이 세워지면 이를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한 법입니다. 이 경기가 있고 몇 달이 지나서 벌어진 이병민과 김성제의 테프전에서 이를 증거하는 양상이 나오죠. 이병민은 빠른 승부를 내기 위해 자원을 탱크에 몰빵해 김성제의 입구 요충지를 점거해서 도저히 뚫을 수 없을 듯한 조이기를 만들었지만 김성제는 탱크의 전진만 늦추면서 셔틀 리버, 하템으로 후방을 타격해 테란의 추가 병력 공급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벌처가 충분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경기는 결국 조금씩 병력을 갉아먹힌 이병민의 패배였습니다.

따져보면 최연성 이전에도 01~04년 상위권 강자들의 테프전을 살펴보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테>프에 가까웠죠. 프로토스들은 이윤열을 비롯한 테란 강자들에게 제대로 이겨보질 못 했습니다. 최연성의 존재는 눈 위에 내린 서리였을 뿐 그 전이라고 해서 프로토스가 유리했던 게 아니었던 거죠. 프로토스들은 05년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프>=테의 모습을 보이며 저그에게 치이던 설움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소수 종족에서 부흥할 수 있었고요. 

흔히 스타팬들은 강민을 혁명가라 부르고 박정석은 기본적인 것을 잘 했던 우직한 선수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강민이 저그전의 혁명가라면 박정석 또한 테란전의 혁명가였다고 부르지 못 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나저나 영상 화질이 영 좋지 않은데 안타깝군요. 찾아봐도 저거보다 좋은 화질 영상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9
  • 이 글 보고 오랜만에 스타 봤읍니다
  • 유튜브 화질 빼고 모든게 완벽


캐리어 빌드타임보다 인터셉터 8기 채우는게 더 오래 걸린다는게 함정;;
벌처는 일꾼만큼 빨리 나온다는게 2차 함정-_-

최연성을 참 싫어했었죠. 너무 잘해서-0-
말도 안되게 멀티를 먹는데 어떻게든 막아냄-_-
그래서 투신이 5대빵으로 이긴 그 4강 경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네임넴
와 선생님 시리즈로 부탁드립니다 그때 줄기차게 스타만 봤지만 이런 내용은 몰랐습니다
네임넴
이 내용을 따라가며 경기를 다시 봤는데 소름이 돋네요
요일3장18절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등짝이 04에버 4강 5꽉까지가면서 한번 얻어맞더니 msl에서 제대로 뚜까팼죠 ㅎㅎ
그렇게 프로토스의 테란 재앙 최연성과 저그 재앙 조용호를 물리치고 우승 타이틀 하나 더 차지 하나 싶었는데..

진정한 프로토스의 재앙을 넘어 스타1의 재앙에게 지는 ㅜㅜ
Vinnydaddy
김성재 -> 김성제...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윤지호
최연성이 그냥 물량만 잘 찍어내는 테란이었다면 그렇게 강력한 프로토스전을 보여주진 못했을 겁니다.
실제로 에버스타리그 4강 1경기처럼 대놓고 물량전을 하면 박정석이 이길 때도 있었죠.

최연성의 진정한 강함은 심리전에 있었습니다. 초반에 상대를 쫄게하는 심리전이요.
물량펌핑에 대한 이해도도 분명히 남달랐으나 최적화와는 결이 다른, 상대를 쫄게 해서 공격 못오게 하거나 올인하게 만드는 그런 심리전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물량펌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연성이 리플레이 도입을 매우 싫어했죠. 본인은 이미 상대 심리를 거진 다 알고 있는데 리플레이를 통해 분석되면 그 강점이 사라지니깐요.
김치찌개
글 잘 봤습니다
박정석 vs 최연성은 항상 재밌었네요
에버리그 4강 1차전도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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