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0/05 23:12:31
Name   이사무
Subject   미생 & 얼어붙은 왕좌
얼마 전 추석 연휴,  새벽에도 잠이 안와서 채널을 돌리다 보니
예전에 한참 뜨거웠던 드라마 미생이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개인 적으로는 드라마는 원작 만화에 비해  작위적이거나 극적으로 꾸민 부분이 너무 많고
후반 부로 갈 수록 오버가 심해져서 많이 실망한 작품인지라...다시 볼 엄두가 나지않아
바로 티비를 끄고 방에 들어와  미생 전권이나 다시 읽기 시작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캐릭터, 상황들 이기에 그리 흥행한 것이겠지만
이 번에 다시 읽으면서 내가 근래에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들과 너무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웃으면서 끝까지 다시 읽고 이 글을 쓰게 됐다.




내 20대의 절반과  30초중 반은 끝없는 나락 속에 있었다.

친구들이  여러 직종의 전문직 종사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거나 결과를 얻을 때,
혹은 대기업에 취직을 하거나 유학을 갔을 때 부터
그들이 자리를 잡아갈 나이가 되고 결혼을 할 때 까지,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몸이 아프고, 다시 마음이 아프고, 또 몸이 아프고, 또 다시 마음에 더 아프고....
계속되는 여러 질병과 수술, 치료 과정에서의 우울증, 그리고 심해진 공황장애...

나름 학창시절부터 성적도 좋았고, 대학에서도, 주변에서도 기대를 받는 편이었고
하려는 진로 나 목표 역시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20 중반 이 후의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그 때 까지 한번의 지각도, 결석도 없던 인생을 보냈던게 무색하게
아픈 채로 복학 한 후의  나는 강의실 문앞에서 돌아서기,  강의실에서 5분거리인 지하철 역 계단에서  멈춰서있기 부터 시작하더니
나중엔 그냥  외출 복을 입고 가방을 맨 체로 침대에 누워 등교마저 제대로 안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몸과 정신이 병으로 피폐해지면서, 나는 방 안 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거나, 자살 충동을 매일 느끼던
내가 일어나서 다시  잡은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워3다.
(워3는 오베 때 부터 하긴 했지만, 그냥 적당히 하는 수준이었고 즐기는 정도였다.)


원사운드의  워3 웹툰에서 장재호의 에피소드를 아실 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내 생활이  그 웹툰의 내용 그 자체였다.  
일어나서  부팅 후 워3 래더 서치 , 점심 먹고 다시 래더,  저녁 먹고 다시 래더, 자기 전 까지 래더, 그리고 반복.

당시의 나는 가족, 연인 , 친구,  모든 것에 대해 실망하고 상처받고 스스로에 절망했던지라
그나마 쓸 수 있던 체력과 정신은 모두 워3에 몰두하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 했다.

유행하던 전략도, 프로게이머들의 플레이나 리플도,  아무 것도 보지않고
그냥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살려고도 죽으려고도 하지 않기 위해 그냥 게임 만 반복했다.
유행하는 정석도 뭐도 아닌 이상한 나만의 플레이로 래더 상위권에 들어서자
꽤 많은 클랜에서 스카웃제의를 받았고 ,  현실을 포기하고 외면한 나에게 워3 속의 커뮤니티는  또 다른 세계이자 위안이 되었다.

친구들이 자기 살 길을 찾고 앞가림을 하기 시작 할 때,  나는 프로게이머들이나 유명고수들과 래더에서 맞붙으며 만족했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클배나 온라인대회를 나가는 것에 삶의 만족감을 느끼며 연명했다.

프로들, 그리고 그 이후에 프로가 된 라이벌들(?)과도 수 많은 게임을 하면서 결정적인 차이도 느꼈지만
프로가 될 려고 하는 것이 목표도 아니었기에 신경쓰지 않고 나는 그냥  오직 게임만 할 뿐이었다.
한 클랜원은 나보고 게임을 구도자처럼 한다고 농담 섞인 말을 하기도 했듯이,  워3는 내게 그냥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 경제 한파가 오자 ,해외 역시 워3 리그 스폰들이 끊기며
급작스럽게 그나마 있던 국내 워3 유저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와우나 롤 같은 게임들로도 그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많은 유저들이 사라졌고,  비슷한 무렵 쯤에 나 역시 건강이 너무 안좋아져서 워3 조차 못 하게 되어 잠시 떠나게 되었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돌아왔지만,  이미 그 공간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점점 플레이 시간이 줄어갔다.
건강이 좋아진 나는 더 이상 워3는 내가 모든 것을 걸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현실 역시 장그래처럼 남들처럼 만큼만 살려고 하기에도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였다.


장그래가 백지의 상태에서  인턴을 하고, 비정규직이 돼서 다시 처음 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게 된 것처럼,
나 역시 서른 중반을 앞에 둔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추리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가능 한 것들을 하기 시작했지만 10년 가까이 일반인들의 삶에서 떨어진 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모든 것들 이  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생소했다.

고졸이란 학력에서 장그래가 좌절감을 느끼듯이
반대로 나는 남들이 흔히 명문대라고 하는 학부를 나왔음에도 그 딴 건 전혀 상관도 없는 삶을 살게 되었고
그 시간과 비용을 오히려 이제는 불필요 했다고 여기게 됐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만화 속의 장그래가  회사에서의 현실을 바둑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분석하듯이
지금의 나는  새로운 삶을 워3란 패러다임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생을 보면서 정말 이건 내 얘기구나 라고 공감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새로운 커뮤니티 내에서의 사람들의 행동 패턴 ,  모르는 새 분야를 공부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
나는 끊임없이 게임을 하듯 워3를 투영해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것의 극한은 통한다고 했던가

오히려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를 하던 때 보다
지금이 훨씬 모든 부분에서 더 많은 통찰력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잘 들어맞고 많은 도움이 되곤 한다.


내가 장재호와 게임을 여러 번 했다고 장재호처럼 잘했던 것도 아니고
그럴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공간에서 수도 없이 보고 맞붙던 사람들이 그 업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봐도
별 감흥이 있진 않았다.

내가 워3에 그렇게 퍼부은 시간과 노력들이 지금의 내 일들에는 직접적으론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 시간들이  아무 의미가 없던 것들이 아니었다는 점이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하는 데  미약하나마 힘이 되곤 한다.


장그래가 그랬던가?

아직 나의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P.S. :  그래서 와우와 하스스톤을 합니다....(농담)






8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662 7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2 + arch 24/11/15 50 0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4 + nothing 24/11/14 590 18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322 8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361 6
    15041 영화미국이 말아먹지만 멋있는 영화 vs 말아먹으면서 멋도 없는 영화 3 열한시육분 24/11/13 484 3
    15040 오프모임11/27(수) 성북 벙개 31 dolmusa 24/11/13 569 3
    15039 요리/음식칵테일 덕후 사이트 홍보합니다~ 2탄 8 Iowa 24/11/12 331 7
    15022 기타[긴급이벤트] 티타임 따봉 대작전 (종료) 19 dolmusa 24/11/05 1009 31
    15038 정치머스크가 트럼프로 돌아서게 된 계기로 불리는 사건 3 Leeka 24/11/11 950 0
    15037 일상/생각와이프와 함께 수락산 다녀왔습니다. 10 큐리스 24/11/11 469 4
    15036 일상/생각과자를 주세요 10 하마소 24/11/11 505 17
    15035 일상/생각화 덜 내게 된 방법 똘빼 24/11/11 362 14
    15034 일상/생각긴장을 어떻게 푸나 3 골든햄스 24/11/09 570 10
    15033 일상/생각잡상 : 21세기 자본, 트럼프, 자산 격차 37 당근매니아 24/11/09 1658 42
    15032 IT/컴퓨터추천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나 13 토비 24/11/08 676 35
    15030 정치 2기 트럼프 행정부를 두려워하며 13 코리몬테아스 24/11/07 1422 28
    15029 오프모임[9인 목표 / 현재 4인] 23일 토요일 14시 보드게임 모임 하실 분? 14 트린 24/11/07 492 1
    15028 도서/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6 다람쥐 24/11/07 700 31
    15027 일상/생각그냥 법 공부가 힘든 이야기 2 골든햄스 24/11/06 656 16
    15025 생활체육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550 31
    15024 정치2024 미국 대선 불판 57 코리몬테아스 24/11/05 2207 6
    15023 일상/생각마흔 직전에 발견한 인생의 평온 10 아재 24/11/05 765 24
    15021 생활체육요즘 개나 소나 러닝한다고 하더라구요 10 손금불산입 24/11/05 534 13
    15020 문화/예술2024 걸그룹 5/6 8 헬리제의우울 24/11/04 487 1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